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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타 1~2 세트 - 전2권 ㅣ 사람 3부작
d몬 지음 / 푸른숲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는 첫 문장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인공지능을 가진 세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가졌지만 뇌 대신 특별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가진 6살 정도의 여자아이 '에리타'. 에리타를 지키기 위해 탄생된 인공지능 로봇 '가온'.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계이지만 한 사람의 인격을 그대로 복사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사고하는 '김가온'. 이들은 인간을 멸망시킨 기체화된 '포루딘'이 가득한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그 시작점을 알기 위해선, 일단 에리타의 아버지 '에드먼' 박사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살아 있다고만 해서 그것을
존엄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영원히 잠들어 있을 원본과
순간을 경유하는 복제.
어떤 것이 그 존재를 대표한다 할 수 있을까.
- 에드먼 박사, <에리타> 1권, 233쪽 -
시대와 장소가 특정되지 않은 지구. '제니어스 기계공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에드먼 박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사고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6살 된 딸아이 '에리타'가 뇌사가 되기까지 반년 정도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사는 고뇌합니다. '정신을 잃어버린 채 육체만 연명하는 게 과연 딸아이가 존재한다 할 수 있을까요?'
에드먼은 딸이 깨어나지 못할 상황을 우려해 인격을 그대로 복사해 만드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국 군인 출신의 여성 '김가온'을 알게 되며, 에드먼은 연구 끝에 김가온을 인공로봇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제니어스 기계공학 연구소는 어떤 상태의 육체든 세포 활동을 일정한 수치로 유지해 성장을 멈춘 채 반영구적 보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질인 포루딘을 발명하게 되고, 에드먼 박사는 고민 끝에 에리타가 깨어날 때까지 포루딘에 보존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포루딘에는 큰 단점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사용을 시작한 포루딘 원액의 유효기간이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값비싼 포루딘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은 범죄 및 사회 갈등으로 불거졌고, 이는 곧 국제적인 사회 문제로 번져갑니다. 포루딘을 독점 생산하던 제니어스 연구소는 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무리하게 개량을 거듭했고, 그 결과 변종 포루딘이 유포되기에 이르죠. 기체화된 변종 포루딘의 독성으로 지구상의 인류는 멸망하고, 살아남은 생명체는 돌연변이 괴물로 변화하는 등 아포칼립스가 도래합니다.

변종 포루딘의 위험성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에드먼 박사는 포루딘과 돌연변이 생명체를 얼마 동안은 견딜 수 있게 설계된 '쉘터'를 짓고 그곳에서 에리타의 보존을 위한 연구를 계속 이어갑니다. 에드먼은 척박한 환경과 한정된 자원 속에서 포루딘 원액의 영구 보존을 가능하게 할 장치 개발과 더불어 에리타를 지켜줄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기 위해 몸을 혹사하며 노력하고, 결국 둘 다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연구하는 데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탓에 남은 포루딘 원액은 장기 하나 정도만 보존이 가능할 정도로 양이 너무 적었습니다. 에드먼 박사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고, 에리타의 정신과 육신 모두를 보존하기로 선택합니다. 에드먼은 에리타의 뇌만 적출해 포루딘에 보존하고, 에리타의 육신에는 에리타의 뇌를 완벽히 분석해 만든 데이터를 바탕으로 설계된 프로그램을 이식합니다.
그런데 에리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퇴역군인 김가온에게 이식했던 기존의 인공지능 프로그램과는 다른,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6세 어린아이의 성장속도에 맞춰 프로그램 역시 같이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노화하는 육신에 맞춰 계속 변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이 죽으면 정신 활동 역시 정지되는 것으로 죽음까지 그대로 재현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던 거죠.
수년의 세월 동안 몸을 혹사한 탓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에드먼은 육신을 가진 에리타와 자신이 개발한 인공지능 로봇 가온과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가온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듭니다.
웃기는 일이야. 정신을 복제하는 건 가짜지만
육신을 복원하는 건 진짜라는 건가?
둘 다 원본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건데.
