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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미술 - 신과 여신, 자연을 숭배하는 자들을 위한 시각 자료집
이선 도일 화이트 지음, 서경주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3월
평점 :
오른손엔 물그릇을 들고 다른 손엔 월계수 가지를 든 채 트랜스 상태에 있는 델포이의 여사제 피티아의 표정에 이끌려, 홀린 듯이 읽기 시작한 <이교도 미술>. 부제 '신과 여신, 자연을 숭배하는 자들의 시각 자료집'이 말해주듯 이 책에는 기독교 이전과 이후의 다신교적 우주관을 지닌 이교도들을 비롯해 신화와 전설에 관한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한가득 들어 있다.
<이교도 미술>은 '신과 여신, 신화와 전설, 신성한 자연'으로 이루어진 1부 고대의 관습, '성스러운 장소, 마법, 신탁과 점술'로 나눠진 2부 종교적 의식, '축제, 체현된 신앙, 여행'으로 나눠진 3부 공동체, 이렇게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위카, 드루이드교, 히든, 산테리아, 부두교 등 다양한 이교도 신앙이 담겨 있는 <이교도 미술>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신비로운 상징물과 매력적인 작품들이 반겨줘서 모든 파트에서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 중에서 특히 내 흥미를 끌었던 건 '마법'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독교 이전 시대의 고전적 도상圖像은 유럽 기독교도들이 가진 마녀에 대한 인식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은 마녀를 마귀와 연관시킴으로써 마법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근대 초기까지 대부분의 유럽 기독교도들은 마녀가 광범위한 반기독교적 음모 세력의 일부라고 믿었다. (···)
마녀재판은 18세기에 들어와 사회의 교육받은 계층에서 회의론이 일자 대부분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악인이라는 마녀에 대한 공포는 근대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사탄이라는 강력한 과시적 요소 없이도 20세기 초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
많은 공동체에서 생소하게 여겨졌던 '착한 마녀'의 개념은 20세기 이후부터 점차 뚜렷해졌다. 신자들이 자신들을 공공연히 '마녀'라고 부르는 현대 이교도 신앙 위카가 등장한 덕분이다.
- 본서 140~141쪽
여러 면에서 '마녀'라는 용어의 재정의는 현대 이교도들이 '이교도'라는 용어를 재사용하는 것과 닮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수백 년 동안 부정적 함의로 쓰이던 어휘를 차용하여 기독교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다.
- 본서 148쪽
'페이건 pagan', 즉 이교도라는 개념은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교도라는 단어는 소멸된 기독교 이전의 전통과 현대 페이거니즘 종교, 혹은 현존하는 비아브라함계 전통 종교를 모두 포함한다(그래서 이교도라는 단어보다는 '전통 종교'로 순화해서 말하는 게 합당하다). 기독교로 대변되는 아브라함계 종교는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선 전쟁도 불사할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건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우상 숭배, 즉 물질계를 인정하는 전통 종교를 향한 박해는 잔인하리만큼 집요했다. 기독교는 뿔 달린 신을 사탄으로 몰고, 무고한 여성들을 마녀라고 우기며 대략 6만 명이나 처형시키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 안타깝게 희생된 이 사람 중 대다수는 -19세기와 20세기 초 몇몇 학자들과 민속학자 마거릿 머레이가 시사했듯- 기독교 이전 전통 종교와 관련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기독교의 이런 행태로 인해 상징이 와전되거나 말살된 전통 종교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인도의 힌두교나 일본의 신도처럼 기독교가 완전히 근절하지 못한 전통 종교가 전 세계에 꽤 된다. 저자는 책 속에서 현대의 다양한 이교도 신앙은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의 기독교 이전 신앙을 부활시켜 오늘날에 맞게 변용하려고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오래된 기록을 토대로 기독교 이전에 존재했던 전통 종교의 명맥을 이어 가려고 하는 전 세계의 다양한 현대 이교도들을 보며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건, 내가 단지 비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라 인류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부정적 함의를 가진 용어인 '페이건'을 재사용함으로써 기독교를 향해 날 선 의지를 드러내는 그들의 마음이 백번 이해가 가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이리라.

책을 읽다 보면 허버트 드레이퍼의 멋진 작품인 [이카로스를 위한 애도]를 비롯해 페테르 파울 루벤스, 로렌스 앨마 태디마,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 작은 크기로 딱 한 작품밖에 못 봐서 아쉬웠던 알폰스 무하, 환상화로 유명한 주세페 아르침볼도 등등 다양한 작가들의 멋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작품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이다. 신화와 전설에서 따온 이미지를 많이 그렸던 워터하우스의 아름다우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 덕분에, 책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가 3부의 '체현된 신앙'에서 보았던 그리스·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충격과 공포의 날개 달린 남근 모양 청동 부적이 아니라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요정들] 속 아름다운 요정들이었던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단순히 시각 자료집인 줄 알고 접근했던 <이교도 미술>이건만, 매력적인 이미지들 못지않게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다양한 전통 종교의 신념 및 세계관, 실천 방식 및 종교의식을 생각보다 밀도 있게 다루고 있어서 이들 종교가 가진 다양한 차이점뿐만 아니라 꽤 많은 공통점을 알아갈 수 있었다. 책 속에서 한국은 딱 두 번 언급되는데, 그 두 번마저도 모두 한국 무당에 관한 짧은 언급이었다. 틈만 나면 등장하는 일본과 인도의 전통 종교와 신화 및 전설에 비해 한국의 그것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점이 좀 아쉬움으로 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