상징은 독특하다. 상징은 형이상학적이다. 상징은 우리가 사는 세계 너머의 어떤 것을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상징은 그래서 삶의 의미를 구하는 일과 맞물린다. 삶의 의미란 우리들 사이에 있지 않다. 삶의 의미에 다가가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삶의 한계를 넘어서 더 높은 곳, 저 바깥으로 가서 머물러야 한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가 말해주는 바를 응용해서 말한다면 우리 삶의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 근원적 토대는 우리 삶 안에서는 말해질 수도 얻을 수도 없다. 그것은 저 밖에 있으며, 우리는 죽어도 그 바깥에 갈 수 없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이 세상에 구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얼핏 볼 뿐이다. 비트겐쉬타인은 자신의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존경받을 만한 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 수 있는 사람만이 알아챌 자물쇠를 문에 거는 것이다.' '상징'이란 바로 그런 자물쇠이다.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의미를 규정해주는 세계의 연결고리인 것이다. 상징은 자물쇠처럼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기호는 자기 주변의 것들과 무한한 꾸러미를 연속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열쇠들의 연쇄이다. 이 열쇠들을 자물쇠에 무한히 끼워넣어 보지만 언제나 어긋난다. 그저 좀 더 그럴듯 한 자물쇠-열쇠의 짝패가 가끔씩 나타날 뿐이다. 우리는 철컥거리는 듯한 시늉에 금새 환희작약했다가 다시 금새 풀이 죽을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상징을 그럴듯한 열쇠-자물쇠의 짝패로, 그러니까 오랜 시간 쌓여온 기호 관습(도상해석법)에 의존해서 설명해 나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리의 뇌리속에서 불교의 상징들은 어느 새 그 법력을 고갈당한다. 우리는 이해가능할 법한 선물셋트를 얻지만 미궁 그 자체는 놓쳐 버린다. 이게 문화적 해독능력(Cultural Literacy) 정책이 지니는 한계다. 문화적 해독력은 잡동사니같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종합선물셋트를 예쁘게 정리하는데는 아주 효과적이지만 '상징'이 넌지시 건네는 미궁, 신성, 침묵의 각성은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린다. 좋다. 우선 어설프게라도 이해하자. 그러나 그 다음에는 버려라. 강을 건넜으면서도 뗏목을 이고서 가는 짓은 어리석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버리기 위해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