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지음, 제프리 앨런 러브 그림, 김영옥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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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혹은 신화를 향한 호기심은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부터 시작된다. 엊그제 읽어본 <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의 저자인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또한 아이슬란드에서 야영을 하며 느꼈던 경이로움을 통해 북유럽 신화에 빠져들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가 바이킹족에게 퍼지기 전 그들이 숭배했던 다양한 만물의 신들이 북유럽 신화의 토대가 되었고, 그 시작은 아마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령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어마어마한 천둥과 우렛소리로 많은 사람들이 종일 놀랐던 어느 날, 두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아빠는 이렇게 운을 떼었겠지. "그거 아니? 토르와 흐룽그니르가 대결한 날에도 이렇게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천둥이 쳤었단다. 이 둘이 어떻게 대결을 하게 되었느냐면 말이지..."


미드가르드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토르가 아스가르드를 떠나 싸움터로 향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토르의 천둥이 지평선 전체를 빙빙 돌고 돌다가 낮은 북소리가 한참 동안 둥둥둥 울려 퍼졌다. 경고였다! 곧 미드가르드의 모든 인간들은 두개골 속을 파고드는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에 비명을 질렀다. 그날 이후, 인간들은 그런 폭풍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서로 이야기했다.


[본서 162쪽]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신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온화한 발데르를 죽게 만든 로키가 고문을 받으며 치는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일 테다(218쪽). 신화는 이렇게 자연 속에서 울고 웃으며 견뎌온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이야기가 아닐까. 이러한 옛 신화들에 자꾸만 호기심이 가는 현재의 우리들 또한 자연스러운 본능에 이끌리는 것일 테고. 북유럽 신화의 거장으로 알려진 케빈 크로슬리-홀랜드가 전 연령대를 아우를만큼 쉽게 개작하면서도 극적인 재미 역시 놓치지 않은 <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는 글과 한 몸처럼 어우러져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멋진 일러스트에 압도당해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이었다.



   이 책은 스웨덴의 왕 귈피가 게피온이라는 여신에게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는 아스가르드 왕국과 신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 싶어 발할라로 떠나는 것으로부터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전사의 신(에시르)'과 '초록과 황금의 신(바니르)'의 힘겨루기 싸움 끝에 폐허가 된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 서리거인 티아시와 모사꾼 로키가 청춘의 황금 사과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이야기, 오딘과 로키와 -다리가 긴- 호니르가 실수로 죽인 오트르의 목숨값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마지막 장엔 이 책의 시작에 나왔던 스웨덴의 왕 귈피가 노인이 되어 다시 발할라로 떠나 이 세계의 끝과 시작을 가져다주는 전쟁, '라그나로크'를 전해 듣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온갖 책략으로 거인과 인간들을 농락하고, 서로의 권능에 대해 힘겨루기 하는 걸 쉬지 않는 아스가르드의 주신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삶은 하루도 따분할 틈이 없어 보인다. 긴 겨울의 지루함을 참지 못한 오딘으로 인해 벌어지는 토르와 흐룽그니르의 대결, 토르와 로키의 쓸데없는 우트가르드 원정,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신을 싫어하는 거인 휘미르에게 스스럼없이 힘자랑을 하다 정체를 들키는 토르 등. 북유럽 신들이 일으키는 해프닝을 보고 있으면 너무 재밌어서 웃음이 난다. 스스로를 증명하고 더 큰 명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신이라고 별 거 있나? 이렇게나 우스꽝스럽고 미련한 존재에 지나지 않은데 말야.'



   어렸을 땐 북유럽 신화의 신들 중 오딘을 가장 좋아했다. 최고신이라는 오딘의 지위와 지식을 향한 욕망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북유럽 신화를 다시 읽어보니 이 신화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로키라고 느껴졌다. 한마디로는 절대 정의 내릴 수 없는, 우리의 매력덩어리 '모사꾼' 로키. 재치와 독설뿐만 아니라 교활함까지 겸비한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증오하고 경멸하면서도 그들의 매력을 쉬 물리치지 못해 함께 여행 다니길 즐긴다. (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가! 아우 멋져) 로키가 여자 거인 앙그르보다 사이에 낳은 세 자식이자 괴물들인 요르문간드, 헬, 펜리르를 다른 신들이 본인 몰래 처리해버렸다는 걸 알았음에도 말이다. 로키는 신들을 골탕 먹이고 비아냥대길 무척 좋아하지만, 신들을 곤경에서 자주 구해준다. 하지만 거인의 자식이라는 숙명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 선함은 악함에 잠식되어버리고, 급기야는 이 세계에 '라그나로크'를 가져오기에 이른다. 참으로 미우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몹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껴진달까. (그리고 마블 스튜디오 영화 속 로키 역의 톰 히들스턴이 너무나 멋졌다는 점 역시... 현재 내가 로키를 꼽게 된 것에 어느 정도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쿨럭.)


