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우진(유지태 분)이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궁극적으로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오대수가 자신의 일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사실, '인지 불가능한 상태', '무지'였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왜 그리 무감각했을까? 이유는 그가 그의 혀를 놀렸을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질서와 안녕을 보지하려는) 익명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대수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평범할수록 진부할수록 '사회'의 무의식적 대리자(편재하는 경찰관)가 된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에게 가공할 상처를 입힌다.

따라서 우진은 그에게 처방을 내린다. 1단계는 대수를 치명적인 사회의 오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2단계는 사회에 의해 오염된 대수의 머릿 속을 복수심으로 말끔히 청소하게 하는 것(그래서 감금되기 전의 대수와 감금 후의 대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순수한 복수심의 화신이자 사회의 그물망 밖의 존재...) 3단계는 그를 다시 사회("더 넓은 감옥")로 돌려보낸 후 우진과 유사한 경험(근친상간)을 겪어보게 한다. 4단계는 자신의 과거를 '정말로' 자각하고 스스로 혀를 자르고 자기 딸을 애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다.

혀를 자르는 부분은 외디푸스 신화를 연상시키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외디푸스는 자기 눈을 찌르고 어머니-아내를 떠나지만, 오대수는 자기 혀를 자르고 딸-아내에게로 돌아간다. 외디푸스 신화는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가족제는 보호된 후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올드보이>에서는 복수가 완료되면서 사회/가족제는 파괴된 후 모두가 행복해진다.

르네 지라르의 개념틀을 빌자면, <올드보이>에는 두 가지 폭력이 있다.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 오대수의 혀는 순수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사회를 보호하는 폭력으로 사회 구성원의 '무지', '인지불능'을 조건으로 행해진다. 부주의함은 이 폭력의 핵심적 성격이다. 물론 당하는 놈에게는 그냥 말 그대로 '폭력'이다. 우진의 누나가 죽어야 했던 것처럼... 우진이 대수에게 가하는 폭력은 불순한 폭력이다. 순수한 폭력은 무지의 상태에서, 사회(질서)의 정당화를 통해 익명적으로 행해진다. 반면 불순한 폭력은 주인이 확실하며 사회/질서에 대해 위협적이다.

복수심은 불순한 폭력이다. 그것은 법이나 공권력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수가 산낙지를 질겅질겅 씹는 일, 우진의 뼈와 살을 아작아작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충동에 가깝다. 복수심으로 이빠이 충전된 생명력...  여기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는 나는 변태일까? 복수가 완수되면 생명력도 고갈되고 삶도 지속될 수 없다. 우진은 자살한다. 대신, 죽으면서 자신을 닮은 種을 하나 복제하고 떠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대수에게 우진은 은인이다. 진부하고 흐리멍텅하며 미분화된 상태의 대수라는 '인간'을, 눈을 부라리며 생명력으로 가득찬 '야수'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퇴화를 통한 진화일까? 혹시 이 영화 해피엔딩일까?

 


고야, <1808년 5월 3일>, "총을 쏘는 프랑스군의 뒷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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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3-12-0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민의 무기는 익명적 다수성이고 귀족의 무기는 동원적 전능성이다. 평민은 다수의 그림자 속으로 자기 얼굴을 숨기고, 귀족은 자기 얼굴에 잔인함과 자애함의 이중가면을 씌운다. 귀족의 도덕은 폐쇄적이고 근친적이다. 반면 평민의 도덕은 번식적이다. 평민의 힘은 번식과 확대를 통해 강화되지만, 귀족의 힘은 독점과 집중을 통해 강화된다. 대수와 우진의 싸움은 평민의 도덕과 귀족의 도덕 사이의 싸움이기도 하다.

간달프 2004-01-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염세적이다. 인간은 본디 착한데 사회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회가 만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 만악의 근원을 파괴하려는 자 조차도 그 악에 발목이 잡혀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착하든 악하든 무슨 짓을 하든 숙명적으로 자멸한다. 여기서 박찬욱의 위치는? 혹시 스스로 선지자연하는 것인가? 말세를 전파한 요한 흉내내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