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클럽 회원증
캐서린 맥과이어 지음, 방진이 옮김 / 황소걸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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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채식주의자입니다. 채식을 지향한 지는 꽤 되었지만, 이렇게 '나는 채식주의자'라고 밝히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워요. 채식을 지향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다양한데요. 대체로 좋지 않은 쪽으로 다양한 편입니다. 우리 가족들조차 내가 채식주의를 고수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를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정은커녕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고, 그런 태도는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채식주의자로 살아오며 저는 여러 번 현실과 타협해야 했고, 지금도 종종 주변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방지하고자 잠시 채식주의를 뒤로 밀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당장 받는 스트레스도 크긴 하지만, '이러면 내가 채식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머리가 무거운 밤을 보내곤 하는 게 더 힘들지요.

   이렇게 채식주의자이면서도 종종 흔들리곤 하는 나는, 비건을 지향했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채식 클럽 회원증>을 읽어보았어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귀여운 이 책은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이제 막 결심한 초심자를 위한 유용한 정보로 구성되어 있어요.


   채식주의자로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지 않게 이 책 초반에 다루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는데요. 그중 '육식주의'의 개념에 관해선 처음 접했어요. 사회심리학자 멜러니 조이가 처음 제안한 이 개념은 전 세계의 육식 문화는 특정 동물을 먹도록 무의식적으로 답습된 사회적 편견이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육식이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함을 꼬집고 있었어요.



   <채식 클럽 회원증>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채식 음식과 식재료, 채식 레서피에 관한 정보를 알차게 담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요리에 취미를 못 붙여서 해외의 채식 음식이나 레서피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며 깊이 파지는 않았어요. 그저 기존에 흔히 통용되고 있는 채식 음식을 기본으로 각종 채소를 기반으로 한 샐러드나 월남쌈, 뮤즐리와 그래놀라, 여러 곡물과 콩류, 그리고 원래는 채식 레서피가 아닌 한식을 변형해서 먹어왔지요. 요리라고 해봤자 '원재료 그대로 먹는 게 미덕이다'라며 렌틸콩과 병아리콩, 퀴노아를 그냥 밥에 넣거나 샐러드, 혹은 카레에 넣어서 먹는 게 고작이었는데요. 하지만 여러분, 이 <채식 클럽 회원증>에서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다양한 해외 음식들만 봐도 입이 쩍 벌어질 겁니다. 나라마다 채식 음식이 꽤 있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다양해서 놀랐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시도하지 못한- 대두로 만든 인도네시아의 템페, 레바논의 전통 샐러드 팟투시, 라틴아메리카의 토스타다 등 맛있어 보이는 채식 음식이 한두 개가 아니랍니다.

   특히 병아리콩의 다양한 활용법을 알게 된 점이 무척 좋았는데요. 병아리콩 물로 달걀흰자처럼 거품을 만들어 머랭, 치즈, 마요네즈를 만들 수 있다니...... 이건 신세계였어요! 그뿐만 아니라 병아리콩 가루로 오믈렛을 만드는 레서피도 나와 있는데, 이 오믈렛 레서피를 읽은 순간 그 맛이 어떨지 너무 궁금해서 얼른 도전해보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이 책은 채식주의자가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에요. 저자는 채식 완전단백질 조합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식재료를 살 때 어디서 돈을 아끼고 어디서 돈을 제대로 지출해야 할지에 관해 충고하며, 채식 음식 특성상 빨리 허기지는 배를 위해 든든한 채식 간식을 어떻게 구성할지 제대로 추천할 뿐만 아니라, 지인들과의 외식이나 해외여행에서 겪을 난처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같이 고민합니다. 이런 디테일에서 20년 동안 행복한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다는 저자 소개가 허풍이 아님을 확실히 느꼈어요.



