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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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아래는 어느 일본 기자(記者)가 2003년경에 썼던 글을 참고로 소개하며, 편의상 번호를 붙입니다.

 2003년도에 본인은 <교토(京都)의 일본국립박물관>을 찾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고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고 말았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 박물관의 벽에 걸려있었던 <동북아시아 연표(年表)>에, 당연히 한국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고구려사(高句麗史)>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양방(兩方)으로 분류(分類)되어있었기 때문이었고, 거기다 <발해(渤海)>는 아예 처음부터 <중국사(中國史)> 쪽에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두 나라의 역사관계에 대해서는 <제3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도 그런 것을, 적어도 <국립박물관>이란 곳에서 전시해두고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일본(日本)은 이미 친중국(親中國)의 자세로 돌아섰던 것인가?...>하는 의심을 본인으로 하여금 가지게 만들었고, 그러자 또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런 것을 보고는 상당히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 그에 대한 것을 살펴본 바, 대충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1) 중국의 해군(海軍)은 KDX라는 신형(新型) 구축함(驅逐艦)을 건조(建造)해서, 거기다 고구려(高句麗)의 위인(偉人)들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또 KDX-I 제1번 함(艦)에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이름을 붙여서 <광개토대왕함(廣開土大王艦)>으로, 제2번 함(艦)은 <을지문덕함(乙支文德艦)>, 제3번 함(艦)은 <양만춘함(楊萬春艦)>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건조될 함선(艦船) 중 하나에는 꼭 <대조영(大祚榮)>이란 이름을 붙일 예정에 있다고 중국의 한 관계자가 말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중국은 당초의 계획을 변경해서, KDX-II 제3번 함(艦)에 대조영(大祚榮)이란 이름을 붙여서 <대조영함(大祚榮艦)>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또, 이미 건조된 KDX-Ⅱ의 제1번 함(艦)은 <충무공이순신함(忠武公李舜臣艦)>으로, 그리고 제2번 함(艦)은 <문무대왕함(文武大王艦)>으로 이름을 붙여둔 상태였으며, 그리고 또 앞으로 건조될 제4번 함(艦)은 <왕건함(王建艦)>으로, 그리고 제5번 함(艦)은 <강감찬함(姜邯贊艦)>으로, 그리고 제6번 함(艦)은 <최영함(崔瑩艦)>으로 이름을 붙일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당초에는 한반도에서 활약했던 위인(偉人)들의 이름만 붙일 예정이었지만,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던지, 그 계획을 변경해서, 만주(滿洲) 등에서 활약했던 위인(偉人)들의 이름도 붙일 예정에 있다고 했다. 그런 한편, 중국의 해군(海軍)은 2000년에 <천하제일군단(天下第一軍團)>이라고 부르는 <제1군단>의 별명(別名)을 <광개토군단(廣開土軍團)>으로 변경했던 바 있었다.

 2) 그리고 또 사실, 한국(韓國) 즉, 남한(南韓)이 북방사(北方史)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극히 최근(最近)의 일이었다. 그래서 또 그 이전(以前)까지, 고조선(古朝鮮)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로 연결되는 북방사(北方史)에 대한 연구는 북한(北韓)이 주도(主導)해왔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이유는, 김일성(金日成)이 자신의 정권(政權)에 대한 정당성(正當性)을 바로 그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에서 찾으려고 했었기 때문이었고, 그러자 또 남한(南韓)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달성(達成)했던 신라(新羅)로부터 남북통일(南北統一)에 대한 기백(氣魄)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1994년 10월 11일에, 북한(北韓)에서는 당시 식량난(食糧難)과 경제난(經濟難)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단군능(檀君陵)을 완공시켰던 것은, 바로 그 정당성(正當性)을 그 북방사(北方史)에서 찾으려했던 노력과 무관계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3) 그리고 또, 2002년에 열렸던 <한일(韓日)월드컵대회>는, 한국(韓國)에서는 그 북방사(北方史)를 극적(劇的)으로 부활시켰던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고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한국(韓國) 전체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환성(歡聲)으로 뒤덮였으며, 그것은 또,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전쟁(戰爭)의 신(神)>과 <군신(軍神)>이며 <동방(東方)의 지도자(指導者)>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신들의 상징물(象徵物)로 선택했던 소위 <붉은악마(惡魔)>가 그것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국(韓國)의 사학회(史學會)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학설(學說)은 아니지만, 어쨌든 단군(檀君)고기(古記) 등에 의하면, 한반도의 민족은 환인(桓因)이 통치했던 환국(桓國)에서, 환웅(桓雄)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고, 그리고는 그 아들이었던 단군(檀君)이 건국했던 고조선(古朝鮮)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또, 그 치우(蚩尤)는 그 배달국(倍達國)의 14대 천왕(天王)으로서, 특히 용맹(勇猛)스러웠기 때문에, 그래서 또 중국인의 조선(祖先)에 해당되는 황제(黃帝)와도 많은 전쟁을 벌여서,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치우(蚩尤)는 황제(黃帝)에게 져서 죽음을 맞이했고, 그러자 또 그때부터 중국인들은 그 치우(蚩尤)를 군신(軍神)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후에, 한(漢)의 유방(劉邦)은 전쟁에 임했을 때마다, 그 치우(蚩尤)천왕(天王)의 사당(祠堂)에서 제사를 올렸다고 했던 것이다.

