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폴레옹의 關係者들

  7-1.  나폴레옹의 一族, 妻, 愛人 <단, 나폴레옹 생존 시를 기준으로 함>




 <妹>

 포리누(파울린) 보나파르트(Pauline Bonaparte, 1780년 10월 20일-1825년 6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2번째 여동생. 코르시카 명은 파올레타.
 
나폴레옹에게서 가장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나폴레옹은 그녀를 <포 렛>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나폴레옹의 여동생들은 전부 미인이었다고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단, 성격은 고집스럽고 제멋대로였다고 한다.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작은 얼굴에다 흑발이었고, 잔디 색 눈동자를 가졌던 미녀였다고 한다.

 


 <내력>

 그녀는 15세 때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부관이었으며, 騎兵士官이었던 쥬노 장군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가 군대급여 외에는 수입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그녀는 또 그 1년 후에 과격한 혁명가로 이름났던 플레이보이 루이=마리 스타니스라 후레론과 사랑에 빠졌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과 그의 어머니가 반대를 했고, 이어서 나폴레옹은 그녀를 지키거나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세루보로니 궁전에다 그녀의 방을 마련해주었다. 그러자 그 때문이었던지 그녀의 사랑 놀음은 곧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궁전에서 마치 아이 같은 장난을 한다거나, 감시요원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살았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또 아주 미남이었으며 금발이었던 샤를 비크토르 에마뉴엘 르크레일 장군과 사랑에 빠져서 결국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1801년 10월에 르크레일은 산 드망(현재의 아이티)에 전임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그녀의 간병도 보람 없이 黃熱病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프랑스로 귀국했고, 줄곧 슬픔에 잠겨있었지만, 그러나 喪服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남편 喪이 끝나자마자 화려한 사교계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그녀를 다시 당시 28세였으며,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던 명문귀족이었던 카밋로 보르게이제 후작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제1의 재산가에다 미남이었지만, 거의 文盲이었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그와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해서 별거했고, 다시 파리로 진출해서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1805년 그녀는 살롱을 열었고, 그곳에서 알게 된 와그람 공작의 부관이었던 줄 드 캐논 빌과 사랑에 또 빠졌다. 그리고 
그녀는 나폴레옹이 아렉산드르1세로부터 받았던 러시아산 흑초(검은담비)모피를 그 남자에게 줘버렸고, 그러자 그에 불쾌함을 느꼈던 나폴레옹은 그 둘을 헤어지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속명령을 받았고, 프랑스와 러시아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서 자살하겠다느니, 수도원으로 들어가겠다느니 하면서 나폴레옹을 협박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나폴레옹의 설득에 넘어갔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그 다음은 또 포병사관이었던 오규()스트 듀샤르 그리고 나폴레옹의 친구였던 명배우 타르마와의 염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또 화가였던 니코라 필립 오규스트 드 포르반과도 사랑에 빠졌다. (그는 명문출신에다 세련된 미남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는 또 그녀의 어머니가 반대했고, 그리고는 어렵게 설교한 뒤에 헤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크게 상심하여 불과 數週 만에 자신에게 짖는 개들은 모두 사살해버렸다고 한다.

 그 다음은 또 음악(노래)교사였던 페리 체 브랑지니, 미남 작곡가 죠반니 파치니 등과 교제했다.
 그러나 그렇게 변덕스러웠던 그녀도 나폴레옹은 잘 따라서 1814년에 그가 엘바 섬으로 가기 위해 도착했던 후레쥬스 항구까지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자 또 그에 감격했던 나폴레옹이 그녀를 꼭 껴안으려고 하자 그녀는 또 그가 입고 있었던 군복이 싫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 나폴레옹이 입고 있었던 군복은 폭도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 위장했던 오스트리아의 군복이었다)

 그 후, 그녀는 또 엘바 섬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곳 생활이 힘들어지자 자신의 보석들을 모두 팔려고 내놓기도 했다.
 그녀는 또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이 중병을 앓고 있었을 때 극진히 간호도 했다.
 그러나 그녀도 1825년에는 불치의 암에 걸렸고, 이어서 사망했다.
 그녀에게는 전 남편이었던 르크레일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한명 있었을 뿐이었다.