   건강한 채식을 하는 사람은 육식하는 사람에 비해 각종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더 안전하다는 걸 아시나요? 채식을 하면 몸에 영양이 불균형하고 근육이 잘 안 생긴다는 낭설을 믿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은 참 놀라워요(채식과 육식 중 어느 것이 근육과 운동 능력에 도움이 더 되는지는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게임 체인저스'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육식하는 사람들이 <채식 클럽 회원증>과 같은 채식에 관한 서적에 관심을 가진다면 비록 그들이 가진 가치관을 하루아침에 바꾸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채식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끔 실수할 수밖에 없어요.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때때로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완벽한 채식 식단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지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 본서 178쪽 -


   나는 엄격한 비건으로 몇 년 동안 지내다가 현실과 타협해 비건에 가까운 페스코 베지테리언(유제품, 달걀, 해산물은 먹는 채식주의자)으로, 거기서 더 타협해 현재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을 기본으로 이따금 플렉시테리언(가끔 육류를 먹는 채식주의자)이 되는 걸로 유지하고 있는 상태인데요. 책 초반에 있는 '채식 클럽 회원이 자랑스러운 이유'를 반복해서 읽으며 초심으로 돌아가 좀 더 엄격하면서도 행복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어요.


   행복한 채식주의자가 되려면,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채식 음식으로 식단을 만들어야겠죠? 앞서 말했듯 나는 여기저기 찾아보지 않고 나름대로 구성한 식물성 음식으로 -이따금 맛없게 완성된 나물과 샐러드를 질겅질겅 씹으며- 채식 식단을 꾸려왔는데요. 이 <채식 클럽 회원증>을 읽고 나니 책 속에 소개된 채식 식재료와 레서피뿐만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이국적인 채식 레서피가 더 있는지 찾아보고 싶단 생각이 -드디어- 드네요. 이와 더불어 한식 비건 레서피도 열심히 찾아서 나의 채식 식단을 좀 더 풍성하게 업그레이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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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수집가 I LOVE 그림책
크빈트 부흐홀츠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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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에서 '미리 보기'로 그림을 본 순간 마음을 사로잡혀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책을 읽었지요. <순간 수집가>라는 제목의 이 그림책은 차분하고 감성적인 어조의 글과 멋진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책 속에는 '하펜슈트라세'라는 섬에 살고 있는 '나'라는 소년과 화가 '막스 아저씨'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학교에서 곧잘 놀림을 받는 소년 '나'는 친구가 없는 탓인지 같은 주택에 사는 화가 '막스 아저씨'의 화실에서 오후를 보내곤 합니다. 아저씨는 햇볕이 따스했던 3월에 소년이 사는 주택의 5층으로 이사 왔고, 그 후 소년을 '예술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친구가 되었지요. 막스 아저씨가 작업실에서 소년을 신경 쓸 틈 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동안, 소년은 마룻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아저씨네에 있는 스케치북, 책, 지구의, 장기 등등의 물건들을 마음껏 누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소년은 빨간색 소파에 앉아 5층에 위치한 아저씨의 작업실에 들려오는 온갖 소리-저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윙윙거리는 환풍기 소리,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와 더불어 막스 아저씨의 제도용 펜이 종이 위에서 쓱쓱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걸 좋아했어요. 책, 연필, 색색의 물감들이 놓여 있는 책상 위에서 아저씨가 뭘 그리는지 볼 순 없었지만, 소년은 막스 아저씨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그냥 참 좋았지요. 아저씨는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면 소년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가끔은 바이올린 소리만 가만히 듣곤 했어요.



   아저씨는 자기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고, 완성된 그림들을 한쪽 벽에다 그림 뒷면이 겉으로 보이도록 주르르 기대어 놓았어요. 아무도 볼 수 없게요.

   막스 아저씨는 집을 자주 비운 채 바닷가나 섬 안의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하거나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곤 했어요.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이 훌쩍 떠난 막스 아저씨는 불현듯 작업실에 돌아와 있곤 했지요. 여행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아저씨가 이따금 입을 열면 소년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어요.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굉장한 이야기여서 허무맹랑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어요. 막스 아저씨가 이 집에 산 지 일 년이 넘어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즈음의 어느 날, 아저씨는 소년에게 꽤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집에 있는 화초와 우편함 관리를 부탁합니다.


   소년은 막스 아저씨의 우편함에 도착한 편지를 발견하고는 챙긴 뒤 아저씨네로 갔어요. 소년은 식탁 위에 편지를 놓은 뒤, 약간의 망설임 끝에 화실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문을 엽니다. 놀랍게도 화실 안은 달라져 있었어요. 벽을 빙 둘러 늘어선 그림들이, 전부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죠! 그림들 앞엔 찢어낸 도화지에 쓴 쪽지가 한 장씩 놓여 있었고, 거기엔 막스 아저씨의 메모가 있었어요. 소년은 아저씨가 소년만을 위해 마련한 전시장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공을 들여 그림을 감상합니다. 아니, 그림 속으로 '여행'합니다. 그날뿐만 아니라 그 후로 몇 주 동안 말이죠.


