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의 기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하게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나 '불안' 같은 책은 척 사게 되지 않더라. 서점에서 슬슬 들춰보다가 그냥 내려놓곤 했다. 보통의 이름이 사고싶은 책 리스트에서 점차 사라질 무렵, 이 책, <행복의 건축>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오 이거다! 한달음에 달려가 샀다. 왠지 읽기도 전에 '삘'이 오는 책이 있는 법.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깝게시리 한나절에 다 읽어버렸다.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보보다는 글쓴이이 시각이랄까 감수성에 기대고 있는 책이 원래 좀 그렇듯이, 사알짝, 주제는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여행의 기술>과 큰 차이가 없다 싶기도 하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어슷비슷하다보니 이런 스타일로 두 권, 세 권..계속 읽어가면 처음의 재미가 계속 유지되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가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복잡한 이론을 늘어놓지 않지만 틀림없이 평소에 수많은 책을 읽어서 소화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책 한권 써봐야겠다고 급조해서 이것저것 읽어치운 것이 아니라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는 티가 나는거다. 글이 쉬우면서도 만만치는 않다. 왠지 실제 만나보면 조금 불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사람일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예민함에 휘둘리지 않고 슬쩍 자조적으로 빈정대는 뉘앙스를 실어 담담하게 글을 쓰는 것이 맘에 든다. 그렇다고 절대 소박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괜시리 감상을 늘어놓거나 자기 글에 자기가 도취되는 법이 없고 무엇보다 섬세하면서도 잘난척 하지 않아서 좋다. 관점은 있되 열광하지는 않으며, 살짝 비껴서서 차분히 이야기를 해나가는 느낌이다. 비록 이 사람의 미감 자체는 살짝 고전주의적이라  은근히 그런 쪽을 옹호하는 느낌은 들지만, 뭐, 큰 문제는 아니다(사실 건축은 고전주의와 가장 친화성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좋아한다. 엔지니어링의 측면에서는 아는게 없지만 장소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워낙 지대하다. 학교다닐 때 서양건축사를 듣기도 했고, 따로 공부하기도 했지만, 도무지 암기적인 방법으로는 머리에 남는게 없었던 것 같다. 르 코르뷔지에가 그 중의 하나였는데, 도무지 이 사람이 뭘 주장하려 했는지 정리가 안되더라. 그런데  전문 건축가가 쓴 것도 아닌 이 책에서 확 삘이 왔다! 보통은 절대 노골적으로 빈정대는 건 아니면서도 은근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정사'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명한 빌라 사부아는 실은 물매가 없는 지붕 때문에 물이 새서 집주인 사부아 부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고 불평하고 수십번 고쳐달라고 건의했다고...-_-)  

이상적인 미래도시의 실현을 위해 파리의 절반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극단적인 플랜 같은 사례를 통해 보통은 건축가의 이상이 평범한 삶의 디테일과 조화되지 못할 때 어떤 위험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존중하는 이런 시각은 내가 보통의 글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건축의 미덕'이라는 장에서는 균형, 우아, 질서 같은 단순한 원리들을 이야기한다. 사실 교과서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야기 솜씨가 아기자기해서 지루하지 않다. 특히 '우아'(grace)'라는 고전적인 미적 범주가 '힘'과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은 나름 새로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협곡에 가로놓인 다리와 유리창틀에서 드가의 발레리나를 연상하는 감수성이라니.       

책 전체에 걸쳐 건물 사진들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컬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담 책값이 확 뛰었을테고..요즘 사진만 요란하고 제대로 된 글이 없는 책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대로 이런 편집도 나쁘지 않았다. 이걸 일일이 다 조사하다니 대단하다 싶고, 특히 몇몇 건물들은 그 도시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인공도시 브라질리아에 가보고 싶다. (건축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건물이 서 있는 장소에 실제로 가보는거다! 보통이 썼듯이, 그 장소에 가면, 건물 그 자체, 건물을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p.s. 이 책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인 것은, 닭장 같은 아파트 월세 한 칸 마련하기도 빠듯한 대한민국 현실에서 건축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의 떡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집에 심미적 감각을 심는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뿐 아닌가 싶으니까 살짜쿵 심술이 난다. 물론 공공건물의 아름다움도 논할 수 있겠지만, 이 분야 역시 그다지 즐거운 현실은 아니지 싶다. 내가 너무 꼬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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