- 김가온, <에리타> 1권, 325쪽 -
'원본'이라는 것들을 싹 지워버리면,
그 자리를 누가 꿰차든
그게 곧 진짜가 되는 게 아니겠어?
더군다나 뭐라고 할 놈들도 하나 없으니 말이지.
- 김가온, <에리타> 2권, 34쪽 -
육체는 없지만 사람의 뇌를 가진 존재와 육체는 있지만 인격이 복제된 뇌를 가진 채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있다면, 둘 중 어느 쪽을 '진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계의 몸에 특정한 인격을 완벽하게 복제한 존재를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에리타>에서 사람의 육체 속에 복제한 인격을 이식해 만든 인공지능을 가진 에리타는 원본의 뇌와 똑같이 어린 여자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합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땐 사람처럼 꿈 비슷한 걸 꾸곤 하죠. 더욱더 놀라운 건, 본인의 뇌가 복제된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을 진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금의 에리타 곁을 지켜주는 가온 역시 사람이 가질 법한 '애착'과 비슷한 행동을 이따금 보이는데,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워하며 일단은 그저 기계적 오류라고 단정 짓고 에드먼 박사가 맡긴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임무란 '에리타'를 지켜내는 것,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지구와 '에리타'를 구원해줄 초월자와 같은 외계인을 찾기 위해 우주 너머로 송신을 매일 시도하는 것이죠.

어느 날 불의의 사건으로 가온은 반영구적이었던 포루딘 정화막 자동 충전 기능에 손상을 입고, 이로 인해 지금의 에리타를 포루딘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에리타와 미래의 에리타 중 진짜 에리타는 어느 쪽인지, 둘 중에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할지 고민의 기로에 서게 되지요.
가온은 여러 사건을 거쳐 만나게 된 김가온을 두고 당신은 그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가진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며 김가온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꾸 흔들어 댑니다. 정작 가온 자신은 지금의 에리타를 향한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현상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말이죠. 어쨌든 가온이 도발하든 말든 김가온은 현재의 자신이 사람일 거란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금의 에리타 역시 인간일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신이 아니기에
내가 만들어낸 존재들의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도 완전히 알지 못하네.
그렇기에 자네가 말하는 오류가
오로지 자네에게서만 발현될 수 있는,
내가 예측하지 못한 가능성일 수도 있지.
그렇게 된 거라면...
난 그것이 오류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라고 생각하네.
- 에드먼 박사, <에리타> 2권, 73~75쪽 -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의 에리타는 자신을 인간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 유사한 것을 표현하기 시작한 가온 역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죠. 그러다 2권의 끝자락에서, 가온은 에리타와 자기 존재의 의구심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책을 읽는 내내 지금의 에리타를 포루딘에 보존되고 있는 에리타의 그림자로만 봐야 할지 오리지널로 봐야 할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뒤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보았습니다. 누군가의 뇌를 그대로 복제한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결국 가지게 된다면 에드먼 박사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즉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입니다.
육체만 가진 에리타가 포루딘 속 에리타가 가진 인격의 복사본으로 시작했을지언정 아빠와 가온, 그리고 김가온과의 추억을 만든 순간부터 더는 원본의 복사본으로서만 존재할 순 없는 거 아닐까요? 원본과 다른 추억을 가지게 됨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기 시작한 것일 테니까요. -작가 'd몬'의 전작 <데이빗>을 읽으면서도 떠올렸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에서 엄마 모니카를 향한 인조인간 데이빗의 마음이 너무나 진심이어서, 인간적인 특징을 확연히 가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에리타>는 d몬의 전작 <데이빗>과 비교해 설정이나 배경 면에서 좀 더 다채로워져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전작처럼 이야기 전개가 다소 단조롭게 흘러가는 건 좀 아쉬웠어요. 그래도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와 같은 철학적 주제에 관한 사색을 만화를 통해 시도해볼 수 있게 하는 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데이빗>, <에리타>에 이어 저자가 기획한 '사람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 될 <브랜든>이 더욱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