색깔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늘에서 내린 눈의 서늘한 파란색이나 아침 햇살을 받고 희미하게 빛나는 초원의 초록색, 밤중에 번쩍번쩍 빛나는 조명이 내뿜는 노란색, 이 모든 게 하나도 낯설지가 않았지요.

-본문에서-


   소년만을 위한 전시회 속 그림들에는 그동안 아저씨가 소년에게 말했던 여행 이야기가 담겨있었어요. 아저씨가 캐나다에서 보았다는 신비한 눈코끼리, 하늘을 나는 서커스단 자동차와 같은 이야기들이 말이죠. 희한하면서도 환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 아저씨의 그림들은 몹시 세밀하게 표현되어 더 매력적이었어요. 일상으로 끼어든 기묘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순간이 하나도 낯설지 않게 섞여 있었죠. 말 그대로 '그 순간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하나의 이야기'가 그림들 속에 펼쳐져 있었어요. 나 또한 소년처럼 이 그림들을 한 번 보고 마는 것에 끝내지 않고, 며칠 동안 여러 번에 걸쳐 그림으로 들어가 찬찬히 느껴보았어요. 어느 해 정월 초하루 눈으로 덮인 새하얀 마당에서 거대해진 주사위를 두 손으로 굴러보고, 집보다 키가 훨씬 더 큰 거대한 선물을 대체 누가 보냈는지 궁금해서 까치발로 발신인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어요. 수수께끼 문이 즐비한 물 위의 어딘가에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한참을 놀기도 했죠! 떠나간 서커스단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어릿광대의 손을 이끌고 초원을 가로질러 가기도 했답니다.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즐거웠지만, 그림 속의 한 장면에 완전히 몰입해서 내가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너무 좋았어요. 안 그래도 요즘의 나는, 일상 속 순간순간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그저 다 스치며 지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왠지 울적했거든요.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추억으로 남지요. 특히 너무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들은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되기도 합니다. 소년이 막스 아저씨와 함께한 순간을 잊지 않고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의 톤은 어릴 적 수집한 특별한 순간들로 결정되는 걸지도 몰라요. 더구나 평범한 일상 속에 상상 한 스푼을 넣어 포착해낸 마법 같은 순간들을 그려내는 막스 아저씨 같은 사람과 인연이 닿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 소년의 삶의 빛깔을 바꾸고도 충분했을 테죠.


   막스 아저씨와 소년의 이야기는 아직 더 남아 있어요. 내가 다 쓰지 않은 남은 이야기는 이 책을 직접 읽으며 만나보길 권해봅니다. 환상적인 순간을 담은 멋진 그림들과 함께 나처럼 어떤 순간에 온전히 푹 빠져있는 경험을 당신도 꼭 해보길 바라니까요. 막스 아저씨가 소년에게 건네는 말들 또한 하나같이 주옥같은데, 그림에 빗대어 말하는 아저씨의 삶에 대한 철학이 무척 멋지기에 이 또한 놓치기 않길 바라요. 비밀이 담긴 그림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발견할 당신만의 답이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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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단 일본식 집밥 - 데치기·볶기·튀기기 기본 조리법으로 뚝딱 만드는
세오 유키코 지음, 최서희 옮김 / 에디트라이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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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뉴스에서 코로나19 발생 이후 가정에서 외식으로 끼니를 챙기는 비중이 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 속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집에서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한다고 말한 응답자와 집밥을 차려 먹는다고 말한 응답자의 비율이 거의 맞먹는다. 요즘의 저녁 식사 풍경에서 배달음식 및 포장음식, 밀키트, 가정간편식, 반찬가게의 반찬 등 외식을 흔히 볼 수 있는 게 사실이긴 하다. 나 또한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 먹은 지 좀 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손수 만든 건강하고 맛있는 집밥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잠재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나처럼 집에서 만든 집밥에 대한 욕구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뉴스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집밥과 점점 멀어지는 이유는, 한 끼를 위한 요리 과정이 대체로 한번에 두세 가지 이상의 조리법으로 진행되어 번거롭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와 같은 요리 초보자들에게는 더더욱.



