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암흑관의 살인 1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키리고에 저택 읽고 맘에 들어서 <십각관의 살인>와 <암흑관의 살인>을 읽었다. 무슨 정보를 알고 읽은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십각관> 이후에 <암흑관>을 읽은게 아주 잘한 일이었다. 두 소설에 연결점이 있는데 순서가 반대였다면 재미가 30퍼센트는 반감했을듯. 아 이 작가 정말...취향이라기엔 너무 음산하다. 하지만 거부할 수가 없게 매력적이다. 추리소설로서의 트릭도 만만찮고 여러권의 책에 걸쳐(이라고 해봐야 아직 세 권 밖에 안읽었지만) 모두 통하는 정교한 세계를 만들어간다던가 하는 솜씨도 굉장히 특이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정통 미스터리물의 모든 요소가 다 갖춰져 있어서 좋았다...라지만 사실 <암흑관>은 트릭보다는 분위기가 더 강력하다. 이렇게까지 무서운 이야긴줄 모르고 시작했다가 보고나서 이틀째 밤에 불을 못끄고 자고 있다. 덜덜...으악 미칠 지경이다. 내용만 보면 판타지 호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한번 빠지면 현실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무시무시하고 악마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오래된 저택에 사는 집안의 비밀, 이런 설정은 추리소설에 흔히 있는 것이지만 그 비밀이 상식을 초월해서 거의 오컬트스러운 환상 속으로 들어간다. 판타지가 아니라 미스터리 장르인만큼 당연히 이런 악마적 세계를 현실로 인정하고는 있지 않지만, 약간, 아주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는데 이게 정말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너무 무서워서 이쪽을 오래 상상하긴 좀 그렇지만 암튼 이 어둠의 포스가 꽤나 강하고 그 점이 트릭이나 추리의 논리성 같은거보다(물론 그런게 없지는 않다) 더 이 소설 전체를 이끌어나간다. 아 정말 책 다 읽고나서 밝은 세계가 그리울 정도였다. 아예 처음부터 판타지 호러라면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을거 같고 그런 요소가 없는 명쾌한 추리라면 또 아우라가 없었을거 같은데 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뭔가 두근두근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물론 심하게 취향을 탈 것 같은 책인데다 일단 길이가 너무 길고 - 쓸데없이 긴건 아니라는 작가의 말이 앞에 있었지만 조금은 줄였으면 싶었다(분량 자체로만 보면 좀 천천히 읽을 책이 필요했던 나에겐 오히려 좋았지만) - 추리적 요소가 분위기에 눌리는 느낌 등 단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압도적인 분위기로 이 모든 걸 상쇄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야아츠지 소설 세 권 읽어본 바에 따르면 책마다 내 맘에 드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하나씩 들어있더라. 그것도 남자가 쓴 소설치고는 남자 캐릭터가 매력적인 경우가 많아서 흐뭇했다. <키리고에 저택>에서는 (남자는 아니지만) 미즈키가 인상적이었고,<십각관>에서는 엘러리가 맘에 들었는데, <암흑관>에서는 겐지와 츄야가 다 좋았다.   

 이하 초강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설을 다 보신 분만 드래그해주세요. 이미 경고했습니다.

