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生涯

  1.7  滅亡으로




 
           <1808년5월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에서의 학살-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3rd May 1808 = 고야>
 ※
고야는 프랑스군에 의한 시민의 학살을 이 그림으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 半島戰爭(1808년~1814년)

 
 영:Peninsular War(반도전쟁)
 스:Guerra de la Independencia Espanola(스페인 독립전쟁)
 포:Guerra Peninsular(반도 전쟁)
 불:Guerre d'Espagne(스페인 전쟁)
 카타르냐:Guerra
del Frances(프랑스 전쟁)


                          <1808년 5월 2일 맘르크(노예병)들의 공격-고야작(1814년)>


 2. 영국군상륙

 1808년 8월, 영국군은 소장이었던 ‘아서 웰즐리(웰링턴)卿’의 지휘아래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포르투갈의 ‘베르나르디무’ 정찰대가 ‘로와슨’을 저지하고 있던 동안 ‘웰즐리’는 ‘드라보르두’의 군대를 8월 17일 ‘로리사의 싸움’에서 이겼다.

 
8월 21일 영포(英葡)군은 ‘쥬노’ 지휘의 프랑스군과 ‘비메이로의 싸움’에서 맞닥뜨렸다. 그러나 ‘웰즐리’의 주의 깊은 관리와 강한 지도력 그리고 그에 합당한 전략으로 프랑스군과 그 동맹군을 제거했다.

 그러나 계속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웰즐리는 너무 젊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때 포르투갈에 새롭게 보강되었던 원정대를 지휘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서, 그 자리는 ‘헤리 발라드’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그 발라드가 죽자 그 다음에는 ‘휴 다르린 풀’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런 일련의 승리로 인해서 맺어졌던 ‘신트라 협정’에 근거해서 프랑스군은 1808년 8월 포르투갈로부터 철퇴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사령관들은 3만의 정예부대를 인솔할 ‘존 무어’경만 남기고 '신트라 협정'에 관한 조사를 받기 위해서 본국으로 모두 귀환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친히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베리아반도로 향했다.

 영국군은 ‘부루고스市’ 근교에서 프랑스군과 맞섰지만(부루고스의 싸움) 곧 퇴각해야했고, 거기다 또 ‘사아군의 싸움’과 ‘베나펜테의 싸움’ 그리고 ‘카카베로스의 싸움’까지 치러가면서 프랑스군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야만 했다.

 1809년 1월, 영국은 ‘코르나’로부터 철병을 완료했다. 그리고 ‘무어’는 그 <코르나의 싸움>이라고 알려진 전투 중에 시가방위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코르나 전투>


 
그래서 불과 2개월 남짓 스페인에 머물렀던 나폴레옹은
 
지휘권을 원수(元帥)들에게 다시 되돌려주고는 프랑스로 귀국했다.

 
3월에는 '솔트 원수'가 북쪽으로 향해서 2번째 포르투갈 침략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처음은 미노 강에서 포르투갈의 민병대에게 격퇴 당했지만, 그러나 이어서 ‘차베스’와 ‘브라가(Braga-포르투갈 북서부 도시)’를 공략했고, 거기다 1809년 3월 29일에는 ‘포르트’를 공략했다. 



<브라가 16세기 지도>


 ** 포르트(토) Porto

 포르투갈 북부항만도시. 인구 약 263,000명. Lisbon에 이어서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트 도시권의 인구는 약 160만정도이다.
 영어(英語)로는 전통적으로 Oporto 라고도 부른다.
 
聖그레고리우스聖堂과 大聖堂, 포르사궁, 聖프란시스코聖堂 등
 市街地는 포르트 역사지구로서 1996년에 世界遺産으로 등록되었다.




 그러나 ‘아마란테’ 도시 등에서의 저항은 '솔트 군'을 '오포르트'에 고립시켰고, 그로써 '솔트'는 <북쪽 포르투갈의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나라에서 퇴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나폴레옹의 승리로 인해서 스페인군을 괴멸되었다지만, 그러나 스페인국민들은 그때부터 프랑스의 패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게릴라전법>을 개시했다.

 또 포르투갈에서는 ‘미겔 페레이라 포르하스’라는 <전쟁 大臣>이 영국에서 보내온 자금과 병력으로 국군의 재건을 꾀하고 있었고, 그것은 또
1806년부터 제시되어왔었던 군제개혁이 그때서야 실행된 것이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2만 명의 상비군과 3만의 민병 소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수는 상비군 5만, 민병 5만으로 불어났고, 거기다 <오르덴난사스>라고 하는 의용군까지 더해지게 되었다.

 아무튼, 1809년 4월 '웰즐리'는 영포군을 지휘하기 위해서 포르투갈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또
그 무렵에는 이미 ‘포르하스’와 각 지역의 지사(知事)들이 영국군을 조직해두었고, 또 ‘베레스포드’ 장군에 의해서 영국 풍의 전투에 맞게 개편되었던 포르투갈 연대가 보강되어 있었다.

