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가(鄭家)가 떠난 밤> 2.
사실, 정가(鄭家)가 그 녹음기에 대해서 말을 냈던 것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의 말과 같이 그 전에도 가끔씩 <영어 회화를 좀 해야겠는데 워낙 오래돼서 잘 안 돼요>라는 말을 했었고, 그래서 또 나는 그날도 그 때문인가 해서 그렇게 그것을 선뜻 내 주었던 것이었지만,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에는 그 시간까지도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녹음기의 주인도 내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원래, 그 녹음기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던 <진(陳)>이라는 경리의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를 몹시 탐내했는데, 그것은 또 그 라디오가 당시로서는 구하기 아주 힘들었던 외제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또 그것은 외국에 나갔던 형이 돌아오면서 나에게 선물했던 것이었지만, 아무튼 당시 아직 처녀였던 그녀는 객지라고 할 수 있었던 그곳까지 들어와서 나처럼 혼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중이었고, 평소 사색을 즐기는 편이었던지 <일요일 같은 날은 혼자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며 라디오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나에게 그런 뜻을 은연중에 비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그랬던 것이 어느 날 회사를 찾아왔던 외판원에게서 내가 당시 잘나간다는 어느 강사의 영어회화테이프를 사게 되고, 그래서 또 당장에 녹음기가 필요하게 되자 그녀는 마치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바꾸자는 의견을 물어왔던 것으로 그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 내가 그 녹음기를 소유하게 되었던 연유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주인은 나도 아니었던 모양이었고, 그리고 또 그 상황으로 보아서 그 정가(鄭家)의 소유도 아닌, 어쩌면 지금쯤은 쓰레기더미 속이나 중고품가게에서 먼지를 덮어쓴 채 자리만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것은 그날 그렇게 해서 정가(鄭家)의 손에까지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이야기가 이쯤 되니 그 문제의 <정가(鄭家)>에 대한 소개 같은 것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또 그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면, 그러니까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그 동네로 이사를 가고 나서였다. 당시, 새로 취직했던 회사가 살던 곳과 거리가 너무 멀어 그 근처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나는, 그래서 급히 방을 구해야만 했고, 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서 수소문하던 중에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임시로 거처할 그곳을 소개받아서 그 동네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정가(鄭家)는 이미 그 동네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와 비슷하게 회사 근처에 방을 구하기 위해서 그 동네로 들어왔던 것이라고 했고, 아이도 없이 마누라와 둘이서 내가 거처하던 집 몇 집 건너편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왕래도 잦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와의 첫 대면은 극히 우연었고, 그것은 또 내가 그곳으로 이사를 간 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퇴근 길에서였다.
그날 나는 저녁 어스름에 집이란 곳을 찾아 귀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네 입구에서 어떤 남자 한 명이 무엇엔 가에 열중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잠시 지켜본 결과, 그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꼼짝도 않는가 했더니, 다시 허리를 굽혀서 그가 가져온 듯했던 라면 박스 같은 것을 집어 들었고, 그리고는 또 다시 한참을 그렇게 무언가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그 박스를 하늘 높이 던져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나는 제법 긴 마을 입구 길을 걸어가면서 그의 그런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내가 다가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는 듯이 보였고, 그래서 또 그런 짓은 내가 그를 스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궁금증을 가진 동물이다. 그리고 나도 그것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하지만 또 평소에는 무엇에건 무관심한 채로 살아가려고 애쓰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짓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고, 그래서 또 <이것 만큼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다>고 하는 무슨 관문(關門)처럼 여겨져서, 그에 참지 못한 나는 결국 걸음을 멈추고는 그에게 말을 걸고 말았던 것이 그 만남의 시작이었다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죄송하지만,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때 시간은 겨우 일곱 시를 넘겼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입하(立夏) 근처라 곁에 있는 사물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을 만큼 주위는 많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또 어쩌면 그 동네 같이 산이 뒤를 막고 있는 곳에서는 밤이 더욱 빨리 오는 것인지 제법 온기 있는 바람이 거슬리지 않았는데도 길조차 조심해서 걸어야 했을 만큼 주위는 많이 어두워져 있었던 것이다.
"아! 네..."
하지만 그는 무엇에 열중한 후라, 또는 어두워서 내가 잘 보이지 않는지, 아니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 그랬던지, 순간적으로 미간을 모아서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곤 허리를 숙여서 다시 박스를 주워들었다. 그러자 나는 그의 다음 행동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아예 그와 함께 하늘을 보고 서있게 되었는데, 하지만 도무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박쥐 잡아요!" "네? 박!..." "네, 박쥐요!" "아!..."
그러고 보니 높지 않은 하늘에서 무엇인가 검은 것들이 팔랑이듯 춤을 추고 있는 듯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여전히 박쥐인지 뭔지는 알 수가 없었으며, 그것이 또 설사 그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왜 그것을 잡으려 하는지 더욱 의문만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멍청하게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러자 그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저 게요, 눈 안 좋은데 그렇게 좋대요!" "네, 그렇군요. 근데, 그렇게 해서 박쥐가 잡힙니까?" "박쥐란 놈이 초음파를 쏘아서 먹이를 잡는다는 것은 아시죠?!" "아, 예! 말은 들어봤습니다만!"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아,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박쥐란 것에 관심이 없어놔서." "네, 그렇습니까? 아무튼 저 박쥐란 놈이 그렇게 해서 먹이를 잡아먹는데, 하지만 모든 것엔 다 맹점이 있기 마련이죠. 물론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어쨌든 사람이 그것을 이용해서 오히려 자신을 잡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박쥐도 놀래 자빠질 겁니다. 그런 면에서 박쥐보단 인간이 좀 더 낫다고나 할까요?" "네... 그런데, 어떻게?"
그는 내가 자꾸 물어오자 그때서야 처음으로 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고, 이어서 그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어떻게 하냐면요? 이 박스를 가능한 하늘 높이 던져 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저 놈들이 이게 먹이인 줄 알고 초음파를 쏘아대는데, 그리고는 목표를 향해서 돌진한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지없이 이 박스에 갇히는 놈이 있다는 것이죠." "아! 그렇게 해서 잡는 거군요!" "네!"
<하지만 사실일까?...>
아니, 사실이든 아니든 나에게서 그것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에게서는 이미 그에 대한 검증이 끝난 후일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쥐라니!>
<그것도 어두워져가는 동구(洞口) 길 위에 서서는!>
<그리고 또 눈!>
하지만 그때, 언뜻 봐서도 그가 벌써 눈이 멀었다거나 안질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말하는 것이나 태도로 보아 잘 봐야 나보다 조금 위일 것 같았던 그는, 겉으로 봐서도 건장한 신체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의 부친이거나 혹은 양친, 아니면 친척 누구에게 주려고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잡아서 팔려고 그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모르겠다! 그게 저 사람의 믿음이고 또 의지라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사람이란 동물이 못 먹는 것이 없다고 하니까!>
나는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그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서 그곳을 떠났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그와 그런 짓을 하는데 잠시라도 같이 서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공범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불쾌해졌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 <이런 곳에서는 저런 짓도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나를 서둘러서 그곳을 떠나게 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출퇴근 때마다 그곳을 지날 때면 그가 꼭 그곳에 서있는 듯 내 눈에는 아롱거리는 듯 했고, 그럴 때면 또 나는 일부러 급히 걸어서 그 길을 빠져나가곤 했는데, 아무튼 그 만남 이후 나는 당분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활동시간과 나의 불규칙했던 퇴근시간이 맞물리지 않아서였겠지만, 하지만 그런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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