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마루사건(浮島丸事件)

 

 


<浮島丸-特設巡洋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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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鶴 위치도-적색 부분>


<마이즈루 灣-적색 동그라미 부분이 폭침순난현장>

 

 

 2. 계속...

 그런데 또 당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 승선(乘船)했던 승조원(乗組員)들은, 선장(船長)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그 항해(航海)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내용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그러니까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8월 18일경에, 세이칸연락선(靑函連絡船) 대신 임무를 끝내고 하코다테(函館)에서 오오미나토(大湊)로 돌아왔던 우키시마마루(浮島丸)에서는, 당연히 소집해제(召集解除)나 복원(復員) 명령이 내려질 줄 알았지만, 그러나 갑자기 부산(釜山)으로 출항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당시, 그 부산(釜山)까지의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기뢰(機雷)가 부설(敷設)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승조원(乗組員)들은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 또 마땅한 해도(海圖)조차도 없었던 데다, 꼭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에 의해서 배가 침몰하거나, 그들에게 붙잡혀서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그 명령을 거부했다고 한다.

 거기다 또 별 특별한 임무도 아닌, 겨우 조선인(朝鮮人)들을 본국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 그런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에 그들은 분노했다고 하고, 그것은 또 당시, 전쟁이 모두 끝났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명령지휘계통의 기능(機能)도 거의 와해되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질서도 거의 붕괴되어서, 혼란(混亂)과 반란(反亂)까지도 일어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 동요(動搖)는 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당시, 그런 혼란 속에서 탈주(脫走)를 했던 승조원(乗組員)까지 생겼을 정도였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진압을 위해서 그 배에는 헌병(憲兵)까지 올라가서 통제를 했다고 했고, 그리하여 8월 21일에는 총원(總員) 집합명령이 내려졌던 가운데, 그 석상(席上)에서 오오미나토경비부(大湊警備府)의 한 참모(參謀)가 나타나서 강력하게 부산으로 출항할 것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그 명령에 대해서 불신(不信)의 태도를 보였다고 했는데, 그러자 그 참모(參謀)는 도검(刀劍)을 빼서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겠다고 협박을 했고, 그러자 승조원(乗組員)들은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우키시마마루(浮島丸)는 그 다음날 밤 10시경에, 오오미타토항(大湊港)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출발은 했다지만, 그러나 또 그들은 곧바로 부산(釜山)으로 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해안이 눈에 보이는 위치에서 남하(南下)를 계속했다는데, 그래서 또 그 배의 기관장(機關長-野澤忠雄 元少佐)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함장과 항해장 그리고 고참 사관(士官) 2, 3명과 하사관대표 몇 명과 협의를 해서, 부산(釜山)으로 가지 않고, 일본의 적당한 항구에 입항하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지는 함장 등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하며, 그러나 또 그 대충은, 우라니혼(裏日本-보통, 우리의 東海 측 해안을 말함)의 어느 항구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操舵長 齊藤恒次 等)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그들의 목적지는 거의 마이즈루(舞鶴)로 알고 있었다고 했고, 그것은 또, 함교(艦橋)에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조선인(朝鮮人)들을 조선(朝鮮)으로 보내는 책임을 맡았던 인솔책임자(日通勞務係 高橋嘉一郞)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증언을 했고(NHK의 爆沈에서), 그래서 그 외에도 일부의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당시의 항해사(航海士-田寺伸彦)는 다른 증언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또 그는, 그때 자신들은 진해(鎭海) 만(灣)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으며, 그러나 또 24일 이후부터 대형함선의 항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마이즈루(舞鶴)에 입항했을 때,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때, 전쟁이 이미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배 안에서는 평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하사관들을 수병(水兵)들이 보복(報復) 폭행했던 일이 발생했을 정도로 규율이 문란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때, 통조림통으로 머리에 부상을 당했던 어떤 하사관은, 배가 폭침되었을 그때 자리에 누웠던 채로 사망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전사(戰死)로 처리되었던 일도 있었다고 하고, 또 어떤 하사관 한두 명은 그런 것을 두려워해서 아예 바다로 몸을 던져서 행방불명되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 역시도 전사(戰死)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배에 함께 승선해있었던 조선인(朝鮮人) 이영출(李英出) 씨는,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출항(出航)했던 후에, 일본군 병사들이 술을 가지고 나와서 마시며 소동을 피웠다고 증언을 했고, 그리고 또 어떤 병사들은 술에 취해서 모포(毛布) 등을 바다로 던졌던 등,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몹시 두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음은 당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항해장(航海長 倭島定雄)의 증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때, 군함기(軍艦旗)를 내걸고, 천천히 입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두 척의 해방함(海防艦)이 조용하게 입항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항로(航路)를 따라서 천천히 들어갔던 것이었지요. 그리고 잠시 후, 마이즈루(舞鶴)에서 "소해(掃海) 완료"란 신호를 받고 입항을 개시했는데, 그런데 저는 그 마이즈루(舞鶴)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앞의 그 두 척의 배를 따라서 충실하게 항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났고, 그러자 저는 그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올라서는 그 옆으로 나가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급히 다시 일어나서 살펴보니, 배는 그대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괜찮은가 싶었는데, 하지만 결국 반으로 잘라진 채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배에 화재(火災)도 발생하지 않았고, 수주(水柱-폭발 등으로 인해서 기둥처럼 공중으로 솟구치는 물줄기)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방비대(防備隊)가 달려와서 저는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당시, 해로(海路)를 계산하고 있었던 항해사(航海士 田寺伸彦)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마이즈루(舞鶴)에 입항(入港)했을 때, 저는 함교(艦橋)에서 함장(艦長)과 조타수(操舵手) 등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해방함(海防艦)은 약 300미터 정도 앞에서 전진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그 항로를 따라서 입항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쾅"하던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그 순간에 우리는 마치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모습으로 붕 떠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지요. 그러자 함장(艦長)이 큰 소리로 "항해사(航海士), 위치(位置)는?!"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저는 얼른 일어나서 해도(海圖)와 컴퍼스로 충실하게 그 위치를 산출해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마이즈루(舞鶴) 만내(灣內)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일상의 습관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함장(艦長) 역시도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아마도 그렇게 저에게 위치를 물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 그때, 갑판(甲板)에서는 많은 수병(水兵)들이 입항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래서 또 그 중에서 2등병조(二等兵曹)였던 하세가와(長谷川)란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배가 폭발했을 때, 우리는 갑판에서 입항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자 우리는 공중으로 붕 뜬 채로 날아가서 갑판에 나뒹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잠시 무아지경상태로 있었는데, 그러자 그때, 함(艦) 내(內)에서도 혼란이 발생했고, 그러자 또 커터(cutter-군함에 싣는 대형보트)를 내리는 사람, 갑판 위를 뛰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면, 조선인(朝鮮人)들은 필사적으로 갑판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아이고, 아이고"하는 소리와 함께, 여성들의 절규와 아이들의 비명소리 등, 그 혼란은 완전히 극(極)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배에서 내려졌던 커터(cutter)의 줄이 끊어져서, 그 커터(cutter)가 바다 속으로 추락하던 사고도 목격되었는데, 그래서 그때, 그곳은 완전히 지옥(地獄) 그 자체였습니다...>

 

 

 

 

 

 

 

 


<舞鶴灣>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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