 <妹>

 
카로리누(카롤린) 보나파르트(Caroline Bonaparte, 1782년 3월 25일-1839년 5월 18일)
 나폴레옹의 3번째 여동생.
 죠아살 뮤라 원수의 아내.
 2남 2녀를 낳았다.
 
권세욕구의 강했던 야심가.



 <생애>

 
1. 성장배경

 
1782년 코르시카 섬 아작시오에서 보나파르트家(당시는 브오나파르테家)의 7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프랑스로 가족들이 이주를 한 후, 1796년 色男의 군인 뮤라를 만나서 첫눈에 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싫어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으로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후였던 1800년 1월 18일에(18세) 32세의 뮤라와 결혼했다.

 2. 결혼 후

 신혼 후(1800년) 뮤라는 곧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했고, 공적을 쌓아서 궁전으로 불려졌다.
 하지만 그는 쉴 틈도 없이 다시 각지로 전전해야 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여왕처럼 살았다.
 파리로 다시 돌아온(1804년) 뮤라는 제국원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富者가 된 두 사람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또 나폴레옹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차례로 애인들을 소개했고
 그 밀회를 위해서 자신의 별장까지 제공했다.

 그 후 그녀는 엘리제 궁전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그러나 이때부터 부부는 싸움이 많아졌다) 그리고
 1805년 아우스트리트 싸움의 전공으로 뮤라는 독일의 엘베 강 유역에 있던 작은 나라의 대공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 나라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함께 가지 않았다.

 1810년에는 나폴레옹의 새 황후 메리 루이즈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 1807년에 쥬노 장군과 이상한 일을 벌였는데, 그것은 나폴레옹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자신의 남편을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한 포석으로써였다. 그러나 그 일은 소문으로 인해서 곧 발각되었고, 그 결과 쥬노 장군은 좌천되었으며, 뮤라는 격노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선택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대사 멧테르니히였다.
 그는 다른 프랑스의 정부고관들과 함께 그녀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했었지만, 그러나 그 일도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녀를 멀리하기 위해서 나폴리왕국의 여왕으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기뻐하며 그곳으로 부임해갔지만, 그러나 그녀는 또 그곳에서 단독으로 부임을 해버려서, 이미 1809년 1월에 그곳 국왕에 즉위하고 있었던 남편과 대립하게 되었다.

 3. 몰락

 그녀는 뮤라가 1812년 러시아원정에 참가하자 혼자서 攝政을 실시했다. 그러나 통치도 잘하지 못했던 데다가 바람기가 도져서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그녀는 또 나폴레옹이 원정에서 실패하고 패주를 계속하던 중,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손잡으려 했지만, 그러나 프랑스 항복 후의 빈 회의는 그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또 어쩔 수 없이 엘바 섬을 탈출해왔던 나폴레옹에게 다시 협력하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또 나폴레옹이 패배했다는 통지를 받자 뮤라와 헤어지고 혼자서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나폴리왕비 직위를 포기하면 지위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 후, 그녀는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장기적으로 머물렀으나
 그러나 그때 또 마침 콜레라가 유행했기 때문에 피렌체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카로리누의 夫> 




 뮤라(Joachim Murat-Jordy, 1767년 3월 25일-1815년 10월 13일)
 
프랑스의 군인, 원수.
 후에 나폴레옹의 의동생이 되어서 황족으로서 우대되어 나폴리왕위에 올랐다.
 (Gioacchino1세, 재위:1808년-1815년).