거기다 겐지와 츄야 둘 사이는 (나만 느낀건줄 알았는데 다른 리뷰보니 딴 사람들도 느낀 바더라!) BL 만화 같은 묘한 느낌마저 주는데 둘 다 내 맘에 든 캐릭터라 이 설정도 좋았다...라지만 사실 처음엔 감을 잘 못잡고 왜 겐지는 츄야를 특별대접하는게지 이렇게만 생각하다가 뒷부분에서 아 이거 분위기 묘하다! 이렇게 느낌. 다만 이 둘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미래를 좀 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어둡진 않았을거 같다. 교고쿠 나츠히코 소설 역시 어둡지만 그래도 우리의 주인공들은 밝은 쪽에 있기 때문에 좀 안심이 되는 것에 비해 <암흑관>은 정말 너무 어둡다. 츄야의 본명이 밝혀지는 순간 정말 숨넘어갈뻔 했고, 겐지가 진짜 겐지가 아니라는걸 안순간 살짝 실망하기까지 했지만(달리아의 마성! 그 미모! 그 포스가 너무 강해서 그게 없는 겐지는 왠지 좀 평범해진거 같아서), 곧, 아냐 그래도 이 제대로 미친 집안의 피를 안받은게 다행이지. 겐지, 이제 과거는 잊고 츄야랑 새출발하는거야! 하는 순간 허망한 결말. 흑. 이 커플(?)이 맘에 들어서 겐지와 츄야를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판타지>이기를 개인적으로 살짝 바래기까지 했다. 부활해서, 츄야가 암흑관으로 돌아오기를 몇백년동안 기다리고 있는 겐지...를 상상해보다가도 집어치우게 된다. 만약 정말 그런 설정이었다면 오히려 덜 재미있었을거 같다. 어디까지나 이 세계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계이고 이 소설의 장르는 판타지가 아니다. 으휴..어둠의 포스를 좀 잊어버려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계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계관의 살인>도 읽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번역돼 있는(절판됐다는 옛날꺼는 제외하고) 아야츠지 책은 다 본 셈. <미로관의 살인>도 곧 나온다니 기다려진다. <시계관>에 대해서는 책 읽기 전에 정말 천인공로할 사건이 있었다. 심심풀이로 <암흑관>이랑 <십각관> 리뷰들 좀 찾아보고 있었는데 어디서 검색하지도 않은 시계관 이야기가 불시에 튀어나온데다 무려 범.인.의.이.름.을.누설하는 정말 천인공로할 포스팅과 맞닥뜨렸던것이다!!!! 그나마 화들짝 놀라 급히 나오는 덕분에 정확한 이름이 머리에 남진 않았는데 그래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도록 뇌리에 박혀버린 그 머리글자!!!! 아놔 정말...(다른 사람의 살의?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포스팅은 제발 삼가해주시길)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막상 읽다보니 이건 범인이 누군가 하는 것보다 트릭의 기발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책인데다 워낙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남은 사람이 극소수이다보니 범인 찍기의 의미가 없었다는.. 아 <십각관> 트릭도 기발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트릭이다. ***가 ***문을 열고 나오다 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의 진실이 밝혀질때는 정말 머리카락이 다 빳빳한 철사처럼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등장인물이 여럿 나오는데 누가 누군지 구별도 잘 안가고 이 모든 사람들을 단지 죽기위해 등장시킨 느낌까지 드는 작위적인 설정이 좀 거슬렸지만 트릭 하나로 모든 단점을 커버한다. (이 엄청난 트릭을 마구 떠들고 다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지만 그러다 또 다른 사람의 살의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자제하기기로 한다. 이런 트릭을, 상상할 수 있었으니 하는 사람은 추리소설의 신 아니면 거짓말장이다) 그러고보면 <십각관>에서도 이런 단점은 있었는데 그냥 이 작가 특유의 것인가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설정을 위한 설정, 트릭을 위한 트릭...하지만 이 설정과 트릭 자체가 너무 기발하고 끌리는 느낌이라 다 읽고나면 단점은 애교 정도로 커버된다. 트릭도 트릭이지만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건축가의 광기어린 세계를 매 편마다 맛볼 수 있는 것도 즐겁다. 그리고 세이지의 광기, 세이지가 설계한 건물의 광기는 단지 설계를 의뢰한 집주인의 광기를 구체화한 것일 뿐이라는 작가의 목소리도 뒷골이 서늘한 아우라를 남긴다. 한 인간, 한 집안의 집요한 망상이 낳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세상과 동떨어진 괴저택...아 이런 설정만큼 추리소설팬들을 설레게 하는 게 있을까. 매권마다 곁들여있는 건물의 평면도를 들춰가면서 책읽는 맛이 쏠쏠하다. 과연 누가 제정신인가 매순간 의심하게 만드는, 광기와 이성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는 듯한 묘한 분위기도 야아츠지의 특허인거 같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은 아무리 트릭이 좋아도 아우라가 없으면 좋아하지 않는데 간만에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작가를 만났다. 우리의 주인공 가와미나미가 가만 보면 매번 별 활약도 안하는 것 같은게(아직 안 읽은 관 시리즈에선 좀 활약하려나..) 좀 웃기긴 한데 따지고보면 가와미나미는 탐정이 아니라 탐정조수 역이니까 그런 것치고는 똘똘한 편인듯. 뭣보다 탐정역의 시시야 캐릭터가 재밌고 가와미나미-시시야 콤비도 나름 흥미로와서 점수 상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한희선 옮김 / 시공사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쿄쿠 나츠히코 이래 얼마만에 읽는 정통 추리소설이냐! 아니 이건 고쿄쿠보다 더  정통파다. 눈보라에 고립된 호숫가 옛 서양식 저택의 연쇄 살인사건, 수수께끼같은 거주자들, 각자 의심스러운 면이 있는 불청객들, 거급된 우연과 숨겨진 동기, 사건현장마다 발견되는, 오래된 동요에 얽힌 비유...수없이 등장해온 설정이지만 이런거 나올때마다 긴장하게 되는거 보면 고전은 영원한 거 같다.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도 아예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지만' 이라는 둥의 대사까지 등장시키면서 이 고전적 세팅을 들고나온다. 하지만 물론 그런 만큼 뭔가 새로운 걸 보여주지 못하면 실패일텐데,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새롭지 않다는걸 역이용한다는 면에서 새로웠다. 추리소설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을 듯한 자기반영적 트릭이랄까, 암튼 묘한 장르적 쾌감을 느끼게하는 색다른 맛의 트릭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이런 쾌감 덕분에 멋지게 속았다는 느낌(추리소설에서 아주 중요한!)을 잃지 않는다. 

