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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수집가 ㅣ I LOVE 그림책
크빈트 부흐홀츠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12월
평점 :
서점에서 '미리 보기'로 그림을 본 순간 마음을 사로잡혀 한참을 바라보고 있던 그림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책을 읽었지요. <순간 수집가>라는 제목의 이 그림책은 차분하고 감성적인 어조의 글과 멋진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책 속에는 '하펜슈트라세'라는 섬에 살고 있는 '나'라는 소년과 화가 '막스 아저씨'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학교에서 곧잘 놀림을 받는 소년 '나'는 친구가 없는 탓인지 같은 주택에 사는 화가 '막스 아저씨'의 화실에서 오후를 보내곤 합니다. 아저씨는 햇볕이 따스했던 3월에 소년이 사는 주택의 5층으로 이사 왔고, 그 후 소년을 '예술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친구가 되었지요. 막스 아저씨가 작업실에서 소년을 신경 쓸 틈 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동안, 소년은 마룻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아저씨네에 있는 스케치북, 책, 지구의, 장기 등등의 물건들을 마음껏 누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소년은 빨간색 소파에 앉아 5층에 위치한 아저씨의 작업실에 들려오는 온갖 소리-저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윙윙거리는 환풍기 소리, 째깍거리는 벽시계 소리-와 더불어 막스 아저씨의 제도용 펜이 종이 위에서 쓱쓱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걸 좋아했어요. 책, 연필, 색색의 물감들이 놓여 있는 책상 위에서 아저씨가 뭘 그리는지 볼 순 없었지만, 소년은 막스 아저씨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그냥 참 좋았지요. 아저씨는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두워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면 소년의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가끔은 바이올린 소리만 가만히 듣곤 했어요.

아저씨는 자기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고, 완성된 그림들을 한쪽 벽에다 그림 뒷면이 겉으로 보이도록 주르르 기대어 놓았어요. 아무도 볼 수 없게요.
막스 아저씨는 집을 자주 비운 채 바닷가나 섬 안의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하거나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곤 했어요.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이 훌쩍 떠난 막스 아저씨는 불현듯 작업실에 돌아와 있곤 했지요. 여행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아저씨가 이따금 입을 열면 소년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어요.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굉장한 이야기여서 허무맹랑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어요. 막스 아저씨가 이 집에 산 지 일 년이 넘어 여름 방학이 시작될 무렵 즈음의 어느 날, 아저씨는 소년에게 꽤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며 집에 있는 화초와 우편함 관리를 부탁합니다.
소년은 막스 아저씨의 우편함에 도착한 편지를 발견하고는 챙긴 뒤 아저씨네로 갔어요. 소년은 식탁 위에 편지를 놓은 뒤, 약간의 망설임 끝에 화실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문을 엽니다. 놀랍게도 화실 안은 달라져 있었어요. 벽을 빙 둘러 늘어선 그림들이, 전부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죠! 그림들 앞엔 찢어낸 도화지에 쓴 쪽지가 한 장씩 놓여 있었고, 거기엔 막스 아저씨의 메모가 있었어요. 소년은 아저씨가 소년만을 위해 마련한 전시장에서 하나하나 천천히 공을 들여 그림을 감상합니다. 아니, 그림 속으로 '여행'합니다. 그날뿐만 아니라 그 후로 몇 주 동안 말이죠.
색깔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늘에서 내린 눈의 서늘한 파란색이나 아침 햇살을 받고 희미하게 빛나는 초원의 초록색, 밤중에 번쩍번쩍 빛나는 조명이 내뿜는 노란색, 이 모든 게 하나도 낯설지가 않았지요.
-본문에서-
소년만을 위한 전시회 속 그림들에는 그동안 아저씨가 소년에게 말했던 여행 이야기가 담겨있었어요. 아저씨가 캐나다에서 보았다는 신비한 눈코끼리, 하늘을 나는 서커스단 자동차와 같은 이야기들이 말이죠. 희한하면서도 환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 아저씨의 그림들은 몹시 세밀하게 표현되어 더 매력적이었어요. 일상으로 끼어든 기묘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순간이 하나도 낯설지 않게 섞여 있었죠. 말 그대로 '그 순간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될 하나의 이야기'가 그림들 속에 펼쳐져 있었어요. 나 또한 소년처럼 이 그림들을 한 번 보고 마는 것에 끝내지 않고, 며칠 동안 여러 번에 걸쳐 그림으로 들어가 찬찬히 느껴보았어요. 어느 해 정월 초하루 눈으로 덮인 새하얀 마당에서 거대해진 주사위를 두 손으로 굴러보고, 집보다 키가 훨씬 더 큰 거대한 선물을 대체 누가 보냈는지 궁금해서 까치발로 발신인을 찾아보려고 애쓰기도 했어요. 수수께끼 문이 즐비한 물 위의 어딘가에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상상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서 한참을 놀기도 했죠! 떠나간 서커스단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어릿광대의 손을 이끌고 초원을 가로질러 가기도 했답니다.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즐거웠지만, 그림 속의 한 장면에 완전히 몰입해서 내가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너무 좋았어요. 안 그래도 요즘의 나는, 일상 속 순간순간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그저 다 스치며 지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왠지 울적했거든요.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추억으로 남지요. 특히 너무 특별하고 소중한 순간들은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되기도 합니다. 소년이 막스 아저씨와 함께한 순간을 잊지 않고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의 톤은 어릴 적 수집한 특별한 순간들로 결정되는 걸지도 몰라요. 더구나 평범한 일상 속에 상상 한 스푼을 넣어 포착해낸 마법 같은 순간들을 그려내는 막스 아저씨 같은 사람과 인연이 닿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 소년의 삶의 빛깔을 바꾸고도 충분했을 테죠.
막스 아저씨와 소년의 이야기는 아직 더 남아 있어요. 내가 다 쓰지 않은 남은 이야기는 이 책을 직접 읽으며 만나보길 권해봅니다. 환상적인 순간을 담은 멋진 그림들과 함께 나처럼 어떤 순간에 온전히 푹 빠져있는 경험을 당신도 꼭 해보길 바라니까요. 막스 아저씨가 소년에게 건네는 말들 또한 하나같이 주옥같은데, 그림에 빗대어 말하는 아저씨의 삶에 대한 철학이 무척 멋지기에 이 또한 놓치기 않길 바라요. 비밀이 담긴 그림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발견할 당신만의 답이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