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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生涯

  1.2 軍人 나폴레옹

  1785년, 포병사관으로 임관.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프랑스 국내의 정세는 곧 혼란으로 치닫는다.

  ※ 프랑스 혁명(Révolution française) 1789.7.14-1794.7.27
      革命暦 2년, 테르미도르 9일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이며
      내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것은 생략함.

  1792년, 나폴레옹은 앞의 코르시카 독립전쟁에서
  코르시카 측이 패배함으로 해서 프랑스령으로 되어있었던 그 코르시카 섬으로 배속 발령되었고
  이어서 아작시오 위병대(衛兵隊)의 중령(한국 계급으로)이 된다.


  * 코르시카 독립전쟁

  1729년~1769년까지의 40년간, '제노아 공화국'과 '프랑스왕국'의 압제로부터 '코르시카 섬'이 독립을 도모했던 전쟁. 별명은 <40년 전쟁>이며, 그 섬에서는 <코르시카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는 그 전쟁 중에 프랑스 측으로 전향했고, 그 공적으로 프랑스 귀족의 자격을 얻었다. 그 후,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토의 사관학교에 입학, 영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전쟁의 패배로 인해서 영국에 피신하고 있었던 독립파의 지도자로
‘파오리’의 심복이었으며, 나폴레옹과도 친척 관계에 있었던
‘칼로 안드레이아 폿죠 디 보르고’ 등에 의해서 '부오나파르테 가(家)'의 탄핵 결의가 내려지게 되고
그 후에 '나폴레옹'과 그의 가족들은 거의 추방에 가까운 도피행으로
'마르세유'(Marseille-프랑스 최대의 항구 도시로,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함)로 이주했다.


 

                                                                    <마르세유>



* 칼로 안드레이아 폿죠 디 보르고(Carlo Andrea Pozzo di Borgo)
1764년 3월 8일-1842년 2월 15일

코르시카 섬 출신의 정치가
아작시오에서 보나파르트 가(家)의 먼 친척으로 출생
유년기에는 나폴레옹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 후, 성장해서 ‘피사(Pisa-이탈리아 토스카나 州)’에서 법학을 배운 후, 변호사가 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입법의회의원이 되어서 ‘파오리’의 심복이 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파오리와 대립하자
부오나파르테 家에 탄핵결의를 내려서 그 일가(一家)를 마르세유로 추방시켰다
그 후, 프랑스군이 코르시카 섬을 점령하여 자신마저 그곳에서 추방당하자
그 이후에는 반(反)나폴레옹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다.(상세한 것은 생략)
그에, 나폴레옹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그를 몹시나 무서워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마르세유'로  옮겨갔던 '부오나파르테 家'는
그곳에서 만나게 된 유복한 상가(商家)였던 '크라리(Clary) 가(家)'와의 친교가 깊어져서
나중에 '나폴레옹'의 형 '죠제프'는
그 '크라리 家'의 딸 '쥴리(Marie Jurie Clary)'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 메(마)리 쥴리 크라리(Marie Julie Clary. 1771년 12월 26일-1845년 4월 7일)

   죠제프 보나파르트의 아내
  
마르세유의 유복했던 비단 상인 ‘에티엔느 크라리(Etienne Clary, 1725년-1794년)’와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프랑소와즈 로제 소미스(Francoise Rose Somis, 1737년-1815년)' 사이에서 출생했다
   1794년 8월 1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죠제프와 결혼했고
  
남편이 나폴리 왕(1806년), 스페인 왕(1808년)에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세명의 딸을 두었으나, 한명은 요절했다
  
딸, 쥴리 죠제피누(Julie Josephine Bonaparte, 1796년)
   딸, 제나이드 레티시아 쥴리(Zenaide Laetitia Julie Bonaparte, 1801년-1854년)
   딸, 샤르롯트 나포레오누(Charlotte Napoleone Bonaparte, 1802년-1839년)



그러자 또 이어서 '나폴레옹'도
그 집의 막내딸이었던 '데지레'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서 약혼까지 한다.


