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프스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원근법의 대두는 서양과학의 대두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 과학의 공간은 인간의 구체적 체험을 단순화한다. 어떻게 보면 이 단순화는, 그림을 두고 말하자면, 그 관점의 단순화에 관계되어 있다. 퍼스펙티브의 공간에서 모든 것은 보는 주관의 관점 - 그것도 한 눈으로 보는 관점에서 조직화된다. 이것은 풍경을 체험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그리하여 주관과 객관이 혼융되어 체험되는 풍경은 체험이기를 그치고 주관의 저쪽에 있는 객관적 사실로 바뀌게 된다. 결과는 체험적 사실의 왜곡이며 또 빈약화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험자로서의 인간의 단순화일 것이다. 원근법에서 체험자는 단순한 눈이 된다. 원근법에 있어서의 주체 또는 보는 눈의 문제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위베르 다미쉬가 이 단순화를 설명하는 것은 빌건대 (사실은 라캉을 인용한 것이지만), " ..... (그림의) 기하학적 평면의 주체로서 나는 소거된다." 이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욕망을 소유한 주체로서의 자아가 소거된다는 것이지만, 더 확대하면 기하학적 단위 이상의 것으로서, 사회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신비에 대해 유연하게 노출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자아가 억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소거로 인하여 가능해지는 세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원근법에서의 자아의 소거 또는 더 정확하게 수학화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아에게 무한한 새 가능성과 자유를 가져온다. 데카르트이 사유하는 자아의 세계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정연한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뉴튼 역학의 세계다. 뉴튼의 세계에서 방향이나 한계가 없이 움직이는 물체는 물체이면서, 이것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운동법칙을 따르는 한, 수학적으로 사유하는 자아이다. 이 사유는 방향이나 한계에 제한됨이 없이 움직이는 원리이며 또 그 실체다. 수학화된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러한 원칙적 연결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의 외면 세계에 대한 관계보다도 그것의 근본에 있는 인간 해방의 가능성이다. 그림의 경우로 말하건대, 이러한 자유에 대응하는 것이 근대 서양화에서 보는 바 기법과 소재의 다양한 발전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화는 매우 단조로운 그리고 억압적일 수도 있는 틀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화에서 공간은 보는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어디에서나 구성될 수 있는 것인데 대하여, 동양화에서 그것은 특정한 사물과의 관계 - 산과 물과 바위와 구름 또는 선택한 화초와 수목을 통해서만 암시될 수 있다. 그림의 특징들은 그대로 다른 인간활동들의 특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우창, <풍경과 마음> (생각의 나무, 2003) p.118-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