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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위대한 스캔들 - 세상을 뒤흔든 발칙한 그림들 50, 마사초에서 딕스까지
제라르 드니조 지음, 유예진 옮김 / 미술문화 / 2022년 8월
평점 :
스캔들(scandal).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일단 인상부터 찌푸리게 되지만, 미술의 영역에서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미술계에서의 스캔들은 작품의 가치가 올라감과 동시에 작가의 명성이 드높아지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캔들은 무질서를 질서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이때의 질서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 질서다.
새로운 질서는 모든 논리로부터 자유로우며,
조롱과 모순, 기괴함과 참신함을 혼합하고,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 피에르 카반, <예술 스캔들> (본서 17쪽)
프랑스 작가 제라르 드니조가 이 '스캔들'에 주목하여 제작한 책 <미술의 위대한 스캔들>. 저자는 마사초의 1426년작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에서 시작하여 오토 딕스가 1932년에 선보인 <전쟁>까지, 즉 15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던 회화 작품 중 50점을 골라 되짚어본다.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나 펠리시앙 롭스의 [창부 정치](1878),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1800)와 같이 스캔들을 일으켰다고 익히 들은 유명한 회화 작품들을 비롯해,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1857)처럼 "아니 이 작품이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다고?" 싶은 작품도 꽤 되어서, 작품별로 스캔들의 이유를 알아가는 재미가 무척 쏠쏠했던 책이다.

저자는 먼저 책의 서문에서 스캔들의 의미와 미술 스캔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캔들의 발생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는 바로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주제와 기법이다. 스캔들의 방식 또한 무척 다양한데 그중 여성의 나체, 폭력성, 여성 동성애, 민중을 주제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또한 시대 배경에 따라 스캔들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종교처럼 과거엔 막강했던 분노의 주체가 그 힘을 잃고 침묵하게 되기도 한다.
종교계 인사들과 아카데미, 언론, 권력자들은 본인들의 특권을 풍자하거나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 싶으면, 혹은 단지 낯설고 새롭다는 이유로 조롱과 혹평을 쏟아내고 도덕성을 운운하며 새로움을 선사하는 작품을 깎아내리기 바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몰이해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느라 자신들이 얼마나 편협하며 우둔한 짓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작품에 진정성을 담으면 때로 그것은 시위를 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화가는 자신이 받은 인상을 그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기만을 선택했을 뿐이다."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를 향한 비난에 맞서며
"흰색의 교향곡이 아니라니··· 원피스는 누렇고··· 머리는 적갈색이라나.
그렇다면 바장조 교향곡에는 다른 음은 전혀 없고 오로지 파, 파, 파, 이렇게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바보 얼간이 같으니!"
- 제임스 맥닐 휘슬러, [흰색의 교향곡 1번, 하얀 소녀]를 향한 공격적인 기사를 읽고 짜증을 표출하며
"고상할 수 없고, 위선적일 수 없고, 나는 롭스다."
- 펠리시앙 롭스, [창부 정치]를 향한 비방에 당당히 응수하며
평단과 언론, 대중의 몰이해에 맞서 화가들이 보인 반응들은 실로 다양하다. [흰색의 교향곡 1번, 하얀 소녀](1862)의 전시를 거절하는 아카데미의 반응에 이 작품을 그린 휘슬러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또한 미래주의 화가들은 이전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스캔들을 선전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대중의 분개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되려 그런 반응이 나오도록 도발했다.