 
* 데지레 크라리(1777년 11월 8일-1860년 12월 17일)
全名: 베르나르디누 우제니 데지레 클라리
(Bernardine Eugenie Desiree Clary)
스웨덴 명은 데지데리아(Desideria av Sverige)

베르나돗테 왕조(House of Bernadotte)의 시조인
스웨덴 왕 겸 노르웨이 왕 칼(카를)14세 요한(Karl XIV Johan)의 왕비
오스칼(Oscal)1세의 생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元약혼자
나폴레옹의 '영원의 연인'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즈음,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치신조를 피력했던
小冊子 보케르의 만찬(원제: Souper de Beaucaire)을 저술해서
당시의 프랑스정부(혁명정부)의 중심에 있던 유력자
‘로베스 피에르’ 등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 그러나 그 소책자는 나중에 ‘로베스 피에르’와 ‘자코뱅파'의 독재를 지지하는 책이라고 해서
나폴레옹이 체포당하는 구실이 된다.


 
* 마크시미리안 프랑소와 메리 이지드르 드 로베스피에르
(프:Maximilien Franc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5.6-1794.7.28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목표로 했던 자코뱅파의 리더
숙청에 의한 공포정치로 많은 반대파를 단두대에 보냈기 때문에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라고 불렸다


                       


 
* 쟌-잭 루소(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1778년 7월 2일

프랑스의 철학자, 정치사상가, 교육사상가, 작가
단순한 순리(純理)론에 머무르지 않는
다감(多感)함을 반영한 그의 저작은 넓게 읽혀져서
프랑스혁명이나 그 이후의 사회사상에도 다대한 정신적인 영향을 미쳤다



                       



* 자코뱅파(Jacobins)

프랑스혁명기에 생겼던 정치당파의 하나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서 급진적인 혁명의 추진을 실시했다
재산의 평등과 신분특권의 폐지 등을 요구했고
점차 독재화, 공포정치를 추진했지만,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국민공회에서 왼쪽자리에 앉았던 것으로 해서 '左翼'의 어원이 되었다
또, 공산주의사상의 루트를 찾으면, 바로 이 자코뱅파에 도착한다
그리고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했던 것으로 그 명칭이 유래했다


 <자코뱅파의 변천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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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참고>

프랑스 혁명 때의 과격한 정치 단체로
당통, 마라, 로베스피에르를 우두머리로 해서
급진적인 공화주의를 주장
1791년 이래 온건한 지롱드파와 맞서서 공포정치를 실시
그러나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타도되었다

                       




그리고 1793년, 국민공회의원의 추천을 받아서 '나폴레옹'은
프랑스군 대위로서 '툴롱'(Toulon-프랑스 남동부에 위치. 지중해에 면한 도시)에 부임
즉시 소좌에 임명된다.



<툴롱>


* 國民公會(Convention nationale)
프랑스의 입법기관

프랑스혁명기의 1792년 9월 20일부터 1795년 10월 26일
<革命曆4년 霧月(브뤼메르-Brumaire : 프랑스 혁명력의 제2월을 의미함) 4일>까지 설치되었다
1795년 11월 2일에 시작된 總裁政府가 그 뒤를 이었다
당시, 국민공회의 참가자에게는 자코뱅파의 ‘마크시미리안 드 로베스피에르’와
‘쟌-폴 마라(Jean-Paul Marat : 1743년 5월 24일~1793년 7월 13일 - 프랑스의 혁명지도자. 의사. 혁명 발발 후, 山岳파에 참가해서 공포정치를 추진했다)’ 및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년 10월 26일~1794년 4월 5일 - 프랑스혁명기의 정치가, 변호사. 인간미 넘친 혁명가로서 알려져 있다)’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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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1 生涯

   1.1  成長來歷
   1.2  軍人 나폴레옹
   1.3  젊은 英雄
   1.4  統領 나폴레옹
   1.5  皇帝 나폴레옹
   1.6  絶頂期
   1.7  滅亡으로
   1.8  百日天下 그 後

   2 死因을 둘러싼 論議

   3 나폴레옹의 評價와 影響

   4 나폴레옹의 功績

   5 그 外
   5.1  나폴레옹의 말
   5.2  나폴레옹에 관한 逸話

   6 脚注(이야기 속에 포함)

   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族, 妻, 愛人
   7.2  나폴레옹麾下의 元帥들


