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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트림 물리학 - 수식 없이 읽는 여섯 가지 극한의 물리
옌보쥔 지음, 홍순도 옮김, 안종제 감수 / 그린북 / 2022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왜?'라는 물음표를 머릿속에 넣고 다니며 세상 만물에 호기심이 많았고, 별을 보는 걸 좋아했던 나는 학교에 다니게 되자 자연스레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주과학을 비롯해 지구과학, 화학 등에 말이다. 그중에는 당연히 물리학도 있었다. 하지만 수학적 계산에 약했던 나는 물리학을 포함해 수식과 공식이 많은 과학 과목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천문우주학 관련 진로와는 바이바이 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취향은 여전해서 우주 관련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최신 과학 뉴스나 물리 이론을 이따금 들여다보곤 한다. 하지만 글을 읽다가도 어려운 공식이나 수식이 나오면 살포시 넘어가버리곤 해서 이론을 일부만 맛보았다는 아쉬움이 남곤 한다.
'수식 없이 읽는 여섯 가지 극한의 물리'. <익스트림 물리학>이란 책 제목 아래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을 안 읽어볼 수가 없었다. 수식 없이 물리학을 제대로 접해볼 수 있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저자는 이론물리학의 핵심 지식을 수학적 모형을 최대한 배제해서 설명한다. 물리적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환경 수치 정보를 여섯 가지 극한으로 나누어 극쾌(the fastest), 극대(the largest), 극중(the most massive), 극소(the tiniest), 극열(the hottest), 극냉(the coldest)으로 분류한다. 1부에서 시작해 6부에 이르기까지 전체 내용은 총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극쾌 편에서는 '빛의 속도로 운동하면 무엇이 보일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상대성 원리와 광속 불변의 원리에 기반한 '특수상대성이론'을 1장에서 3장에 걸쳐 깊이 있게 살펴본다. 또한 빛처럼 빠른 이동속도를 목표로 인류가 교통수단의 속도를 높이려 노력하는 와중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공기역학'에 대해 알아본다. 3장 끄트머리엔 '슬링샷 효과'가 나오는데, 이는 영화 [마션 The Martian]에서 화성에 갇힌 주인공을 구출하기 위해 화성 탐사대 대원들이 연료 소비를 최소화하며 화성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찾으려 고심하다 생각해낸 바로 그 방법을 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이자 이 책에서 가장 즐겁게 읽은 파트인 2부 극대 편에 해당하는 4장~6장에서는 가장 큰 공간의 크기, 가장 긴 시간의 길이를 알아본다. 다시 말해 우주의 현재 상황을 바탕으로 우주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알아보고, 우주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또한 우주에 있는 여러 질량의 천체들 중 태양 질량의 0.07~29배 구간에 속한 항성들인 대질량 천체들의 운명에 관해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왜 가상의 물질인 '암흑물질'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해서 알아본 뒤, 천체 운동의 원인이 되는 중력과 만유인력 법칙에 대해서 살펴본다.
3부 극중 편에서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앞서 2부의 6장에서 중력에 대해 이미 알아봤지만, 이는 질량이 단일 천체에 미치는 영향 위주였고, 이 3부에서는 만유인력 법칙만으론 설명이 다 안 되는 천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깊이 살펴본다. 3부의 시작인 7장에서는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인 등가원리를 바탕으로 중력이란 '실재하는 힘이 아니라 운동을 가속하는 효과이며, 시공간의 휘어짐'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본다. 또한 8장에선 수성의 세차운동, 중력렌즈 현상, 중력파 등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하고 응용한 여러 이론들에 대해서도 알아보는데, 일반상대성이론을 응용한 개념인 '워프 항법'이 이 책에도 나와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선 일반상대성이론과 절대 뗄 수 없는 블랙홀에 대해서 알아본다. 여담이지만 다른 물리학 분야와 거의 겹치는 부분이 없으며 우주학의 근간이 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다루기 위해 저자가 특별히 추가한 부분이 바로 이 극중 편이라고 한다.
4부 극소 편에서는 미시적 세계에 대해 원자물리학과 양자역학, 핵물리학, 그리고 입자물리학을 바탕으로 10장에서 14장까지, 총 다섯 장에 걸쳐 탐구해본다. 여섯 가지 파트 중 가장 많은 양을 자랑하고 있는 파트이다(내용도 내용이지만 양 때문에 읽기가 고된 파트였다...). 오늘날까지도 만물의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 그 최소 구성단위는 완전히 다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미시적 세계의 비밀은 지금도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며, 그 과정에서 나온 원자, 전자, 원자핵, 중성자, 양성자, 쿼크 등 여러 개념과 이론들이 이 4부에서 다뤄진다. 11장 양자역학에선 그 유명한 코펜하겐 해석과 슈뢰딩거 방정식, 아인슈타인의 EPR 역설이 등장한다. 덕분에 내 뇌가 -간만에 또 만났다고- 비명을 질러 오감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준 파트이기도 하다.
