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은 책이 발간되어서 추천하고 싶어서 주책없이 또 글을 올립니다. 키스 존스턴의 <즉흥연기>입니다. 부제는 '연기와 숨어있는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놓았군요. 이 책은 저와 인연이 많습니다. 유학간 제 여자친구가 보배같이 아끼던 책이었는데 떠나면서 저에게 남겨주고 간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이 오늘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군요. 출판사는 지호이고요. 값은 만오천원이네요.그녀와 저는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저는 이론과 비평 쪽에 관심이 많아서 연극이든 영화든 개념들로 잘게 쪼개는 경향이 있는데, 그녀는 반대로 창작 쪽에 관심이 많아서 제가 그런 태도를 보일 싹수를 보이려는 찰라마다 희번쩍한 입담으로 제 자존심을 걸레로 만들어 놓습니다. 연극판이랑 강의 술자리 뒷풀이에서 갈고 닦은 실력은 너무도 막강해서 그녀의 썰 앞에서는 그야말로 누구도 추풍낙엽이요, 일엽편주에 풍전등화랍니다.어쩌다가 제가 이길 경우도 있습니다. 대충 대전기록을 챙겨보면 제 승률은 약 25%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 꼭 들고 나타나는 책이 이 책이었습니다. 그것도 알록달록한 태그가 줄줄이 꼿혀 있는 이 책 원서를 들고 와서는 납죽납죽 펴대면서 내가 저번에 그녀를 KO패 시킨 구절들을 정통으로 치고 올라옵니다. 그녀에게 이 책은 강력한 탄환들(철갑탄!!)로 가득찬 탄창같은 거죠. 예를 들어 이런 구절들입니다.'...우리는 얼떨결에 만들어지는 것들이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작품보다 못할 것이 없고 때로는 그 이상으로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 뒤로 나는 토론에서 나온 생각치고 기발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칼 웨이버는 브레히트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배우는 무언가를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이 설명하려 들기 시작하면 브레히트는 리허설에 토론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몸으로 행해져야 한다며....(많은 브레히트주의자들이 이 거장의 관점을 견지하지 않는다는 점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최고의 논쟁이 평론가의 재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해결책 중에서 탁월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게다가 토론하는 시간 대부분이 당면한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위 문제 따위에 할당된다. 나의 태도는 고무 용해액을 만들기 위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용해제 하나하나에 고무 조각을 담궈 보았던, 그래서 이론적으로만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던 모든 과학자들에게 한방 먹인 에디슨의 태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그녀가 남겨두고 간 것이지만 들춰보기가 왠지 꺼림직하더군요. 무서운 거죠. 읽다가 엄청 깨질까봐... 하지만 결국 읽게 되더군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마력을 뿌리칠 수 없는 책입니다. 특히나 책 앞부분에 'Note on Myself'라는 장은 백미입니다.이 장에서 작가는 경쟁체제 속에서 승자가 되기를 강요받는 교육환경이 얼마나 사람의 사고와 상상력을 경직시키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저능아는 없는 법인데, 학교체제가 저능아를 만들고, 오히려 그런 학교에 가장 잘 적응한 진짜 저능아가 대접받는, 이상한 환경을 꼬집죠. 그리고 이렇게 상상력이 축출되어져 버린 각 잡힌 이들을 어떻게 다시 제 위치로 돌려놓을까하는 방법론도 이야기 해줍니다. 특히 이런 이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방법보다는 회피하는 방법들을 더 잘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걸 까발려 주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문제에 직접,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