 1 生涯                         

 1.1  

 成長來歷

 그는, 1769년 '코르시카 섬'의 '아쟈크시오(아작시오)'에서 아버지 '카를르(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사이에서 태어났던(요절했던 아이를 제외한) 8명의 아이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시의 이름은 ‘나브리오네 부오나파르테(코: Nabulione Buonaparte)’ 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부오나파르테'를 '프랑스 風'의 '보나파르트(Bonaparte)'라고 개칭했던 것은, 그가 '프랑스'에서 출세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부오나파르테 가(家)'는 '이탈리아'의 '론바르디아 주(州)'에 기원을 두었던 아주 오래된 지주(地主) 가문이었고
 '코르시카 섬'에서 판사(判事)를 지냈던 그의 아버지는 1729년부터 시작되었던 '코르시카 독립투쟁'의 지도자였던 '파스칼 파오리'의 부관을 맡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나중에 '프랑스' 측에 전향했으며, 그로 인해서 '프랑스'로부터 '프랑스'의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그 신분으로 '프랑스' 본토에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어서 아들 둘을<나폴레옹과 나폴레옹의 형 쥬제뻬(프랑스 명-죠제프)> 데리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 파스칼 파오리(Pascal Paoli. 伊:파스크레 디 파오리)
1725년 4월 6일-1807년 2월 5일

코르시카 섬 독립전쟁의 지도자. 정치가. 군인
현재에도 코르시카 섬에서는 나폴레옹보다도 더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


                       


           


* 죠제프·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1768년 1월 7일-1844년 7월 2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리 왕으로서는 쥬제뻬 보나파르테(Giuseppe Bonaparte. 재위:1806년-1808년)
스페인 왕으로서는 호세 1세(Jose I. 재위:1808년-1813년)라고 자칭했다


                       

               

 처음에 '나폴레옹'은 '수도원 부속학교(도툉)'에 단기간으로만 들어가 있었지만, 그러나 1779년에 국비(國費)로 귀족의 자제들만 배우던 '브리엔누(브리앤)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고, 이어서 수학(數學)으로 발군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1784년에는 '파리'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학교에서는 기병과 보병 그리고 포병 3 과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가 전문(專門)으로 선택했던 것은 전통도 있었고 또한 인기도 많았던 기병이 아닌 포병 科였다.
 그리고 그때 배운 대포를 사용한 전술은 후에 그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게 된다.


 그의 졸업시험 성적은 58인중 42위. 그러나 통상의 재적(在籍)기간이 4년 전후(前後)였던 것을 감안하면
 불과 11개월 만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수료했다는 것에서 오히려 그것은 매우 우수한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실제로도 그 11개월만으로의 졸업은 그 학교 개교 이래 최단기록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널리 알려진 일화(逸話)대로 바로 그 시기의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었던 급우들끼리와의 '눈싸움'에서 '나폴레옹'은 훌륭한 지휘와 진지구축으로 쾌승을 거두었고, 그것으로써 또 그는 이미 그때부터 훌륭한 지휘관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면(裏面)으로 유년시절의 '나폴레옹'은 매일 독서에만 몰두하던 아이였고, 특히 ‘프르타르코스(플루타크)의 영웅전’에 심취했었다고 하며, 점잖은 성격의 아이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급우들로부터 '코르시카 말'(語-급우들의 입장에서는 방언이거나, 비하 대상의 언어)에 대해서 질문 받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었고, 또 그런 일이 있었을 때는 금방 과묵해졌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프르타르코스(플루타크)<희:Πλοταρχο. 영:Plutarch(Plutarch). 라:Plutarchus>
46년부터 48년경-127년경
제정기 로마의 그리스인 저술가
저작으로 <대비열전(對比列傳-영웅전> 등이 있다

<약력>

‘보이오티아’에 있는 ‘카이로네이아’의 명문 출신이며, 아테네에서 수학과 자연철학을 배웠다
그리스 본토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카이로네이아의 사절’로서 로마에서도 종종 체류했다
그러나
전 생애를 주로 고향에서 보냈고, 시민들과도 친하게 교제했던 한편
로마에서 왔던 손님들도 자주 접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델포이신전의 신관과도 교류를 가져서 신탁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는
사상적으로는 ‘아카데메이아 파’에 속했으나
그 외에 ‘스토어 파’나 ‘페리파트스 파’의 생각들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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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재위-1804년 3월 20~1814년 4월 6일
        1815년 3월 20일~1815년 6월 22일
 대관(戴冠)-1804년 12월 2일
                
프랑스국민황제(정식)
 별호(別號)-이탈리아 왕
                
스위스 서약자동맹의 조정자
                
라인동맹의 보호자
 전명(全名)-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출생-1769년 8월 15일. 프랑스. 코르시카 섬(伊:Corsica). 아쟈크시오(아작시오)
 사망-1821년 5월 5일(만51세). 영국. 세인트헬레나(St Helena-Saint Helena)
 매장-프랑스. 파리. 앵발리드 호텔(1840년 세인트헬레나에서 이전)