   밤이 점점 길어지고 공기가 쌀쌀해져 가는 요즘. 뜨끈한 이불 속이 자꾸만 생각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기나긴 밤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엎드려 따뜻한 고구마 한 입을 딱 베어 물었을 때, 다른 한 손으로 넘기고 있을 만한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적당하지 않을까. 뛰어난 이야기꾼인 케빈 크로슬리-홀랜드가 들려주는 이 무시무시하고도 재밌는 북유럽 신화 이야기가. 북유럽 신화를 시원시원한 그림과 함께 극적이고도 감각적으로 잘 구성한 책을 만나서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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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연대기 -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과 위대한 미술의 만남
이언 자체크 엮음, 이기수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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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제는 태풍 '링링'이 한국을 강타했지요. 링링이 수도권 근처에 왔던 순간 저는 방 안 창가에 서서, 무섭게 덜컹거리는 베란다 창이 깨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눈은 창 너머의 공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쉴 새 없이 쓰러질 듯 춤을 추는 나무들이 여름 내내 정신없이 바빴던 저의 머릿속을 시원하게 비워 내주는 느낌이 들어서, 아마 태풍 링링이 수도권에 도착하고 떠나갈 때까지 -거의 6시간을- 창밖만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바람에 쓰러질 듯 흐느적대는 나무들을 휴대폰 카메라로 줌인해서 찍어보았습니다. 찍고 난 후 사진을 보니 마치 유화물감을 쓴 듯한 효과가 느껴졌습니다. 굉장히 신기했어요. 사진을 보고 다시 창밖을 보고 있으니, 강풍에 춤을 추는 저 공원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태풍 링링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저를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해 보면 미술과 역사는 참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요. 최근 일주일 동안 틈틈이 읽어본 책 <미술사 연대기>는 이러한 관계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매우 잘 구성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론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보통 미술사 개론서는 역사적 시대와 미술 분파, 미술 운동으로 주제를 나누어 설명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책은 그런 형식을 탈피하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세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발전을 연대표를 이용해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핵심적인 예술 작품들을 함께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는데요. 정말 기막힌 방법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미술사 책을 저는 본 적이 없거든요.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매혹적인 미술 작품 감상과 더불어 역사 공부도 간만에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연대표를 따라 쭈욱 읽어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 책은 한 명이 주도적으로 기술한 게 아니라 여러 명의 기고자들이 쓴 내용을 정리하고 편집해놓은 미술서인데요. 미술사 분야의 각기 다른 전문가들이 기고했기에 정확도가 더욱 올라간 느낌이 들었고, 그 덕에 읽는 내내 아주 쾌적한 미술사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예술의 태동기인 고대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와 바로크에 도착한 뒤, 로코코를 거쳐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위시되는 낭만주의를 지나서 근대에 도달한 후, 잭슨 폴록과 데미언 허스트가 기다리고 있는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이 책 한 권이면 미술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미알못(미술 알지 못하는 사람)'도 역사적 사실들을 기반한 미술사적 지식을 개괄적으로 습득할 수 있을 겁니다. 저 같은 미알못도 역시 그랬으니까요. 1948년 물리학자 조지 가모프와 랠프 앨퍼가 '빅뱅 이론'을 만든 2년 후 잭슨 폴록이 그 유명한 '넘버 1, 1950(라벤더 미스트)'을 그렸다는 걸 나란히 연결 지어 놓고 있는 책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 면에서 미술을 전공했든 안 했든 미술사를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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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만화를 위한 배색 교실 쉽게 배우는 만화 시리즈 56
마츠오카 신지 지음, 김재훈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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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볼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황홀해진다.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매혹적인 색감, 개성 강한 그림체, 거기다 빼어난 구도까지 갖추고 있는 일러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짧은 탄성이 나온다. 특히 그림체에 잘 부합하고 있는 매력적인 색감을 가진 일러스트는 작품을 본 지 한참이 지나도 머릿속에 계속 떠오를 정도로 그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런 이유로, 내가 얼마 전 읽어본 <일러스트·만화를 위한 배색 교실>의 저자 말마따나 그림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색(배색)일지도 모른다.