   사 온 음식에서 벗어나 집밥을 정말로 간단하게 요리해서 먹고 싶을 때 활용할 만한 책은 없을까 찾아보다 <초간단 일본식 집밥>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데치기, 볶기, 튀기기' 중 딱 한 가지 조리법만으로 맛있는 한 끼 식사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엔 저자가 요리 초보자도 용기 내어 도전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조리법을 추구하고, 요리하기 쉽게 조리 과정을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 책은 원재료의 특성에 따라 어떻게 요리하면 맛있는지, 어떻게 하면 간편한 방식으로도 맛있게 만들 수 있는지, 그 조리법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데치기' 챕터로 예를 들면 닭다리살은 풍미를 살리기 위해 닭육수 분말과 함께 물의 양을 적게 해서 데쳐 진한 맛을 내고, 닭가슴살을 데칠 때는 냄비로 하는 대신 간편하게 전자레인지를 활용해 촉촉한 식감을 살린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는 얇게 썰어 샤부샤부 방식으로 데치면 맛있다. 오징어를 데칠 땐 반만 익히면 식감도 부드럽고 활용도가 더 올라간다. 이렇게 데친 재료들은 냉장고에 보관해두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책에 실려있는 데치기, 볶기, 튀기기 조리법 중 이 '데치기' 파트가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건 내게 무척 매력적이다. 세 가지 조리법 중에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건강한 조리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채식을 지향하기에, 데친 소송채를 이용한 레시피들은 몹시 자주 애용할 것 같다.



   책 속 요리들을 다 살펴본 후 느낀 단점을 하나 꼽자면 몇몇 레시피에서 환경호르몬이 걱정되는 조리법이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이는 내가 건강한 조리법으로 융통성 있게 바꾸면 될 듯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 이와 더불어 단점은 아니지만 책 속의 레시피를 보다 보면 결과적으로 봤을 땐 두 가지 조리법으로 만든 요리들이 은근히 보인다. 가령 데치기 챕터에 있는 요리인 '데친 돼지고기와 셀러리 생강 볶음'이나 '데친 오징어와 쪽파를 넣은 부침개'는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볶거나 굽는 조리법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조리법으로 요리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뻔하잖나. 미리 데쳐놓은 돼지고기와 미리 데쳐 둔 오징어를 이용해서 만드는 요리니깐 그렇지! (하하핫-)


   한편 식재료를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게끔 안내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장점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풍미가 배어 나온 육수는 우동 쓰유나 수프, 조림에 쓰면 좋다. 돼지고기를 데친 육수를 이용해 고기 없이 돼지고기 풍미가 가득한 미소된장국을 끓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닭고기를 데친 육수는 '닭고기 육수 우동'처럼 우동 국물로 만들거나, '데친 닭고기와 푸른 채소 국밥'에 국물로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데친 닭고기를 식힌 후 떼어낸 굳은 지방은 볶음요리에 사용하면 좋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조리법이 간단할수록 소스나 식재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놓치지 않는다. 평소 집에서 통후추를 사용하며 향신료의 강한 매력에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저자도 '레시피가 간단할수록 향의 역할이 중요하다'라며 통후추 사용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어 반가웠다. 그와 더불어 저자가 수록해놓은 홈메이드 소스 레시피 덕에 집밥의 품격이 더욱 올라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처럼 <초간단 일본식 집밥>에는 쉬우면서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간편한 집밥 레시피와 자잘하면서도 유용한 요리 정보들로 가득하다. 일본 특유의 식재료는 몇몇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많이 쓰이지 않고, 대체로 2인분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서 접근성 또한 좋다. 내일 저녁엔 이 책에 나와 있는 레시피 중 하나를 골라서 저녁 식사로 완성시켜 봐야겠다. 책 초반에 저자가 충고하듯, 복잡한 과정의 요리는 하나의 조리법으로 하는 요리에 익숙해지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이번에 꼭 요리를 시작해보자'라는 저자의 격려처럼, 이번에는 요리에 취미를 꼭 붙여보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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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타 1~2 세트 - 전2권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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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는 첫 문장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인공지능을 가진 세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가졌지만 뇌 대신 특별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가진 6살 정도의 여자아이 '에리타'. 에리타를 지키기 위해 탄생된 인공지능 로봇 '가온'.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계이지만 한 사람의 인격을 그대로 복사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사고하는 '김가온'. 이들은 인간을 멸망시킨 기체화된 '포루딘'이 가득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그 시작점을 알기 위해선, 일단 에리타의 아버지 '에드먼' 박사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살아 있다고만 해서 그것을

존엄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영원히 잠들어 있을 원본과

순간을 경유하는 복제.