 황태자-나폴레옹 2세
 배우자-죠제피누 드 보아루네(조세핀)
            마리아 루이자
 자녀-나폴레옹 2세

 왕조(王朝)-보타파르트 조(朝-프랑스 제 1 왕정)
 부친-카를르(샤를르) 마리 보나파르트
 모친-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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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르시카 섬(이:Corsica)

  지중해 서부,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하는 프랑스령의 섬.
면적은 약 8,680 평방km로, 지중해에서는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 '사이프러스 섬'에 이어서 4 번째로 크고, 인구는 약 28만 명이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출신지                                      

                                                                                         <위치 참고 - 붉은 색 부분>

                                       
                                                            <코르시카 섬 위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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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쟈크시오(아작시오)
 
   프랑스의 코르시카 섬(코르스 지역권) 남부에 있는 도시
   코르스 지역권의 수도     

                                                                                                               <빨간색 사각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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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인트헬레나(Saint Helena)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2800km 해상에 위치. 면적 122K㎡의 남대서양에 떠있는 화산 성(火山性)의 섬. '영국'의 해외영토이며, 행정구역 상으로는 '세인트헬레나' '어센션(Ascension)' '트리스탄 다 쿠나(Tristan da Cunha)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고흐(Gough-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등록) 섬' 등, 대서양 상의 다른 섬들도 포함되어 있다.
'수에즈운하' 건설 때까지 '인도양'으로 통하던 전략적요지로서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주로 급수지로 사용되었다. 절해(絶海)의 고도(孤島)이기 때문에 유형지로서 사용되었고 '나폴레옹 1세'의 유형지로 저명하다. 그런 이유로 현재, 섬의 관광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또 '보아전쟁' 후에도 '보아' 측 수뇌의 유형지로서도 사용되었다. 현재의 인구는 적고, 경제는 생산성이 낮은 단일재배(단일작물생산)경제이며, 주로 '런던'으로부터의 이입물자(移入物資)에 의해서 島民들의 생활은 유지되고 있다. 섬은 작고, 또 현대경제에 있어서의 중요성이 적어서, 도민들로부터 <영국정부가 섬을 경시하고 있다>라는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빨간색 동그라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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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발리드 호텔(프: l'Hotel des Invalides. les Invalides. 廢兵院)

   파리의 역사적인 건조물의 하나. 구(舊) 軍병원. 1671년에 '루이14세'가 부상병 간호시설로서 계획하고 '리버럴 브류안'이 설계 지휘해서, 1674년에 최초의 부상병들을 받았다. 건축사상 유명한 것은 부속하는 예배당의 건축물이며, 교회의 건설은 1677년에 시작. 후에 병사(兵士)의 교회와 돔 교회로 나누어졌고 '쥴 아르두안=만사르(Jules Hardouin-Mansartr-1646년 4월 16일-1708년 5월 11일)'에 의해서 1706년에 완성되었다. 돔 교회의 지하묘소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구(柩-관)가 중앙에 놓여있다. 그리고 또, 그것을 둘러싸는 듯이 해서 '나폴레옹'의 친족이나 '프랑스'의 저명한 장군들의 묘가 놓여있다. 일부는 '군사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앵발리드 호텔 외관>

 

          

                                                                    <나폴레옹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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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 2세(後述)

  나폴레옹 프랑수와 샤를르 조제프 보나파르트(Napoleon Francois Charles Joseph Bonaparte)
  1811년 3월 20일-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이며, 로마 王, 라이히슈탓트 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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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죠제피누 드 보아루네(조세핀)- Josephine de Beauharnais

  1763.6.23-1814.5.29
  프랑스의 황후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첫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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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아 루이자(Maria Luisa-1791년 12월 12일-1847년 12월 17일)

    신성(神聖)로마황제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황후
    후에 '파르마공국'(公國-Ducato di Parma)의 여공(女公-재위:1814년-1847년)이 됨
    非情의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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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츠 2세(Franz II. 1768년 2월 12일-1835년 3월 2일)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황제
    (재위:1792년-1806년)이며, 오스트리아제국 최초의 황제 '프란츠 1세'(재위:1804년-1835년)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신성 로마황제 '레오포르트 2세'
    어머니는 스페인왕 '카를로스 3세'의 딸 '마리아 르드비카'



           
                                                                           <프란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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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를르 마리 보나파르트(불:Charles Marie Bonaparte. 1746년 3월 29일-1785년 2월 24일)