5부 극열 편에서는 실재하는 물리계에 더 가까운 다입자계, 즉 앙상블(아주 많은 입자가 집합된 계)이 온도 상승에 따라 어떤 물리적 변화를 보이는지 알아본다. 5부의 시작인 15장에서는 가시적·경험적인 현상을 통해 물리법칙을 찾아내는 '열역학'과 소립자의 특성을 바탕으로 미시적 현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는 '통계역학', 그리고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16장에는 중학생 때 배운 물질의 상전이 현상을 비롯해 플라스마, 레이저로 물질을 초고온 상태를 만드는 법과 냉각하는 방법, 빅뱅 초기의 우주 급팽창 등 온도에 따라 물질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해 나온다. 끝으로 17장에서는 엔트로피가 매우 높은 상태, 즉 극히 무질서한 상태를 일컫는 '복잡계'에 대해 살펴본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SF 소설 <삼체>로 단어를 처음 접했던 삼체 문제와 난류 문제, 나비효과 현상으로 알려진 카오스 시스템이 등장한다.
6부 극냉 편에서는 물질이 절대 0도에 가까워지면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해 알아본다. 저온에서 물질은 고체나 액체로 존재하지만 보통은 고체로 존재하기에 이에 관해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18장 '재료물리학'에서는 고체가 가시적 측면에서 가지는 여러 가지 성질-역학적 성질이나 열적 성질, 전기적 속성과 자기적 특성-에 관해 설명한다. 19장 '고체물리학'에서는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한 미시적인 측면을 기반으로 고체가 가지는 여러 성질을 분석한다. 18장의 '재료의 전기적 속성'에서 만나보았던 도체, 절연체, 반도체를 이 19장에서 에너지띠 이론을 바탕으로 다시 살펴본 점이 흥미로웠다. 마지막 20장 '응집물질물리학'은 처음 들어보는 분야였는데, 많이 들어 익숙한 초전도 현상과 위상물질, 양자컴퓨팅을 비롯해 이 책으로 처음 접한 보스-아인슈타인 응축 물질, 양자 홀 효과 등 여러 이론들이 등장한다.

여기까지 나름 간단(!)하게 정리하기 위해 책을 다시 열심히 펼쳐보았다. 그러면서 앞서 책을 일독하며 이해가 안 갔던 부분들을 중간중간 또 읽어보았는데, 처음보단 확실히 이해가 되는 개념도 있고 여전히 이해가 잘 안 가는 개념도 있다. 실은 후자가 더 많다(쿨럭).
책을 읽으며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은 두 번 더 읽어봐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 넘어가곤 했다. 시험공부를 위해서 읽는 게 아니라 순수한 앎을 위한 독서이니 스트레스 받지 말자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책 후반부에 이르자 세 번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이론들이 조금씩 쌓여 갔고, 죄책감 아닌 죄책감도 은근히 같이 쌓여 갔다. 하지만 맺음말에 이르러 저자가 해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 자신을 토닥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73명의 위대한 과학자, 47가지 물리학 원리와 정리, 25개의 물리 실험과 사고실험, 44가지 물리학 이론과 541개의 물리학·수학 개념이 등장한다. (중략) 이 책은 여러분이 물리학에 흥미를 가지는 시작점이 되어야지, 물리학 공부의 종착지가 돼서는 안 된다.
- 본서 맺음말에서
그렇다면 나는 저자의 기대에 부흥한 독자이지 않을까. 적어도 학생 때는 손사래를 쳤던 물리에 흥미가 좀 생겼으니 말이다. 내가 직접 말로 설명하려면 늘 알쏭달쏭했던 도플러 효과를 이렇게 알기 쉽게 명확한 단어로 설명해준 선생님은 이 책의 저자가 처음이다. 그래서 나처럼 중·고등학교 시절 물리에 학을 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더더욱 추천한다.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평소 이해가 가지 않던 물리학 용어들이 이해되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물리학 개론서 한 권을 다 읽은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든다. 책 중간중간 공식과 그래프, 수학적 개념이 나오는데, 기본적인 개념 설명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로써 등장한다. 뭐 적어도 길고 긴 복잡한 수식은 안 나오니 책의 부제를 지키긴 지킨 셈인가? 하지만 공식이나 수학적 개념이 나올 때마다 배신감이 들긴 했다. 그래도 이해를 돕는 그림들이 훨씬 더 많이 등장하니 책 속에 나온 모든 공식을 다 용서하는 바이다(푸힛). 보통 이런 과학 이론서는 책 끄트머리에 색인이 있곤 하는데 이 책은 색인이 없어서 살짝 놀랐다. 그리고 오자들을 여럿 발견했는데 이를 보완하면 좀 더 완벽한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