어떤 것이 그 존재를 대표한다 할 수 있을까.


- 에드먼 박사, <에리타> 1권, 233쪽 -


   시대와 장소가 특정되지 않은 지구. '제니어스 기계공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에드먼 박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사고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6살 된 딸아이 '에리타'가 뇌사가 되기까지 반년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사는 고뇌합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채 육체만 연명하는 게 과연 딸아이가 존재한다 할 수 있을까요?'

   에드먼은 딸이 깨어나지 못할 상황을 우려해 인격을 그대로 복사해 만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국 군인 출신의 여성 '김가온'을 알게 되며, 에드먼은 연구 끝에 김가온을 인공로봇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제니어스 기계공학 연구소는 어떤 상태의 육체든 세포 활동을 일정한 수치로 유지해 성장을 멈춘 채 반영구적 보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인 포루딘을 발명하게 되고, 에드먼 박사는 고민 끝에 에리타가 깨어날 때까지 포루딘에 보존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포루딘에는 큰 단점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사용을 시작한 포루딘 원액의 유효기간이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값비싼 포루딘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은 범죄 및 사회 갈등으로 불거졌고, 이는 곧 국제적인 사회 문제로 번져갑니다. 포루딘을 독점 생산하던 제니어스 연구소는 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무리하게 개량을 거듭했고, 그 결과 변종 포루딘이 유포되기에 이르죠. 기체화된 변종 포루딘의 독성으로 지구상의 인류는 멸망하고, 살아남은 생명체는 돌연변이 괴물로 변화하는 등 아포칼립스가 도래합니다.



   변종 포루딘의 위험성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에드먼 박사는 포루딘과 돌연변이 생명체를 얼마 동안은 견딜 수 있게 설계된 '쉘터'를 짓고 그곳에서 에리타의 보존을 위한 연구를 계속 이어갑니다. 에드먼은 척박한 환경과 한정된 자원 속에서 포루딘 원액의 영구 보존을 가능하게 할 장치 개발과 더불어 에리타를 지켜줄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기 위해 몸을 혹사하며 노력하고, 결국 둘 다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구하는 데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탓에 남은 포루딘 원액은 장기 하나 정도만 보존이 가능할 정도로 양이 너무 적었습니다. 에드먼 박사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고, 에리타의 정신과 육신 모두를 보존하기로 선택합니다. 에드먼은 에리타의 뇌만 적출해 포루딘에 보존하고, 에리타의 육신에는 에리타의 뇌를 완벽히 분석해 만든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계된 프로그램을 이식합니다.

   그런데 에리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퇴역군인 김가온에게 이식했던 기존의 인공지능 프로그램과는 다른,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6세 어린아이의 성장속도에 맞춰 프로그램 역시 같이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노화하는 육신에 맞춰 계속 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이 죽으면 정신 활동 역시 정지되는 것으로 죽음까지 그대로 재현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던 거죠.

   수년의 세월 동안 몸을 혹사한 탓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에드먼은 육신을 가진 에리타와 자신이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 가온과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가온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듭니다.


웃기는 일이야. 정신을 복제하는 건 가짜지만

육신을 복원하는 건 진짜라는 건가?

둘 다 원본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건데.


- 김가온, <에리타> 1권, 325쪽 -


'원본'이라는 것들을 싹 지워버리면,

그 자리를 누가 꿰차든

그게 곧 진짜가 되는 게 아니겠어?

더군다나 뭐라고 할 놈들도 하나 없으니 말이지.