 <생애>

 
1. 관직에 오름(仕官)

 그는 처음에 숙박업(여관)을 운영하던 탈레랑家의 부동산관리인이기도 했었던 피에르 뮤라의 막내(12형제 중)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의 희망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했지만(그때 나중까지 친구로 지내게 되는 베시르를 만났다), 적성에 맞지가 않았고, 1787년에는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퇴학당했다.

 그 후, 그는 무일푼으로 방랑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騎兵中隊에 매료되어서 즉흥적으로 입대했다.
 그로부터 군력이 시작되었던 그는 2년 만에 중사까지 진급했지만, 그 후 일시 귀향해서 방물가게를 열기도 했다.

 
그는 풍채가 아주 좋고 인기도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서 꽤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군에 다시 복귀했고, 그로부터 흥망을 반복하면서 젊은 기병지휘관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갔다. 그는 1792년에는 소위가 되었고, 그것은 또 당시의 선출방식이었던 호선제도에 힘 입었던 바 컸다. (그만큼 동료들에게서 인기가 있었다)

 2. 대두(擡頭)

 그는 1795년 방데미엘의 반란 중 파리 시내에서 대포탈취임무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던 나폴레옹(당시, 폴 바라스의 부관)과 만났다. 그리고는 임무를 훌륭히 성공시키고 왕당파 반란진압에 공헌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 공적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고, 그로인해 뮤라도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 후, 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원정에 자원했고, 이집트원정에서는 부상을 입고도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어서 나폴레옹의 측근으로 또 우수한 기병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확립시켰다.
 그는 또 1800년에 나폴레옹의 여동생 카로리누와 결혼했고, 그로써 나폴레옹가의 일원도 되었다. 그리고 1804년에는 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수많은 싸움에서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나폴레옹으로부터 <세계 최고의 기병>이란 칭찬을 들었다. 그러나 한편, 고관으로서의(군사령관) 판단력과 결단력에서는 많은 흠도 보였다.

 3.
배반

 1806년에 그는 베루크 대공이 되었고, 1808년에는 스페인 왕이었던 죠제프를 대신해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죠악키노1세를 자칭함) 그러나 그러한 영달은 그를 보수적, 퇴영적으로 내몰았고, 또한 끓어오르던 권력욕으로 인해서 그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영원히 만들고자 자신의 아내와도 나폴레옹과의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또 1812년 러시아원정에 참가했지만, 그러나 대패로 끝나자 스스로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서 적국이었던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마음대로 교섭을 시작했으며, 그 결과 1814년에는 완전하게 프랑스를 배반했다.

 4. 轉落

 그는 프랑스를 배반하고 이탈리아통일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빈 회의에서 그는 왕위를 박탈당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나폴레옹에게로 돌아가서 이탈리아 방면을 도모하겠다는 인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또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자 독단으로 오스트리아와 開戰해서 대패했고, 이어서 다시 프랑스로 도망쳐서 돌아왔다. 그러자 그에 격노했던 나폴레옹은 그의 관직을 박탈했고, 이어서 벌어졌던 워털루전쟁 뒤에 그는 또 부족한 병력으로 나폴리탈환을 꿈꾸기도 했었지만 실패했으며, 그 후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5. 인물상

 그는 동시대에 유례가 없었을 만큼 우수했던 기병지휘관이었으며, 특히 나폴레옹에게서는 빼놓을 수 없었던 훌륭한 부하였다. 그는 또 훌륭한 騎手였으며, 천하무적, 용기백배 등 최고의 찬사와 아울러서 어떤 亂戰에서도 맨 먼저에 뛰어들고는 또 태연하게 생환했던 용사였기도 했다. 그는 또 장신에다 위풍당당했고, 잘생겼던 용모에다 멋있는 말투까지 갖추었던 대단한 멋쟁이였다. (그가 스스로 디자인했던 화려한 군복을 입고 전장을 질주하면 적아군 할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거기까지였고, 일단 말에서 내리게 되면 그는 우유부단하고 경박했으며, 대군을 지휘하는 능력도, 전략적 시각도, 정치외교 능력도 없었다. 그러자 또 그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후에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적과 대치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였지만, 회의의 들어가면 판단력도 결단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늘이 그에게 내려주신 아주 큰 용기는 그의 지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 인간 안에 (모두 )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도저지 믿을 수가 없다...>