단점일수도 있는 이런 장르의식적인 면을 묘한 매력으로 바꾸어놓은거 말고도 이 책의 장점이 더 있다. 정통 서양식 설정을 일본풍과 믹스 매치해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 세팅 능력이다. 아니 사실 섞었다기보다는 서양 것을 일본화시켰다는 말이 맞겠지만 이게 단순히 흉내낸 느낌이 아니라 부조화속의 조화랄까 기묘한 시너지 효과가 있다. 작가 개인의 개성이고 역량이기도 하겠지만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역사가 오래되었을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듯한 산속의 호수라던가 하는 설정에 위화감이 없는 건 역시 일본이라는 느낌.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키리고에 저택 그 자체라고 할 정도로 저택의 존재감은 강하다. 일단 모름지기 정통 추리소설이라면 사건현장의 평면도는 필수. 여기에도 어김없이 책 앞에 저택 두 층의 평면도가 붙어있다. 공간 자체가 그렇게 복잡한건 아닌데 작가의 묘사방식이 독특해선지 내 머리가 나빠서인지 계속 평면도를 들춰보지 않으면 공간의 배치를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중간중간 점검해가면서 이 집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맛이 괜찮았다. 저택 안의 장식들에 대한 상세하고 치밀한 묘사도 압권이다. 정말 이건 영화로 만들어야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활자를 따라가기가 벅차다. 너무나 복잡하고도 정교한 묘사에 실제로 이런 곳에 가보지 않고서는 이렇게 쓸수가 있을까 싶은 느낌까지 든다. 

구석구석에 수많은 물건들이 있는, 아름답지만 어딘지 기묘하고 음산한 인형의 집이나 문닫은 박물관에 들어온 거 같은 분위기...정교한 꽃무늬가 음각된 푸른 유리창이나 눈보라 속에 물을 뿜고있는 해룡의 분수, 인동덩굴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 오래된 초판본의 책들과 앤티크 도자기가 있는 장식장, 층계참의 하나단 인형들... 대충 허접하게 열거했는데 실제 책 속의 묘사는 훨 더 전문적이고 박식하다. 주석이 없다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정도로(주석은 좀 불충분한 편). 집에 얽힌 믿기 어려운 이상한 이야기와 더불어 모든 것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음산한 시각적 효과를 발휘한다. 여기에 청각적 효과까지. 눈과 호수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켜 조용한 저택에서 애잔하면서도 음울한 오르골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옛 동요의 멜로디라는데 우리야 모르니까...사실 외국인이 간파하기엔 거의 불가능한 트릭이다. 그래도 억울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이런 소품들, 이런 세팅 그 자체에서 오는 쾌감이 있기 때문에 그것만 따라가도 본전은 뽑았다는 기분이라서. 