- 김가온, <에리타> 2권, 34쪽 -


   육체는 없지만 사람의 뇌를 가진 존재와 육체는 있지만 인격이 복제된 뇌를 가진 채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있다면, 둘 중 어느 쪽을 '진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계의 몸에 특정한 인격을 완벽하게 복제한 존재를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에리타>에서 사람의 육체 속에 복제한 인격을 이식해 만든 인공지능을 가진 에리타는 원본의 뇌와 똑같이 어린 여자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합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땐 사람처럼 꿈 비슷한 걸 꾸곤 하죠. 더욱더 놀라운 건, 본인의 뇌가 복제된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진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금의 에리타 곁을 지켜주는 가온 역시 사람이 가질 법한 '애착'과 비슷한 행동을 이따금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워하며 일단은 그저 기계적 오류라고 단정 짓고 에드먼 박사가 맡긴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임무란 '에리타'를 지켜내는 것,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지구와 '에리타'를 구원해줄 초월자와 같은 외계인을 찾기 위해 우주 너머로 송신을 매일 시도하는 것이죠.



   어느 날 불의의 사건으로 가온은 반영구적이었던 포루딘 정화막 자동 충전 기능에 손상을 입고, 이로 인해 지금의 에리타를 포루딘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에리타와 미래의 에리타 중 진짜 에리타는 어느 쪽인지, 둘 중에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 고민의 기로에 서게 되지요.

   가온은 여러 사건을 거쳐 만나게 된 김가온을 두고 당신은 그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가진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며 김가온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꾸 흔들어 댑니다. 정작 가온 자신은 지금의 에리타를 향한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현상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말이죠. 어쨌든 가온이 도발하든 말든 김가온은 현재의 자신이 사람일 거란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의 에리타 역시 인간일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기에

내가 만들어낸 존재들의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도 완전히 알지 못하네.

그렇기에 자네가 말하는 오류가

오로지 자네에게서만 발현될 수 있는,

내가 예측하지 못한 가능성일 수도 있지.


그렇게 된 거라면...


난 그것이 오류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라고 생각하네.


- 에드먼 박사, <에리타> 2권, 73~75쪽 -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의 에리타는 자신을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 유사한 것을 표현하기 시작한 가온 역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죠. 그러다 2권의 끝자락에서, 가온은 에리타와 자기 존재의 의구심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의 에리타를 포루딘에 보존되고 있는 에리타의 그림자로만 봐야 할지 오리지널로 봐야 할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뒤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보았습니다. 누군가의 뇌를 그대로 복제한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결국 가지게 된다면 에드먼 박사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즉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입니다.

   육체만 가진 에리타가 포루딘 속 에리타가 가진 인격의 복사본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아빠와 가온, 그리고 김가온과의 추억을 만든 순간부터 더는 원본의 복사본으로서만 존재할 순 없는 거 아닐까요? 원본과 다른 추억을 가지게 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기 시작한 것일 테니까요. -작가 'd몬'의 전작 <데이빗>을 읽으면서도 떠올렸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 엄마 모니카를 향한 인조인간 데이빗의 마음이 너무나 진심이어서, 인간적인 특징을 확연히 가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에리타>는 d몬의 전작 <데이빗>과 비교해 설정이나 배경 면에서 좀 더 다채로워져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전작처럼 이야기 전개가 다소 단조롭게 흘러가는 건 좀 아쉬웠어요. 그래도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와 같은 철학적 주제에 관한 사색을 만화를 통해 시도해볼 수 있게 하는 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데이빗>, <에리타>에 이어 저자가 기획한 '사람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 될 <브랜든>이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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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다 에프 그래픽 컬렉션
루이스 트론헤임 지음, 위베르 슈비야르 그림, 이지수 옮김 / F(에프)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8월, 약혼자 '롤랑 모튀레'와 함께 프랑스 휴양지 어딘가로 휴가를 온 '파비엔느 기에르댕'은 엄청난 비극을 맞닥뜨린다. 휴양지에 막 도착하자마자 거센 바람에 날려온 철판에 롤랑의 목이 날아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고가 파비엔느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엔 따스한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한 파비엔느는 죽은 약혼자 곁을 맴돌며 추모하는 대신 그가 노트에 철두철미하게 짜놓은 휴가 일정을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한다. 약혼자의 시신이 법의학 부서로 향하고 있는 지금부터 당장, 혼자서.

