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백두산 천지-중국 측에서 바라본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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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국의 동북(東北)부(部-舊 滿洲)의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적(國家的)인 프로젝트(project)>라고 정의할 수 있고, 그것은 또 1997년에 시작되어서, 2000년 이후에 그 연구 성과가 중국과, 국외(國外)의 미디어(media)들에도 공표되었던 바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 중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百濟와 新羅도 포함하는 일도 있음)를 중국사(中國史)의 지방(地方)정권(政權)으로 취급했던 것에 대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들로부터 격심한 반발과 항의를 받았던 바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것은 한중(韓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민간(民間) 차원의 학술토론으로 해결하기로 함에 따라서, 정치문제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던 것이었다.(2006年10月13日-高句麗史 問題에 대해서 韓中이 思慮 깊은 措置에 合意)


 2.(편의상 번호로 구분함)

 그리고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장하현(庄河縣) 소재(所在), 고구려(高句麗)의 성산산성(城山山城) 입구에 있던 비석(碑石)에서 <고구려(高句麗)는 중화민국이 세웠던 나라>라는 비문(碑文)이 발견되었다고 하고, 그 비석에는 또 <고구려(高句麗) 민족(民族)은, 중국 고대의 화하민족(華夏民族-中華民族의 다른 표현)을 구성했던 대가족(大家族)의 일원(一員)이었다(高句麗民族是中國古代華夏民族大家庭中的一圓)> 그리고 또 <고구려(高句麗) 정권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 건설했던 지방정권(高句麗政權是中國東北少數民族地方政權)>이라는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진위(眞僞)는 알기 어렵다.

 그리고 또,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文化部)가 발행했던 <중외문화교류(中外文化交流)> 2004년 9월호와,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敎育部) 직속(直屬) 교과서전문출판사의 홈페이지에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이란 내용이 게재(揭載)되었으며, 문화부(文化部)가 주관(主管), 발행했던 월간지(月刊誌) <중외문화교류(中外文化交流)>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 동북(東北)지방에서 생활했던 고대(古代)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내용을 글을 게재(揭載)했다. 그리고 또, 중화인민공화국 교육부 직속의 교과서전문출판사인 <인민교육출판사> 홈페이지의 <역사(歷史)지식(知識)> 코너에서는 <고구려(高句麗)를 중국사(中國史)>라고 게재(揭載)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外交部)는 홈페이지에 있는 <한국개황(韓國槪況)>의 고대사(古代史)에 관한 기술에서 고구려(高句麗)를 삭제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한국정부는 그 복원(復元)을 요청했지만 거절했고, 심지어는 1948년의 한국정부수립 이전(以前)의 역사기술을 전부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또,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의 세로로 된 안내간판의 설명문에는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에 존재했던 북동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의 하나>라고 쓰여 있으며, 그 박물관의 현관(玄關)에 있는 돌에는 <고구려(高句麗)는 북동아시아지방 고대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중국북동지방의 소수민족정권의 하나>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또 그곳의 안내원은, 고구려(高句麗)의 유물(遺物)을 설명할 때, 중국문화에의 예속성(隸屬性)을 강조해서 <이 연꽃(蓮花) 모양의 와당(瓦當-기와의 마구리)은 불교문화의 흔적으로, 고구려(高句麗)가 당시, 중원(中原)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입니다>라고 말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또 <당시 중원(中原)에서 사용되었던 경화(硬貨-금속으로 만든 화폐)가 여기에서 발굴되고 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高句麗)가 중국의 일부였다는 증거입니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또 다른 안내원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고구려(高句麗)에게 그 명부(名簿)를 주관(主管)시켰다>라고 했던 문장(文章)을 다른 뜻으로 바꿔서 <고구려(高句麗)가 당시에 한(漢)나라를 주인(主人)으로 모셨다>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유적지(遺蹟地)들과, 백두산(白頭山)에 배포(配布)되어 있는 팸플릿(pamphlet) 등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이름은 아예 없고 <이곳은 만주족(滿洲族) 발상(發祥)의 땅으로, 중국의 성지(聖地)>라고만 쓰여 있는가 하면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소수민족국가였기 때문에, 그래서 한 번도 한반도(韓半島)민족의 역사라는 설명(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하는가 하면, 중국 내의 고구려(高句麗) 유적지들에도 <고구려(高句麗) 사람들은 결코 한반도 인이 아니었다>라든가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고대국가였던 은(殷)에 기원(起源)을 둔 한민족(漢民族)이 건설했던 국가>였다는 내용이 쓰인 안내판까지 세워져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의 교과서 중 <세계고대사(世界古代史)>에서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부여(夫餘)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고 하면서, 한국사(韓國史)의 시작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부터라는 주지(主旨)로 기술(記述)되어 있고, 그 주석(注釋)에는 <고구려(高句麗)는 당시, 중국동북부에 존재했던 소수민족정권이었다>라고 명기(明記)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역사수당요송금권(中國歷史隋唐遼宋金卷)>에서는 <고구려(高句麗)는 한대(漢代) 이후, 중국의 영역이라고 간주(看做)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100여 개의 대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국고대사(中國古代史)>에서도,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그리고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은, 중국의 한 대(漢代)에 동북지구에 살았던 소수민족이었으며, 고구려(高句麗)의 선조(先祖)는 중국의 오랜 민족이었던 고이(高夷)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고이(高夷)는, 과거 중국의 황제(黃帝) 시대 때, 그 황제(黃帝)의 신하였던 고원(高元)이란 사람이 집의 건축을 고안(考案)했다고 했고, 고신 씨(高辛氏) 제곡(帝嚳)과, 고양 씨(高陽氏) 전욱(顓頊)의 후예(後裔)들도 그 고(高)씨(氏) 성(姓)을 이었다고 했지만, 그러나 너무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리고 또 현재, 중국의 학회(學會)에서는, 그 고이(高夷)를 고구려(高句麗)의 조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머지는 생략함.