이런 분위기 조성 능력은 어쩌면 교고쿠 나츠히코를 능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교고쿠 소설이 어둡지만 간간히 유머감각도 있는데 비해 이건 훨씬 더 고딕적인 분위기이다. 아야츠치 유키토, 몰랐던 작가인데 더 읽어봐야겠다. 쿄고쿠 새 소설 소식 상시 대기상태인 나에게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골의 꿈 - 전2권 세트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에 이어 쿄고쿠 나츠히코의 추리소설을 세번째로 읽었다. 치밀하다!! 순식간에 두 권을 다 읽었다. 논리적으로 살짝 의아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긴장감있게 읽힌다. 더구나 이 작가 특유의 초자연스러운 공포감 조성이라는 점에서는 압권이다. 도대체가 일본에는 왜 이리 원혼이나 귀신이 많은걸까 싶게 너무나 일본적인 그 으스스한 분위기. 비내리는 어두운 밤, 요기가 감도는 신사나 절 주변의 풍경 등등...책을 읽으면서 오래된 나무에서 풍기는 축축한 비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실감난다. 묘사를 길게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상황 자체가 너무나 이상하달까...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연속해서 등장하는데 짧은 문장에도 머리카락이 쭈볏 선다.   

하지만 분위기가 다가 아니다. 한바탕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놓고 나중에 아님 말고 식으로 결론을 흐리지 않아서 좋다. 아무리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쿄고쿠 나츠히코 소설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끝까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책을 읽어온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환상소설이 아니라 추리소설이라서 좋은거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수수께끼풀이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에서 정말 정통 추리소설이다. 모든 에피소드들, 모든 단서들이 퍼즐의 조각처럼 마지막에 가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는 쾌감이 정통 추리소설의 매력이라면 그런 매력을 요즘 보기 드물게 듬뿍 갖고 있는 소설이다. 합리적인 설명은 고사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포기하더라도 정돈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미친 이야기 조각들'을 결국엔 깔끔하게 짜맞추는 고쿄구도의 솜씨에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이 작가의 소설은 이야기의 층이 섬세하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굉장히 입체적인데 이것도 참 좋아한다. 교훈이나 설교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이야기 곳곳에 사회심리학적 분석이랄까 하는 것이 숨어있다. 무지나, 혹은 반대로 지나친 지식이 낳은 공포...인간 속에 숨어있는 어두운 면에 대한 이야기만이라면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쿄고쿠 나츠히코는 이 어둠을 파헤치면서 '실제로 어두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반전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뒤통수를 친다. 하지만 단순히 공포나 무지에 맞서 이성의 밝은 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가에는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   

책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잡고 거기다 살을 붙여가는 방식도 맘에 든다. (물론 <망량의 상자>의 '상자'처럼 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어떤 이미지가 한번 등장하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두번 세번..나오고 또 그것들 사이에 무슨 연결이 있는 것 같으니까 더 무섭다. 그 이미지에 얽힌(광골의 꿈에서는 '백골') 전설, 기록, 비전, 이론 등등이 현란하게 서로 얽히고 하나의 얼개를 형성하면서 사건이 해결된다. 이 얽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그 자체가 주술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광골의 꿈>은 <망량의 상자> 다음에 나온 소설인데 실제로 이 소설과 연결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꼭 그래서가 아니라 <망량의 상자> 다음에 읽으면 더욱 재밌다. <망량의 상자>에서 제시한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스포일러라 말하기 어렵지만...전작에서 제시한 것을 작가 스스로 교묘하게 뒤집고 다시한번 뒤통수를 친다. 

