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슈레이가 헤겔과 스피노자를 대립시키고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 신중형이 파노프스키가 뒤러를 통해 유럽 르네상스를 축으로 하는 유럽중심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을 비판한 것, 츠베탕 토도로프가 그의 <일상 예찬>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서 발견한 (나의 개인적인 造語지만) '비연속적이면서 순간적인 영혼의 도약' 등은 뭔가 공유하는 바가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의 '까이에 쇼비지' 시리즈 중 <곰에서 왕으로>편에서, 대칭성 사회와 비대칭성 사회를 대립시킨다. 문화와 자연의 구도가 문명과 야만의 구도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불교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에 주목한다. 불교는 비대칭성 사회 속에 자연의 힘(空)을 다시 끌어들여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해체하고 문화와 자연의 구도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비대칭성 사회는 외부성(자연)을 내부성(사회)으로 끌어낸(테크네) 사회다. 대칭성 사회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협하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베푸는(포이에시스) 존재이고, 곰(혹은 범고래, 표범, 연어 등)은 인간(특히 샤먼이나 전사)과 자연이 제한적으로 교류하는 신비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비밀스런 어떤 것을 끌어내어(테크네) 그것을 자기들 사회 속으로 가져온다. '검'이나 '불과 물을 다루는 능력' 등이다. 자연의 비밀을 가진 곰(곰의 비밀)이 인간 세계로 끌어들여와지고 곰은 곧 왕이 된다. 자연의 비밀을 획득한 왕은 절대자가 되고 인간 세계는 그 절대자를 중심으로 서열화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전의 대칭성을 상실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원정대는 사우론이란 악 자체를 제거하기 보다는 반지를 파괴한다. 왜 그렇게 번거롭게? 위의 설명에 따른다면 반지는 자연에서 추출된 검으로 대칭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사우론이 아닌 반지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대칭성 사회에 외부는 없다. 자연마저도 이제는 내부의 일종으로 분석,해체,재조립되는 것이 된다. 헤겔식으로 보자면 인간의 안티테제였던 자연과의 대립이 지양되어 인간 세계 속으로 '발전적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대립, 지양, 발전이란 구도는 서양에서 좌파든 우파든 공유했던 모델로 그들이 외부로 팽창할 때마다 대립된 외부는 지양되어야 할 자연이 된다. '동양'도 그런 자연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우리(cage)가 완성된다. 공간적 팽창과 함께 과거와 미래도 함락된다. 네버네버 랜드의 동물원의 일원으로 태어나 우리는 거기서 나고 크고 죽는다. 우리의 존재는 네버네버 랜드의 위대함을 장식하는 존재로 머문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코나투스'를 상실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순간 외부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불교는 그 외부를 재빠르게 포착하게 해주는 신념체계인지도 모른다. 외부를 발견하는 순간 거대한 우리(cage, we)는 공허한 것이 된다. 우리는 각자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에서 예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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