   원형 경기장에서 투우를 관람하고, 전투기들이 멋지게 비행하는 공군 에어쇼에도 가보고, 벼룩시장을 들른 뒤 선상에서 하는 코믹한 창 경기를 관람하면서도, 파비엔느는 어느 것 하나 진심으로 즐기지 못한다. 시종일관 마치 감정이 없는 듯한 얼굴로, 그저 휴가 일정을 계속할 뿐이다. 그러면서 이젠 유품이 되어버린 롤랑의 여행용 캐리어를 계속 신경 쓴다. 늦은 밤 숙소 침대에 누워서도 롤랑의 가방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이 활기찬 휴양지에서 이방인인 그녀는 마치 삶에서조차 이방인이자 방관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이를 갖기로 약속하며 미래를 함께하길 꿈꿨던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파비엔느는 삶과 죽음,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으로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녀는 즐겁게 휴가를 즐기는 군중 속에서 겉돌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혼자가 남겨놓은 일정을 그저 묵묵히 계속 따른다. 그러던 중 여행 첫날에 마주쳤던 낯선 현지인 '파코'와의 계속되는 인연 속에서 어느덧 그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세상을, 한순간 멀어진 것처럼 느꼈지만 여전히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이 삶을, 서서히 부여잡기 시작한다. 표정을 잃었던 파비엔느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다시 자리 잡는다.



   그래픽노블 <머물다>를 읽는 동안 나는 파비엔느의 입장에서 모든 걸 느끼고 바라보려 애쓰며 '나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읽어나갔다. 파비엔느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고와 극명히 대조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여름의 휴양지와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생기 넘치는 사람들, 이 말도 안 되는 간극 속에서 나 또한 파비엔느처럼 번민했다. 지난날 비극을 마주했을 때 내 모습을 생각하며, 내가 겪고 있는 일에 상관없이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던 세상을 떠올렸다.


당신도 알겠지만, 바닷가로 휴가를 오는 목적은

무엇보다 행복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죠.

하지만 우리에게 그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결코 가늠할 수 없어요.


- 본서 35쪽 -


결정은 온전히 당신 몫이에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요!


- 본서 38쪽 -


   불행은 늘 그렇듯 예고편 하나 없이 찾아온다. 불행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방금 약혼자의 죽음을 지켜봤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곧바로 여행용 가방을 챙겨 들고 홀로 숙소를 찾아가고, 약혼자가 정해놓은 일정을 일단 따라가 보려고 하는 그녀가 매정해 보이기는커녕 몹시도 혼란스러울 그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되어 애처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도하면 잠깐은 놀랄지언정 당장은 눈물조차 나지 않는 법이다. 그 죽음을 진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일단은 지금 상태로 '머물며' 내가 본 게 무엇인지, 내게 닥친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봐야 하는 거니까.



건배!

어쩌다 마주쳤고, 앞으로 결코 볼 일 없는

두 이방인을 위해.


- 본서 110쪽 -


   약혼자가 짜놓은 여행 일정을 홀로 따라가며 이따금 울고, 때때로 하늘을 한참 바라보곤 하던 파비엔느가 비극을 서서히 극복하는 과정은 꽤 인상적이다. 대성통곡하며 슬픔에 잠기다 못해 비관에 빠진 대신, 어떻게 해서든 생생한 삶에 -겉도는 형태로라도- 이어져 있으려는 그녀의 의지는 단아한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가까웠던 이의 죽음에 대해 어쩜 저렇게 '대체적으로'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가 가진 성품이 부럽기도 했다.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에게 파코처럼 복수를 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케밥을 사다 주며 좋은 인연으로 만들어가는 파비엔느의 행동은 삶을 향한 그녀의 긍정적인 태도를 설명해주는 더없이 좋은 예다. 이는 약혼자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고 여전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장자가 말했듯 죽음은 삶과 마찬가지로 순환의 일부분이자 자연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장자처럼 부인이 죽었는데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까진 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세상을 -자연사든 사고사든- 떠났다고 해서 꼭 곡을 하며 슬퍼해야만 애도가 된다고 말할 순 없다. 떠난 이를 추모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건 살아있는 자의 선택이자 몫이다. 파비엔느처럼 롤랑과 함께하기로 했던 휴가 계획을 계속하며 그를 '진짜' 떠나보내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는 것 또한 추모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시간 동안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불행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파비엔느처럼 저렇게 의연하게 극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울고불고 난리 친다고 해서 바뀌지 않을 사실이란 걸 알면서도 울고불고 하는 내 모습에서 벗어나 이젠 좀 더 성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행을 마주할 때마다, 죽음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어쩌다 마주쳤고, 앞으로 계속 볼 일 많은 비극을 위해."라고 말하며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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