으스스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곳곳에 의외의 유머도 많다. 그건 등장인물들 성격때문일거다. 전작에서 슬쩍 슬쩍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기서는 아예 전면에 나서서 일...이 아니라 훼방을 놓고 다니는 이상한 탐정 에노키즈의 대사가 튀어나올 때마다 너무 웃겼다. 기바 형사의 단순하고 괄괄한 성격이 여기에 맞부딪히면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거리게 된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등장인물이 너무나 많이 나오고 그들이 서로 만나는게 너무 우연적이며, 일본의 역사나 전설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야기 가닥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너무 전문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의 기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하게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나 '불안' 같은 책은 척 사게 되지 않더라. 서점에서 슬슬 들춰보다가 그냥 내려놓곤 했다. 보통의 이름이 사고싶은 책 리스트에서 점차 사라질 무렵, 이 책, <행복의 건축>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오 이거다! 한달음에 달려가 샀다. 왠지 읽기도 전에 '삘'이 오는 책이 있는 법.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깝게시리 한나절에 다 읽어버렸다.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보보다는 글쓴이이 시각이랄까 감수성에 기대고 있는 책이 원래 좀 그렇듯이, 사알짝, 주제는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여행의 기술>과 큰 차이가 없다 싶기도 하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어슷비슷하다보니 이런 스타일로 두 권, 세 권..계속 읽어가면 처음의 재미가 계속 유지되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가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복잡한 이론을 늘어놓지 않지만 틀림없이 평소에 수많은 책을 읽어서 소화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책 한권 써봐야겠다고 급조해서 이것저것 읽어치운 것이 아니라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는 티가 나는거다. 글이 쉬우면서도 만만치는 않다. 왠지 실제 만나보면 조금 불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사람일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예민함에 휘둘리지 않고 슬쩍 자조적으로 빈정대는 뉘앙스를 실어 담담하게 글을 쓰는 것이 맘에 든다. 그렇다고 절대 소박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괜시리 감상을 늘어놓거나 자기 글에 자기가 도취되는 법이 없고 무엇보다 섬세하면서도 잘난척 하지 않아서 좋다. 관점은 있되 열광하지는 않으며, 살짝 비껴서서 차분히 이야기를 해나가는 느낌이다. 비록 이 사람의 미감 자체는 살짝 고전주의적이라  은근히 그런 쪽을 옹호하는 느낌은 들지만, 뭐, 큰 문제는 아니다(사실 건축은 고전주의와 가장 친화성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좋아한다. 엔지니어링의 측면에서는 아는게 없지만 장소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워낙 지대하다. 학교다닐 때 서양건축사를 듣기도 했고, 따로 공부하기도 했지만, 도무지 암기적인 방법으로는 머리에 남는게 없었던 것 같다. 르 코르뷔지에가 그 중의 하나였는데, 도무지 이 사람이 뭘 주장하려 했는지 정리가 안되더라. 그런데  전문 건축가가 쓴 것도 아닌 이 책에서 확 삘이 왔다! 보통은 절대 노골적으로 빈정대는 건 아니면서도 은근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정사'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명한 빌라 사부아는 실은 물매가 없는 지붕 때문에 물이 새서 집주인 사부아 부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고 불평하고 수십번 고쳐달라고 건의했다고...-_-)  

이상적인 미래도시의 실현을 위해 파리의 절반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극단적인 플랜 같은 사례를 통해 보통은 건축가의 이상이 평범한 삶의 디테일과 조화되지 못할 때 어떤 위험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존중하는 이런 시각은 내가 보통의 글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건축의 미덕'이라는 장에서는 균형, 우아, 질서 같은 단순한 원리들을 이야기한다. 사실 교과서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야기 솜씨가 아기자기해서 지루하지 않다. 특히 '우아'(grace)'라는 고전적인 미적 범주가 '힘'과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은 나름 새로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협곡에 가로놓인 다리와 유리창틀에서 드가의 발레리나를 연상하는 감수성이라니.       

책 전체에 걸쳐 건물 사진들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컬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담 책값이 확 뛰었을테고..요즘 사진만 요란하고 제대로 된 글이 없는 책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대로 이런 편집도 나쁘지 않았다. 이걸 일일이 다 조사하다니 대단하다 싶고, 특히 몇몇 건물들은 그 도시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인공도시 브라질리아에 가보고 싶다. (건축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건물이 서 있는 장소에 실제로 가보는거다! 보통이 썼듯이, 그 장소에 가면, 건물 그 자체, 건물을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p.s. 이 책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인 것은, 닭장 같은 아파트 월세 한 칸 마련하기도 빠듯한 대한민국 현실에서 건축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의 떡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집에 심미적 감각을 심는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뿐 아닌가 싶으니까 살짜쿵 심술이 난다. 물론 공공건물의 아름다움도 논할 수 있겠지만, 이 분야 역시 그다지 즐거운 현실은 아니지 싶다. 내가 너무 꼬인 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