 그러했던 신군(新軍)은 5월 10일부터 11일의 ‘그리호의 싸움’과 5월 12일의 ‘오포르트 싸움’에서 '솔트 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또 북부의 全도시가 ‘시르베이라’에 의해서 공략되었다.

 '웰즐리'는 불안했던 新점령지의 포르투갈군을 떠나서 ‘그레고리오 데 라 쿠에스타’군에 합류하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진군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7월 27일부터 다음 28일 ‘타라베라 데 라 레이라의 싸움’에서 호세1세가 인솔하던 왕국 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또 그곳은 연합군이 궁지에 몰리자 포기하고 서방(西方)으로 줄행랑을 쳤던 곳으로, 그래서 그곳을 되찾는 데는 아주 비싼 대가가 지불되었다. 그러나 그 ‘타라베라’에서의 승리로 '웰즐리'는 자작(子爵)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스페인군은 ‘오카나의 싸움’과 ‘아르바 데 트르메스의 싸움’에서 심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웰즐리'는 스페인군과의 협력이 잘 되지 않는 것과 또 새로 투입된 프랑스군을 염려해서 포르투갈의 방위를 강화하려는 결단을 내렸다.

 
'웰즐리'는 리스본 방위를 위해서 ‘네베스 코스타’ 소좌(少佐)의 계획을 채용했고, 그리고는 중요한 도로와 참호 그리고 토루(土壘-흙으로 만든 진지, 보루)를 이어서 강력한 보루선(162)을 구축해서, 이른바 ‘트레스 베드라스線’을 형성했다.

 그러자 1811년 7월에 프랑스군은 ‘안드레 마세나 원수’가 인솔하던 60,000의 병력으로 재침공했다.



 ** 안드레 마세나(Andre Massena. 1758년 5월 6일~1817년 4월 4일)

 프랑스의 군인. 제1제정下의 원수. 에스린크(大侯爵). 리보리 공작.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주로 方面군사령관을 맡았고
 스위스전쟁이나 반도전쟁 등에 참가했다.




 그 전쟁의 발단은 ‘코어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후, 마세나는 <포르투갈에서 최악의 길>을 답사해야만 했다.

 9월 27일 ‘브사코의 싸움’에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전술의 부주의로 패배를 당했지만
 그러나 영포군을 ‘트레스 베드라스선’까지는 철퇴시켰다.

 10월 14일 ‘소브랄의 공격' 후에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을 정도로 성새(城塞)는 인상적이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종군했던 ‘찰스 오만’은 그날의 상황에 대해서

 <10월 14일 농무(濃霧)의 아침, 소브랄에서 '나폴레옹의 조수(潮水)'는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그리고는 곧 썰물이 시작되었다...>

 라고 기술(記述)해두었다.

 아무튼, 포르투갈 인들은 그 전선에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때 보급로의 결여와 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811년 初頭, 신규 영국군의 도착으로 재차 증강된 동맹군은 공세로 바뀌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카디스’의 포위를 푼 것이 실책의 한 요인이 되어서 3월 5일 ‘바롯사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또 ‘마세나’는 5월 3일부터 5일까지의 ‘펜테 데 오노로의 싸움’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하는 수 없이 또 포르투갈로부터 철수했다.



<카디스 항구>


 그리고 ‘마세나’는 그때 25,000명의 병사들을 잃었기 때문에 ‘마르몬’과 교대했다.
 


 ** 마르몬(Auguste Frederic Louis Viesse de Marmont) 1774년 7월 20일~1852년 7월 22일

 프랑스의 군인, 귀족, 정치가.
 나폴레옹1세의 하급사관시대부터의 심복의 부하였지만, 1814년 연합군이 파리까지 쫓기던 절망적이었던 상황 속에서도 미적거려서, 결국 프랑스를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회상록 등에서도 비난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유서에서는 그를 용서했다.




 그리고 또 '솔트'는 ‘바다호스’를 위협하기 위해서 남부로부터 이동했지만, 그러나 ‘윌리엄 베레스포드’가 인솔하던 영포군과 스페인군에 의해서 5월 16일 ‘아르브에라의 싸움’으로 내몰렸다.




 ** 바다호스(Badajoz-스페인의 도시)
 




  



 그러나 그 피투성이의 전투 뒤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후, 전쟁은 일시휴전으로 들어갔지만, 그러나 수에서는 우세하고서도 프랑스군은 열세에 몰려있었던 가운데, 스페인의 게릴라활동 또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프랑스군은 그때 양쪽으로 고배를 마시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프랑스군은 350.000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중에 20만 이상의 병력이 보급로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실전병력은 많이 부족했던 실정이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스페인은 자유주의적인 <1812년의 카디스 헌법>초안 만들기에 착수했다.
 그리고 1812년이 시작되자 '웰즐리'는 서서히 스페인으로의 동맹군재편을 실시했고, 이어서 1월 19일에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의 성새화(城塞化) 되어있던 마을을 포위해서 공략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4월 6일에 ‘바다호스’를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한 뒤 상기와 같이 공략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두 마을은 모두 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약탈되었다.
 

 

 

<반도전쟁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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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화 2011-04-16 06:43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