하지만 이렇게 스캔들을 즐긴 화가들보다는 스캔들로 인해 괴로움을 겪은 화가들이 대체적으로 더 많았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1536-41)은 여러 교황으로부터 계속해서 비난 받은 끝에 미켈란젤로 사후 그의 제자가 작품 일부를 수정해야 했으며, 베로네세는 비난 속에 열린 종교 재판소의 판결로 작품 제목을 [최후의 만찬]에서 [레비 가의 향연]으로 변경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비너스와 프시케](1864)나 앙리 제르벡스의 [롤라](1878) 등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그림들도 있다.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no.2](1912)는 작품의 소재나 기법 때문이 아닌 제목이 도발적이라는 이유로 '앵데팡당전'에 거부되었고, 이는 뒤샹에게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아일라우 전투의 나폴레옹](1807-08)을 그린 앙투안 장 그로는 초기의 긍정적인 평가에서 돌변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비난의 뭇매를 맞았고, 도덕적·예술적 혼란에 괴로워하다 센강에 투신하여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분할주의와 점묘법의 창시자인 조르주 쇠라조차 스캔들에서 안전하지 못했는데, 그의 작품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6)는 1886년 5월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 전시된 후 "이집트 환상곡", "잘못 만든 마네킹"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한편 누드의 백인 여자와 옷을 입은 채 그 곁에 있는 흑인 여자라는 동일한 조합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863)와 펠릭스 발로통의 [백인 여자와 흑인 여자](1913)는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화가의 의도가 다르기에 두 작품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며, 그래서 스캔들의 이유도 다르다. [올랭피아]는 외설스러운 매춘부를 그린 타락한 그림이라는 비난을, [백인 여자와 흑인 여자]는 내밀한 분위기에 있는 두 여성이 동성애를 암시하는 듯 모호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화가가 추구한 것과는 동떨어진 의도를 들먹이며 예술가를 괴롭히는 종교인과 평론가, 기자들, 대중을 보며 그들이 일으킨 여러 스캔들의 어이없는 이유 때문에 이따금 실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악의적인 평론들이 있었던 반면, 소수이긴 하지만 호의적인 지지자들의 응원 역시 있었던 덕에 비난을 받는 화가들이 그나마 작품 활동에 전념할 힘을 얻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살롱전이나 여타 전시회에서 거부되어 스캔들을 일으키거나 제작 당시에 스캔들을 터뜨렸던 그림만 조명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1866년작 [잠]은 개인 소장품으로 존재하다가 20세기가 되어서야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기에 적어도 화가 생전엔 비난받지 않았다. 부유했던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자신의 아파트 안에서 그린 [소파 위의 누드](1882)를 그린 후 평단과 대중에게 그림을 굳이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스캔들을 모면했다. 브뤼셀의 '20인전'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제임스 앙소르의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1888)은 스캔들을 일으킬 요소를 충분히 갖고 있었음에도 전시회가 개최되는 순간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 화가가 출품을 포기함으로써 스캔들을 모면한다(푸하핫-). 뒤 누이의 [백인 노예](1888)는 스캔들을 일으킬만한 소재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오히려 이 작품이 공개된 당시엔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후대 평론가로부터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저자는 스캔들이 발생한 당시 시대적 상황과 전개 양상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하며 나를 -현재의 시각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화가가 마주한 현실로 데려가 주었다. 지금 나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았을 때 느껴지고 읽어지는 것과 살롱전에 전시되었을 때 평단과 대중이 느끼고 읽어냈던 것의 간극, 저자는 이 간극의 존재를 짚어주며 당시 평단과 대중은 왜 그렇게 그 그림을 혐오하고 멸시했는지 설명한다. 또한 저자는 그림을 구석구석 확대해서 설명을 덧붙이고, 관련 사실을 인용해놓으며 독자로 하여금 그림을 심층적으로 해석해볼 기회를 가지게 한다. 이는 내가 이 책을 더욱 괜찮게 느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실제로 경찰과 정부, 상인이 대중은 무관심을 보인 작품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면 예술 스캔들은 니체의 신과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설사 죽음이 아니더라도 스캔들은 그것을 정의하던 위배를 반복함으로써 결국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로 전락했다.
- 본서 221쪽
저자는 맺음말에서 대중의 무관심으로 인해 현재 "스캔들은 죽었다"라고 말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느껴진다. 예술가와 에이전시, 대형 갤러리, 큐레이터, 아트딜러 등 미술계 주체들이 짜고치는 스캔들로 작품값 올리기에 혈안이 된 현대의 미술계를 생각하면 그들을 향한 대중의 무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과거의 예술가들이 본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스캔들로 곤혹을 치르렀다면, 현대의 예술가들은 제대로 된 스캔들을 못 만들어서 곤혹을 느낀다. 저자도 이를 짚고 있듯 미술 스캔들이 힘을 잃은 현재의 이 상황은 스스로 무덤을 판 예술가들의 자업자득일 테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주프랑스 터키 대사 '칼릴 베이'라는 사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쿠르베에게 [세상의 기원](1860)과 [잠]을 의뢰하고, 앵그르의 [터키탕](1862)을 구입한 이 사람 말이다. 세 작품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여성의 신체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고 그림의 분위기가 무척 에로틱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자였던 쿠르베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칼릴 베이의 요구를 잘 들어주었다. 책에 실린 [세상의 기원]을 보고 있노라니 쿠르베의 한결같은 신념이 너무 지나치게 굳건했음이 괜히 원망스럽다. 아닌가. 원망 대신 호색가의 기호 덕분에 이와 같은 -적나라한- 명작이 탄생하였음에 기뻐해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