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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ㅣ 에프 그래픽 컬렉션
엘린 브로쉬 맥켄나 지음, 라몬 K. 페레즈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인의 부모님은 제인이 어렸을 적 바다에서 일하다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제인은 이모의 집에서 지냈지만, 얹혀사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기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인은 없는 듯 지내는 법을 배웠다. 이모의 집이든 학교든 그 어디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제인의 유일한 낙은 본 것을 떠올려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고, 이 재능으로 이곳을 탈출하는 것만이 당장 생각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제인은 일을 찾았고, 될 때마다 고기잡이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며 돈을 번 후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처럼 원래부터 없었던 듯 이모의 집을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예술학교를 다니며 자유롭게 미술을 공부하고팠던 제인은 장학금을 유지하려면 일주일 안에 일자리를 찾아오라는 예술학교 측의 요구에 급하게 일자리를 찾게 된다. 오빗 사의 구인 광고를 보고 높은 급료 때문에 무슨 직종인진 모르지만 일단 지원한 제인은 이력서를 들고 회사에 가자마자 제인의 이력이 깨끗하다며 채용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일할 곳의 주소를 이메일로 받고 다음날 찾아간 제인은 그곳이 미스터리한 사업가인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집이며, 자신이 하게 될 일이 다름 아닌 보모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제인은 로체스터의 어린 딸 아델로부터 성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을 안내받다가 죽은 아내의 사진들로 가득 찬 집안을 보며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거기다 3층에는 절대 가면 안 되며, 만약에라도 갔다가는 해고될 것이라며 그렇게 해고된 보모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을 아델로부터 듣는다.
기묘한 느낌을 주는 로체스터의 집에서 제대로 일 한 지 하루 만에 심적으로 지쳐버린 제인은 이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무덤 같은 저택에서 외톨이처럼 지내는 아델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아델의 불행한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고집을 피우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로체스터와 드디어 대면하게 되고, 로체스터의 매부인 리처드 메이슨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제인의 아델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알게 된 로체스터는 점점 제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 로체스터에게 제인 역시 호감을 가지다가도 로체스터의 알 수 없는 행동들에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그와 동시에 로체스터 저택의 비밀에도 한 걸음씩 점점 다가가게 되는데...

위의 이야기는 샬롯 브론테의 명작 <제인 에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그래픽 노블 <제인>의 줄거리이다.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원작을 본 지 오래된 <제인 에어>였던 데다 그래픽 노블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이 <제인>을 읽은 뒤 원작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어보게 되었다. 원작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제인 에어는 영화나 여러 매체를 통해 계속 접해왔기에 원작과 비교하며 읽는 데는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그래픽 노블 <제인>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느낀 건, 장면 전환이 무척 감각적이란 점이었다. 마치 영화처럼 말이다. 이야기 흐름이 콘티처럼 펼쳐져서,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전에 읽었던 그래픽 노블 <인어 소녀>처럼 회화가 가진 아름다움을 주로 강조한 그래픽 노블과는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고,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글쓴이가 '엘린 브로쉬 맥켄나'였는데, 알고 보니 맥켄나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극본과 '굿모닝 에브리원',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등 흥행 성적이 좋았던 여러 영화 극본을 썼고 연극도 각색한 베테랑 작가였다. 이 베테랑 작가와 그림 실력이 출중한 '라몬 K. 페레즈'가 만났으니 이렇게 영화 같은 멋진 그래픽 노블이 나왔을 수밖에.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에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다르게 '한 여성의 자주적인 성장 소설로는 그다지 안 느껴진다'라고 느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이 <제인>에서는 내가 원작을 읽으며 그렇게 느꼈을 법한 이유들을 조금 상쇄시켜주는 설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작에서 로체스터는 아내인 버사를 골방에 감금한 채 해외를 돌아다니며 집에서 거의 지내지 않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캐릭터였는데, <제인>에서는 해외 업무 때문에 집에 거의 있지 않는 것으로 각색을 했다. 또한 로체스터는 원작에서 제인과 중혼을 시도하는 파렴치한 인간이지만, 이 책에서는 -적어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제인과 결혼까지 시도하진 않는다. 그리고 원작에선 로체스터의 아내가 -정말 정신병이 생겨서 감금당한 것인지, 아니면 로체스터의 술수에 휘말려 10년 넘게 감금생활을 하며 정신병을 얻은 것인지, 하여튼- 정신병 때문에 골방에 감금당한 채 지내고 있는 것을 <제인>에서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혼수상태인 채로 누워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거기다 로체스터의 딸인 아델이 원작에서는 정부의 딸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의 딸인 걸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원작과 다른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제인 에어가 그저 가정교사가 아닌 화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이고, 미술학교를 다니기 위해 구해야 했던 일자리 때문에 로체스터 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원작이나 이 그래픽 노블이나 위압적이고 이기적이며 자식에게 애정도 없는 나이 많은 로체스터에게 -대체 왜 빠져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결국 빠져드는 제인 에어라는 설정은 그대로다. 뭐 이 로맨스가 원작의 큰 중심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니, 이 설정은 결코 바꿀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제인>은 원작과 비교해 곁가지를 많이 쳐낸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멋진 그림과 영화처럼 펼쳐지는 이야기 전개는 이 책을 손에 든 순간부터 다 읽을 때까지 절대 덮을 수 없게 만든다. 이 그래픽 노블을 만든 두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책 초반 몇 장만 읽어도 느낄 수 있다. 함축된 짧은 문장과 거친 바다 및 공허함이 가득한 무채색의 그림 몇 장만으로도 제인이 얼마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잘 와닿게 설명해내는 걸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습도 때문에 곧잘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이 여름에, 눅눅한 불쾌함도 잊은 채 푹 빠져 읽을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을 만나서 무척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