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나폴레옹'은 4월의 '에크뮐 전쟁'에서 승리했고, 또 5월에는 2번째로 '빈' 진공도 완수했지만, 그러나 '아스페른과 에슬링의 싸움'에서는 '오스트리아군'에 졌다. 하지만 또 계속되던 7월의 '바그람 싸움'에서는 쌍방 합해 30만이상의 군사가 격돌, 그리하여 양군 아울러서 5만이상(에서 7만)에 달하던 사상자를 내고서야 '나폴레옹'은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오스트리아'와 '쇤브룬 화약'을 맺었고, 그로써 <제5차 대불대동맹>은 소멸했다.
그 화약 뒤에 '나폴레옹'은 황후였던 '죠제피누'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별했고(이설의 소지가 있음), 곧 이어서 1810년에 '오스트리아' 황녀 '루이즈'와 재혼했다.
그 결혼에는 당초 '러시아 황녀'가 후보에 올랐던 것이었지만, 그러나 '러시아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스트리아 황녀'가 결정되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멧테르니히'(앞에서 설명되었음)의 재정(裁定)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1811년에 왕자 '나폴레옹 2세'(앞에서 일부 소개되었음)가 탄생하자 '나폴레옹'은 그 유아를 '로마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또 그 무렵 '대륙봉쇄령'에 의해서 '영국'과의 무역이 어려워졌던 '유럽 제국(諸國)'은 경제적으로 곤궁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또,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영국'을 대신해서 당시 '중농주의'를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가 그 역할을 맡는다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으므로, 그래서 '프랑스 산업' 역시도 곧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 重農主義(physiocracy)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케네' 등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경제사상 및 그것에 기초한 정책을 말한다.
** 케네(Quesnay, Francois)1694~1774
프랑스의 경제학자·의사. <부(富)의 유일한 원천은 농업에 있다>라는 입장으로부터 농업생산을 중시했던 중농주의의 창시자. 중상주의(重商主義)를 비판했고, 렛세-페러(laissez-faire:自由放任主義-무간섭주의. 정부가 기업이나 개인의 경제활동을 간섭하지 말라는 입장)를 주장했다. 루이 15세<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1710~1774). 루이 14세의 증손으로 오를레앙공 필립의 섭정 정치로 시작된 그의 치세는 경제적으로는 호황이 계속되었으나, 칠년 전쟁에 휩쓸려서 인도와 캐나다의 지배권을 잃고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 절대 왕정의 내부적 붕괴를 가져왔다. 재위 기간은 1715~1774년>의 시의(侍醫)로서도 유명하며, 저서에 <경제표(經濟表)>가 있다. 그의 생각은 <아담스미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중농주의는 창시자와 공통의 사상을 가졌던 역사상 최초의 경제학파이다.
<케네>
*** 스미스(Adam Smith)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철학자(1723-1790)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
중상주의적인 보호정책을 비판하고
자유경쟁이 사회진보의 요건임을 주장했다.
산업혁명의 이론적인 기초를 다졌다.
저서에 <국부론>과 <도덕정조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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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1810년, 더 이상 그것을 견디지 못했던 '러시아'가 먼저 '대륙봉쇄령'을 깨고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그러자 또 '나폴레옹'은 그런 '러시아'에 대해서 계속해서 '봉쇄령'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러시아'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자 또 이윽고 1812년 '나폴레옹'은 그런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해서 원정을 결행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그것을 ‘조국전쟁’이라고 부름)
* 러시아 전쟁
불:La Campagne de Russie menee par Napoleon en 1812
러: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단, 러시아어 호칭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조.
<사진설명>
'상트페테르부루크'의 '카잔대성당'과 '모스크바'의 구세주 '하리스토스 대성당'에는
나폴레옹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해서 '전쟁기념비<(勝)戰爭記念碑>'가 세워져있다.