 그리고 또, 프랑스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중국대사관 홈페이지에도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의 변경(邊境)소수민족이 수립(樹立)했던 정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하고, 그 중에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대사관은 <고구려(高句麗)는 중국의 역대왕조들과 종속(從屬)관계를 유지(維持)하면서, 중원(中原)왕조의 제약(制約)과 관할(管轄)을 받았던 지방정권>이었다라고 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의 국영(國營) 중앙(中央)티브이(CCTV)도, 그 홈페이지에서 <중국의 고구려 왕성(中國高句麗王城)>이란 제목의 기사(記事)를 게재(揭載)했으며, 그리하여 고구려(高句麗) 최초의 도성(都城)이었던 졸본성(卒本城)을 <중국의 고구려 왕성(中國高句麗王城)>이라고 소개했고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의 변경소수민족에 의한 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중국문화네트워크와 중국문물네트워크 등, 중국정부소속기관들도 그 홈페이지에서 <고구려(高句麗)는 중국고대의 변경소수민족에 의한 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 단동시위원회(丹東市委員會)의 홈페이지 단동정협망(丹東政協網)에는 <압록강(鴨綠江) 유역(流域)의 산수(山水)는 한족(漢族) 이외의 많은 소수민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國) 등의, 소수민족들이 지방정권을 수립(樹立)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중원(中原)의 역대왕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었다>라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또 현재, 중국인들은 그런 날조(捏造)되고, 왜곡(歪曲)된 교육으로 인해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를 당연하게 자국(自國)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기정사실화(旣定事實化)하는 정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거기다 또, 유튜브(YouTube)에서는, 한국인이 <만주족의 고구려(高句麗) 역사를 도작(盜作)하고 있다>라고 하는 동영상(動映像)이 돌아다녀서 한국인들이 반발했던 바 있었는데, 그 문제의 동영상(動映像)에서는 <현대의 한국인은 고구려(高句麗)와 혈연적(血緣的)인 관계가 약하고, 실제로 고구려(高句麗)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만주족(滿洲族)>이라는 내용과 함께 <역사(歷史)를 도둑질하는 짓은 그만 둬라>라고 하면서 <한국인들은 고구려(高句麗)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만주(滿洲)를 지배했었다 라고 하면서, 역사(歷史)의 도난(盜難)을 하려하고 있다>라는 내용을 담았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대의 고구려(高句麗)인들과 현대의 한국인들은 전혀 다른 민족이며, 고구려(高句麗)는 고(古) 부여(夫餘)인으로, 동호(東胡)의 일부였다>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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