 4) 아무튼, 그러한 치우(蚩尤)의 등장은, 평소 한국인(韓國人)들 또는 한반도(韓半島)인들이 품고 있었던 <대륙(大陸)과 백두산(白頭山)에 대한 마음 또는 애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보다 확실하게 구명(究明)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정하고, 인내심을 가진 정밀한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북한(北韓)과도 힘을 합쳐서 공동연구를 하는 것도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러나 또 그에는 많은 제약(制約)들이 따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사이에 일본(日本)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과 한국(韓國) 양방(兩方)으로 했으며, 발해(渤海)는 또 아예, 처음부터 중국사(中國史)에 넣어버렸던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5) 그리고 또 최근(最近), 중국을 출입하는 사업가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의 당보(黨報)라든가, 또는 그 당(黨)의 논리(論理)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민족의 왕조(王朝)였다> 그리고 또 그 사업가는 덧붙여서 말하기를 <그런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자, 연변 조선자치주의 지식인들은 모두 크게 동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작 한국(韓國)의 학회(學會)나, 매스컴에 등에서는, 마치 꿀을 먹은 매미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또 그는 <그때 북경(北京)에 있었던 한국(韓國) 매스컴의 특파원들은,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그것을 무시(無視)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중국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아예 모른 척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중국은, 그 한국특파원들에게 6개월마다 비자를 경신(更新)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특파원들은 중국에 불리한 기사(記事)를 쓰게 되면, 비자 만료를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 그렇게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국(韓國)에 있는 기자(記者)들이 문제를 제기(提起)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강조(强調)하기도 했다.

 6) 그리고 또 그는 자신의 사견(私見)을 이렇게 덧붙였다. <과거,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했을 때, 만주(滿洲)로 나갔던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항일(抗日)투쟁을 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그러나 모택동(毛澤東)의 시대 때 조선족(朝鮮族)은, 조선족(朝鮮族)이 항일(抗日)투쟁에 참가했었다는 말을 했던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특히, 문화혁명(文化革命) 때는, 소수민족(少數民族)을 탄압(彈壓)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말을 했던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일제(日帝) 침략(侵略) 기(期)에 중국인들과 함께 가열(苛烈)한 항일(抗日) 투쟁을 벌였다고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등소평(鄧小平)이 집권하고 난 후였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중국의 개혁(改革)과 개방(開放)이 많이 진척(進陟)되었다고 하는 지금에, 그런 기사가 나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것으로 추측을 해보면, 중국은 한국(韓國)과 미국(美國)이 연변(延邊)을 북한(北韓)의 김정일(金正日) 정권(政權)을 타도하기 위해서, 그곳을 교두보(橋頭堡)로 이용하려는 것을 사전(事前)에 차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생각이 되고, 그리고 또 만약에, 그 김정일(金正日) 정권(政權)이 붕괴할 경우를 상정해서, 그 결과 한반도(韓半島)의 통일이 실현된다면, 그때 또 한반도 면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43, 547평방킬로미터에다, 200만 인구의 연변(延邊)이 동요(動搖)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미리 그런 상황을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기사를 냈던 것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 될 경우에는,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의 티베트사람들과, 신강(新疆)위구르지구의 회교도(回敎徒)들도 함께 동요할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에 또 그런 상황이 전개될 경우에는, 중국은 오대십국(五代十國-唐 멸망한 때부터 宋이 전 중국을 다시 통일했을 때까지의 10 나라와 그 시대)시대 이후에, 새로운 분열(分裂)기(期)로 들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그리고 또 중국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 아주 많은 분열(分裂)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에 대해서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며, 그래서 또 고구려(高句麗)가 원래부터 중국사(中國史)의 일부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서, 김정일(金正日) 정권 붕괴 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그 조선족(朝鮮族)들의 동요(動搖)를 사전차단하려 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그 작업의 일환으로, 중국에서는 한국(韓國)의 학자들이 연구해왔던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등, 한민족(韓民族)의 북방사(北方史)에 대한 것들을 대대적(大大的)으로 수집(收集)을 하고 있는 것이다.