동상은 '쿠투조프'(앞에서 설명되었음)
<상트페테르부루크 위치도>
<카잔대성당 옛날 사진>
<러시아혁명 이전, 폭파되기 전의 하리스토스대성당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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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812년 '러시아제국'이 '대륙봉쇄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프랑스제국'의
'나폴레옹1세'가 同 제국을 침공, 그리고는 패배하고 퇴각할 때까지의 일련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1812년 '나폴레옹1세'에 의한 '러시아제국'에의 침공은 '나폴레옹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원정의 결과 '프랑스제국'과 그 동맹군들의 병력은 당초보다 2%미만으로 격감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이 '러시아 문화'에 끼쳤던 영향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란 大 문학작품과
舊 소련의 독소전(독일과 소련의 전쟁. 1941년-1945년)과 동일시했던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 톨스토이(러: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Lev Nikolajevich Tolstoj)
1828년 9월 9일~1910년 11월 20일
帝政 러시아 시대의 소설가.
대표작 <안나카레이니나, 부활, 전쟁과 평화, 人生讀本 등>
평화주의자였으며, 러시아문학과 정치 양쪽 모두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다.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하 설명은 생략함)
<손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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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獨蘇戰
제2차 세계대전 중, 1941년부터 1945년에 걸쳐서 '나치스'의 '독일'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쟁. 드물게는 '독소전쟁'이라고도 불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국방군'이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 침입했던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당시의 '소련'은 국민들을 고무(鼓舞)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에 승리했던 ‘조국전쟁’에 비교해서, 이 전쟁을 <大조국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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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명칭에 대해서>
1941년까지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조국(祖國)전쟁(러: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Otechestvennaya Voyna)>이라고 불렸으나, 1941년 이후에는 <1812년의 조국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舊 소련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쟁을 <大조국전쟁(독일-소련전쟁)>으로 강조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이 전쟁을 <1812년(의)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영국'과 '미국'에서의 <1812년 전쟁>은 자신들의 전쟁, 즉 <미국과 영국의 (美英)전쟁>을 의미한다.
<侵攻>
1. 저항군
1812년 6월.
'유럽'사상최대의 691,500명으로 이루어진 '프랑스제국'의 '대육군(La Grande Armee)'은
'네만 강(앞에서 설명되었음)'을 건너서 '모스크바'에 도달하려고 하고 있었다.
<네만 강>
그때, 대육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1. 황제직속부대 250,000명의 중앙공격군
2. 우제누 드 보아루네(Eugene de Beauharnais)(80,000명)와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70,000명) 지휘하의 2개 전선(前線)군.
3. 쟈크 마크드날(Etienne-Jacques-Joseph-Alexandre MacDonald)(32,500명)과 칼 필립 퓨르스트 트 슈바르젠베르크(Karl Philipp Furst zu Schwarzenberg)(34,000명의 오스트리아군) 지휘하의 2개 遊擊부대.
4. 225,000명 정도의 예비군.
5. 거기다 80,000의 <국민방위군>이 '바르샤바공국'의 국경방위를 위해서 소집되었다.
6. 거기에다 또 '러시아'국경의 '全프랑스제국군'도 모두 포함되어서, 전체 771,500명 정도가 '러시아'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7. 그리고 또 그 밖에도 '이베리아'에서 전투 중이던 30만 명과
8. '독일'과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20만이 넘는 병력이 예비로 남아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연, 그때 '프랑스제국'에 도전하려던 다른 세력들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했던 충분한 병력이었음에 분명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그때의 병력구성을 보게 되면
45만의 '프랑스군'이 '원정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나머지가 '동맹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다 또 '오스트리아'로부터 파견되었던 '슈바르젠베르크' 부대에 가세했던 대략 95,000명 정도의 '폴란드 병'과 90,000명 정도의 '독일 병'(24,000명이 바이에른왕국, 20,000명이 작센왕국, 20,000명이 프로이센왕국, 17,000이 베스트파렌왕국, 그리고 라인동맹 각국으로부터 수천으로 구성)도 있었다.
그리고 또한 25,000명의 '이탈리아 병'과 12,000명의 '스위스 병' 그리고 4,800명 정도의 '스페인 병'과 3,500명 정도의 '크로아티아 병' 2,000명 정도의 '포르투갈 병'도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 더해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로부터 파견되었던 군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군대는 가히 '나폴레옹'에게 패배하고서 제국에 재편(再編)되었던 나라들의 '총 군대'였다고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황혼의 모스크바>
<러시아 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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