 그는 또 上述한 베시르와는 친구였지만, 란누나 다브와는 친하지가 않았다.
 그는 또 중세의 기사를 모방해서 자신의 검에 좌우명으로 <명예와 귀부인을 위하여>란 문구를 새겨 넣었다. 그래서 그는 뭍 여성들로부터 찬미의 시선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큰 기쁨으로 여겼던 희대의 멋쟁이 남자였다.

 그러나 그와 달리 그의 최후는 총살형이었고, 그때 그는 또 銃殺隊에게 <머리는 쏘지 마라. 곧바로 심장을 쏘아라>라고 말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야박하게도 수발의 총탄은 그의 머리로 향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미모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 프랑스 국왕에 복위했던 루이18세가 뮤라의 처형을 명했던 것은 1804년에 행해졌던 안갼公의 처형에 대한 복수라고도 알려졌다. 그리고 또 그때, 동료였던 네이 원수도 함께 총살되었다.

 6. 가족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었고, 장남 나폴레옹 아실은 미국으로 망명해서 조지 워싱턴의 질녀와 결혼했으며, 플로리다에서 농원을 경영했다. 차남 나폴레옹 류시앙 샤를은 이탈리아통일전쟁 때 부르봉가를 대신해서 나폴리국왕 자리를 노렸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2명의 손자 중 레오포르트는 스페인의 왕위계승문제로 국왕후보에 올려져서 보불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弟>

 
제롬 나폴레옹(Jerome Bonaparte, 1784년 11월 15일-1860년 6월 24일)
 나폴레옹의 3번째의 남동생(막내아우).
 코르시카명은 지루라모
 프랑스의 괴뢰국가 베스트파렌 왕국의 국왕(재위:1807년-1813년)
 이하, 앞에서 상세히 설명되었으므로, 생략함


 


 <제롬의 子>

 ※ 내용이 너무 확대되므로,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음

 1.

 마칠드 보나파르트(Mathilde-Letizia Wilhelmine Bonaparte, 1820년 5월 17일-1904년 1월 2일)

 
나폴레옹 1세의 막내아우 제롬의 장녀.
 
어머니는 제롬의 2번째의 아내였던 뷰르텐베르크 왕녀 카타리나.
 
나폴레옹 죠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나폴레옹公)의 누나.
 프랑스 제2제정 시대에는 우제니 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다.




 2.

 나폴레옹 죠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Napoleon Joseph Charles Paul Bonaparte)
 1822년 9월 9일. Trieste-1891년 3월 17 일. 로마

 
프랑스 제2제정기의 정치가, 황족.
 나폴레옹 1세의 막내아우 제롬의 아들.
 통칭 프린스(프란스) 나폴레옹(나폴레옹公, Prince Napoleon) 혹은 프론=프론(Plon-Plon).
 아버지의 이름을 취해서 나폴레옹 제롬(Napoleon Jerome) 모두 불린다.
 사촌 나폴레옹3세와는 물과 기름의 성격으로, 가끔 대립했다.



 


 * (참고)

 우제니 드 몬티죠(Eugenie de Montijo, 1826년 5월 5일-1920년 7월 11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3세의 황후.
 그녀는 테바백작의 令孃 마리아 에우에니어 이그나티아 아그스티나 데 파라포크스 이 코르크패트릭(스페인어:Dona Maria Eugenia Ignacia Agustina de Palafox y Kirkpatrick, Condesa de Teba)으로 태어났고, 결혼하면서 프랑스 황후 우제니(프랑스어:Eugenie, Imperatrice des Francaise)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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