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7  滅亡으로





   * 제5차 대불대동맹(Fifth Coalition, 1809년 4월 9일~1809년 10월 14일)



<바그람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2. 1809년 오스트리아 전쟁


  <아스페른-에슬링()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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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같은 무렵 '폴란드'에서도 '포냐트후스키'가 인솔하던 '바르샤바공국군'이
 '라싱전투(4월 19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 포냐트후스키(Jozef Antoni Poniatowski, 1763년 5월 7일~1813년 10월 19일)

 폴란드의 군인, 귀족.
 나폴레옹 휘하에서 활약했고, 원수가 되었다.
 
프랑스명은 Joseph Antoine Poniatowski



<라이프치히에서 나폴레옹과 함께>




 그리고 '나폴레옹'이 인솔하던 '프랑스 주력군'도 '도나우 강' 남안(南岸)을 동진(東進)해서 5월 13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무혈(無血)입성했다.
그러자 '칼 대공'도 '오스트리아군'을 '도나우 강'가에 집결시켰고, 결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프랑스군'은 '도나우 강'의 중주(中州)인 '로바우 섬'을 점령하고 가교(假橋)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아스페른'에서부터 '에슬링' 일대까지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의 파괴공작으로 가교가 자주 떠내려 가버렸기 때문에
 '프랑스군'으로서는 충분한 병력을 도하시킬 수가 없었다.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오스트리아군'은 물을 건너던(도하) '프랑스군'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으로 그 '아스페른-에슬링 싸움'은 '나폴레옹' 자신이 지휘했던 전쟁 중 첫 패배가 되었다.
 
그리고 또, 병력의 손실도 물론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가장 신뢰했던 부하 ‘란누’가 그곳에서 전사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폴레옹'에게서는 아주 골수(骨髓)에 사무쳤던 패배가 되기도 했다.


 


 ** 란누를 회고하며...



 란누(또는 란-Jean Lannes, 1769년 4월 10일~1809년 5월 31일)에 대한 보충설명.

 나폴레옹전쟁 기에 활약했던 프랑스의 군인, 원수.
 “우리들의 란누” 또는 “프랑스의 아이아스” 라고 불렸던 전설적인 용사였다.

                          


 <생애>

 
1. 성장 내력

 
소작농민 겸 구무원(廐務員-마구간지기)의 아들로 태어나서 궁핍한 소년시절을 보냈지만
 그러나 그 무렵부터 남다른 담력과 배려(配慮) 깊은 아이로 고향에서 알려졌다.
 
나중에 아버지의 추천으로 염색물사(染色物師)가 되기 위해 견습생으로 들어갔지만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러다가 프랑스혁명이 시작되면서 국민위병대에 자원했다.

 
당시 사관(士官)은 병사(兵士)의 호선(互選-특정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뽑는 선거)으로 선출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보병소위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분간 피레네방면(산맥근처의 고립된 근무처)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지에서 근무했던 용기와 함께 부상이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정신력으로 그는 금방 유명해지게 된다.

 2. 나폴레옹과의 만남

 
그리하여 불과 3년 만에 대대장까지 승진했던 그는, 그러나 1795년 상관과의 언쟁으로 강제 제대 당했다. 그러나 군대가 자신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그는 일병졸(一兵卒)로 이탈리아방면 군에서 백의종군했다. 하지만 그의 용기는 그곳에서도 금방 알려져서 곧바로 그는 군조(軍曹-한국의 중사에 해당함)로 승진했다.

 
그 후에, 이탈리아방면 군사령관이 된 '나폴레옹'은 그의 이력(履歷)에 흥미를 느끼고는 그와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의 용기와 솔직함에 매료되어서 소좌(한국의 소령에 해당함)에 복귀시킨다.

 
그 이탈리아전선에서 '란누'는 수많은 무공을 세웠고, 특히 ‘알코레 전투’에서는 항상 군의 선봉에 서서 3일간에 세 번의 중상을 입으면서도 계속해서 싸웠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자 그 용기에 감동했던 '나폴레옹'은 그 '알코레'에서 적으로부터 빼앗았던 군기에다 자신의 메시지를 적어서 그에게 주었을 정도였다.

 그
후 '나폴레옹'은 그를 부하라기보다는 친구로 대우했고
 그 관계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3. 용자(勇者) 중의 용자

 
그리고 그는 계속되던 '이집트원정'에서도 '나폴레옹'과 함께 종군했으며, 사단장이었으면서도 항상 병사의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그리고 또 그는 몇 번이나 부상을 당했지만 결코 굽히는 일이 없어 그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져만 갔다. 그러자 '나폴레옹'의 친구였던 '드제이' 장군은

 <용사 중의 용사라는 것은 확실히 그를 두고 한 말이다!>

 라고까지 그를 격찬했다.

 
그리고 또 그는 1800년에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그러나 단순한 전선지휘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장군의 자질까지 유감없이 선보였고 '마렌고 싸움'에서는 열세의 전위부대를 지휘해서 '오스트리아' 대군을 반나절이나 묶어두는 활약까지도 선보였다.