 '코르시카 섬'의 '프랑스' 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버지.
 '코르시카어' 名은 '카를로 마리아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Buonaparte)'
 
그는 1746년 '코르시카 섬'의 '부오나파르테 가(家)'에서 출생했으며, 그 '부오나파르테 가문'은 '론바르디아 주(州)'에 기반을 두었던 오래된 지주(地主)의 가문이었다. 1764년, 14세의 ‘마리아 레티치아 라모리노’와 결혼했고, 이후 8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 섬에서 그는 판사를 지냈고 '코르시카 섬' 독립투쟁 때는 ‘파오리’의 부관을 맡았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에 전향했고, 그 일로 해서 프랑스 귀족 자격을 획득했으며 '나폴레옹'을 본토의 사관학교로 보냈다. 1785년에 사망.
           

          

                                                                  <샤를르 마리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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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Maria Letizia Bonaparte. 1750년 8월 24일-1836년 2월 2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어머니.
    후에 프랑스 황태후
    결혼 전의 성은 라모리노(Ramolino)          

                      
                                                        <마리아 레티찌아 보나파르트>





  * 그 외의 인물들은 차후에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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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


  
<약력>

 
생몰 : 1769년 8월 15일-1821년 5월 5일
  인물 : 혁명기의 프랑스 군인 정치가. 프랑스 제1제정(帝政)황제 나폴레옹1세(재위-1804년~1814, 1815년)
  대강 : 혁명 후의 프랑스를 정리하고 제정(帝政)을 시작
          <나폴레옹 전쟁>으로 불리는 전쟁으로 전 유럽을 침략. 그러나 석권하는 데는 실패
          그 후 유럽의 질서는 '빈' 체제로 들어감

         ※ 당시의 영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는
            <혁명의 혼란 속에서 마지막으로 복권(福券)에 당첨되었던 남자>라고 '나폴레옹'을 평가함
            한편 '괴테'는 <덕(德)을 요구했지만,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권력을 잡기에 이르렀다>라고 평가했다
            지금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웅으로서, 발군(拔群)의 지명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독재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어, 반(反) 나폴레옹 파도 적지 않다고 함





<윌리엄 피트-후술>



                       

 *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1832년 3월 22일
   독일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철학자, 자연과학자, 정치가, 법률가.
   독일을 대표하는 문호이며,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고뇌(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빌헬름 마이스타(大家, 전문가)의 수행(修行) 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 서사시「헤르만과 토로티어(Hermann und Dorothea)」, 시극(詩劇)「파우스트(Faust)」 등 넓은 분야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이하 생략)  

 


 <빈 체제(體制-Vienna system, Vienna Settlement)>

                                   


 빈 회의(1814-1815) 이후 유럽의 국제 질서.
크리미아 전쟁(1853-1856)으로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국제적 체제. 빈 회의에서 프랑스 외상 샤를르-모리스 드 타레이란드-페리고르 백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Perigord)이 주장했던 정통주의(正統主義)를 기본으로, 프랑스혁명 以前 상태를 부활시켜서 대국들의 세력 균등을 도모했다. 그리고 신성(神聖)동맹, 사국(四國)동맹 등의 열강(列强)을 중심으로 해서 자유주의와 국민주의 운동을 억압했다.

 
한편, 그 기본이념에 의한 유럽의 협조에 있어서는, 국가 간의 여러 문제의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봤을 때도 비교적 장기간(견해에 따라서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안정을 유럽에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에 의한 시민생활의 발전이나, 대국(大國)들 간의 이해관계의 복잡화 혹은 1830년 전후의 그리스 독립전쟁과 프랑스 7월 혁명 등의 동요(動搖) 등에 의해서 점차 그 골조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1848년 혁명 이후에는 대국(大國)들의 피지배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내셔널리즘이 급진화(急進化) 되면서 그 체제를 지지하고 있던 동맹국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됨으로 해서 결국에는 크리미아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말았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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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리고르 백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Perigord) 1754년 2월 13일(율리우스력 2월 2일)-1838년 5월 17일

 프랑스혁명기 제1제정기의 정치가, 외교관. 나중에 '나폴레옹'을 배반함.
 빈 회의 이후에도 수상(首相)과 외상(外相)으로 활약했으며, 40년에 걸쳐서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서 군림했다.
 그는 또 <돈벌이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는 동안에는 무엇인가 음모를 기도하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세간에서 혹평되었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요구를 하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써
 민완(敏腕)정치가나 외교가로서의 평가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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