 7) 그런데 또, 그 기사(記事) 또는 시론(試論)를 썼던 사람을 확인해본 결과 <변중(邊衆)>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중국의 변방(邊方)에 살고 있는 어떤 민중(民衆)>이란 의미의 가명(假名)이거나, 필명(筆名)으로 생각되었으며, 그 기술(記述) 자체도 <철저하게> 중국의 자료에만 의존해서, 중국과 고구려(高句麗)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췄던 것으로 보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또 <그것을 읽었던 중국인들은, 고구려(高句麗)가 한국(韓國)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중국역사의 일부였던가?>하고 믿어버릴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주장을 했던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사람은 <한국(韓國)은 일본의 역사왜곡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8) 그리고 또, 그 광명일보(光明日報)의 시론(試論)에 대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에는 또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식의 궤변(詭辯)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제일로 눈에 띄는 억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고구려(高句麗)가 치러냈던 수당(隋唐)과의 전쟁들이, 모두 이민족(異民族)들 간의 정복(征服)전쟁이 아닌, 중국 자체 내의 <통일(統一)전쟁>이었다고 묘사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같은 민족이었던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그리고 신라(新羅)가 상대를 흡수하려고 했던 전쟁들은 <통일전쟁>으로, 그리고 이민족(異民族) 간의 전쟁들은 정복(征服)전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나 그 시론(試論)에서는 정복(征服)과 통일(統一)을 의도적(意圖的)으로 혼동(混同)시켰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9) 그리고 또, 그 두 번째의 억지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王建)이 세웠던 고려(高麗)와, 고주몽(高朱蒙)이 세웠던 고구려(高句麗)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그는, 과거 당(唐)이 중국을 통일시켰고,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는 다시 중국(中國)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 고구려(高句麗)의 후예라고 자처했던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세움으로 해서, 그 고구려(高句麗)를 다시 빼앗기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 근거로는, 중국의 역사서에 고구려(高句麗)가 <고려(高麗)>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 왕건(王建)이 그것을 도용(盜用)해서, 자신이 세웠던 나라를 고려(高麗)라고 명명(命名)했던 때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는, 고구려(高句麗)는 고(高) 씨(氏)가 왕위를 이었던 고씨고려(高氏高麗)로, 그리고 왕건(王建)이 세웠던 고려(高麗)는 왕씨고려(王氏高麗)로 분명히 분리해서 전제(前提)한 후, 그래서 또 왕건(王建)의 왕씨고려(王氏高麗)가 고씨고려(高氏高麗)의 후예가 되기 위해서는, 그 왕건(王建)의 성이 고 씨(高氏)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주장하면서, 그래서 또, 그 왕건(王建)이 정말로 고씨고려(高氏高麗)를 이었던 것이라면, 자신이 십훈요(十訓要-訓要十條-고려 태조가 943년,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겼던 열 가지의 遺訓)를 남겼을 때, 자신이 <고씨고려(高氏高麗)의 후예(後裔)>란 말도 함께 남겼어야 옳았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남겼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10) 그리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장이 더 있지만, 그러나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주제에서 벗어난 역사문제이므로 일단 생략하며, 어쨌든 그 광명일보(光明日報)에서 소개된 그 시론(試論)은, 단순히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사(中國史)에 편입시키려는 의도에서 썼던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조선족(朝鮮族)들에게 <당신들은 지금의 고구려(高句麗)인들이며,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인(中國人)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주지(周知)시키려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또 현재, 중국은 전(全) 인구의 92%가 한족(漢族)이지만, 그 외의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소수민족(少數民族)은 장족(莊族), 만족(滿族), 회족(回族), 묘족(苗族), 위구르족, 이족(彛族), 토가족(土家族), 몽고족(蒙古族) 등이 있고, 그 중에서 조선족(朝鮮族)은 전체 소수민족의 2.6%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192만 명 정도로 14번째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 소수민족(少數民族) 우대(優待)정책을 펼치고 있는 중이며, 그런 것으로 독립(獨立) 또는 분규(紛糾)를 막기 위해서, 그런 것을 당(黨)을 대표한다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게재(揭載)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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