 
그러나 그는 사생활에서는 불운해서, 처음의 아내가 간통에다 아이까지 가졌기 때문에 이혼했고, 이어서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었던 '카로리누'에게 구혼하려했지만 '뮤라'에게 빼앗기는 등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다행했던 것으로
 그는 곧, 궁정 제1의 미녀로 불렸던 아름답고 총명했던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그것은 또, 그 '뮤라'가 짜증이 강하고 변덕쟁이였던 '카로리누'에게 좌지우지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래서 그에게서는 무척이나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는 또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원수로 승진했다.

 4. 우리들의 란누

 
그는 '나폴레옹' 즉위 후에도 중요한 전쟁에는 모두 참가했으며, 그로써 그의 '제5군단'은 대육군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친했던 '네이' 원수와 함께 '뮤라'의 지휘 하로 들어가게 되자 많은 불만을 가지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그는 전장에서는 공(功)을 타투 듯이 활약했고 '아우스트리트 전쟁'에서는 또 좌익지휘관으로서 '러시아군'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이어서 그는 '프로이센 전쟁'에서도 활약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사이가 나빴던 '뮤라'와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보고서들을 산더미처럼 남겼다.

 
어쨌든, 대체적으로 '란누'는 전위(前衛)로써 적군을 저지하거나 거점공략을 맡는 임무를 잘 수행해냈지만
 그러나 그 외에도 전체 병들을 통솔해서 싸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임무들도 잘 소화해냈다.

 5 스페인, 그리고...

 1808년 '란누'는 교착하고 있던 '스페인전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쟁에서도 처음부터 중상을 입기도 했었지만, 그러나 곧 '스페인'의 야전군을 격파했고, 이어서 혈투 끝에 '사라고사'도 공략했다. 그리고 그때의 비참함으로 인해서 마음을 다쳤던 그는, 그 후로 점차로 전쟁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그 '사라고사' 공략 후에 이어서 그 다음 해에는 '오스트리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는 '레겐스브르크 공략전'에서 지나친 고전에 전의를 잃어가던 부하들을 질타하며

 <나는 원수이기 이전에 척탄병(擲彈兵)이다!>

 라고 외치고는 스스로 사다리를 잡아서 성벽을 오르는 모범을 보여서(물론 그 이후 부하들에 의해서 제지는 되었지만) 그에 분발했던 장병들과 함께 그 견루(堅壘)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인 5월 22일, 그는 <아스페른-에스린크 싸움>에서 우세했던 '오스트리아'군을 맞아서 교전했고, 적탄을 무서워하지 않고 선두지휘를 하던 중 다리에 포탄을 맞아서 쓰러졌다. 그리고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긴급수술을 받은 후에 즉시 후송되었지만, 그러나 상처가 다시 악화되어 결국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은 그때, 그 넘어져있던 <란누>를 끌어안고는 한참동안이나 펑펑 울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전사한 최초의 <제국원수>가 되었다.

 6. 인물상(人物像)

 
나폴레옹의 원수들 중에서 황제에게 가장 많은 신뢰를 받았고, 또 개인적인 우정까지 얻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도 그는 나폴레옹에게 <너> 라고 불렀고
 '나폴레옹' 또한 그것을 기꺼이 인정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나폴레옹'은 후에 그를 회상하기를

 <그 란누라는 남자는 처음에는 정신보다는 용기가 돋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날이 정신 쪽도 그 기상이 높아져서 마침내 밸런스를 유지하게 되었다... 나는 작은 인물이었던 그를 등용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이미 위대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라고 말을 했었다고 하며
 그
리고 또 '나폴레옹'은 그가 치명상을 입었을 때, 그 '란누'의 피로 자신의 군복을 다 적실 듯이 껴안고는

 <살아줘, 제발 부탁이야, 살아만 줘!-------------->

 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을 했었다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그런 이유 등으로 '나폴레옹'으로부터 그 정도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은 아마도 그밖에는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는 지휘관으로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용기와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써 똘똘 뭉쳤던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단순한 맹장만이 아니었고 '나폴레옹'도 술회했던 것처럼, 그는 경험을 쌓을 때마다 전술에 일취월장을 보였던 그런 사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다 또 그는 전위(前衛)를 맡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힘에 부치는 적을 상대해서도 끈질긴 방어로써 교묘하게 군을 지켜냈으며, 특히 보병과 기병과 포병을 아우르면서 지휘했던 그의 능력은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신기(神技)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나폴레옹'의 지시를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행동할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았던 원수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눈에 띄게 미남자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옷차림에는 많은 신경을 써서

 <지휘관이란 자는, 모름지기 병사들의 눈에는 결혼식 날 밤의 신랑 같이 비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을 모토로 해서, 전장에서도 화려한 군장을 하고서는 장병들을 고무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는 성격이 급하고 격정적이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전장에서는 항상 맨 앞장을 서서 달렸고, 그리고 또 그런 그의 모습은 일종의 신앙심까지 들게 해서, 장병들에게는 절대적인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리고 또 그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고도 전해진다.

 <프랑스에 있어서도, 나에게 있어서도, 이 정도로 큰 손실은 아마도 결코 없을 것이다!...>

 
라고...






 





       <제5차 대불대동맹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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