   한참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그 그림의 색감, 그러니까 '배색'을 만들어내는 건 꽤 힘든 일이다. 어렸을 때 그림을 그리다 색깔 하나를 잘못 칠하는 바람에 전체 그림이 촌스러워지거나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험은 다들 한 번씩은 해보았을거다. 배색이라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거다.



   일러스트를 잘 그리진 않지만 일러스트를 보는 건 무척 좋아하고, "필기시험 과목별 평균이 89점인 실력이라면, 아직 실기시험은 안 쳤지만 컬러리스트는 다 따놓은 당상"이란 말까지 들었으나 여차저차해서 실기시험을 안 치고 기간이 만료되는 바람에 컬러리스트 자격증을 놓쳤던 이력이 있는 사람으로서(그 이후엔 흥미가 떨어져서 컬러리스트 필기시험을 다시 치를 생각도 안 했지만), 이렇게 학문적 혹은 기술적으로 접근한 일러스트 배색 책을 보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이 책은 크게 챕터 1과 챕터 2로 나뉜다. 챕터 1에서는 색을 잘 활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배색의 기초 지식'이 정리되어 있다. '색의 원리'부터 시작해 '색의 삼원색', '색의 3속성', '톤' 등등 말이다. 어쩌다 쳐 본 컬러리스트 산업기사 필기시험을 고득점으로 합격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나는 이 챕터가 그다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챕터 2에서는 드디어 본 게임이 펼쳐진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배색 이론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예제 일러스트들로 직접 살펴볼 수 있다!(잇힝~) 톤 온 톤 배색, 레피티션 배색 등의 '베이직 배색'을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기법이자 '유니크 배색'에 속하는 리피트 배색, 그 외 '색상별 배색', '계절·시간대별 배색', '키워드별 배색', 이렇게 총 5가지 파트가 이 챕터 2의 주내용이다.



   이 책을 읽어보며 가장 감탄한 순간은 바로 '계절·시간대별 배색'에 속하는 배색 기법 중 하나이자 내 감각이 여러 가지 공감각으로 가득해지는 시간대이기도 한, '해 질 무렵 배색'이었다.


수평선으로 해가 지는 순간, 석양의 색은 선명함이 정점에 이릅니다.

사람의 시선을 강하게 끄는 진한 오렌지색과 노란색을 등진 캐릭터에게

시선이 주목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중략)

하늘 윗부분에 남은 미세한 청자색의 배색도 훌륭해

이 색의 유무로 느껴지는 감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 본서 126쪽 -


   위의 인용글만 봐도 알겠지만, '석양'하면 떠오르는 지배적인 색감은 오렌지색이다. 하지만 보색인 청자색을 미세하게 넣음으로써 이 해 질 녘 일러스트의 '드라마틱한 오렌지색의 세계'는 그 느낌이 더욱 풍부해진다. 얼마나 멋진지는 저 인용글이 설명하고 있는 그림을 직접 보게 된다면 아마 다들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이론 백날 읽어봐야 한 번 실전을 겪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열심히 탐독했다고 해서 컬러링을 할 때 바로 멋진 배색이 나올 리는 없을 거다. 그치만 여행을 가기 앞서 그 여행지에 얽힌 역사를 알고 여행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내가 앞으로 컬러링을 할 때나 멋진 일러스트를 볼 때 이 책에서 습득한 이론들을 통해 색을 대하는 눈은 훨씬 확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확장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뭐 그 또한 크게 나쁠 것이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가득 찬 책을 펼쳐보며 황홀함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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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 대원앤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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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멤버인 '다카하다 이사오' 하면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바로 1979년 일본 후지TV를 통해 방영된 '빨강머리 앤'이에요. 이 애니메이션으로 인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앤 시리즈가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옛날 작품임에도 저뿐만 아니라 현재의 어린이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이 오래된 고전 애니메이션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으려나요?


   이 다카하다 이사오 버전의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 작품 중에 명장면이 담긴 에피소드들을 골라 여러 주제의 에디션으로 대원앤북에서 차례차례 출간하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요. 소울푸드와 우정에 관한 에피소드가 담긴 <빨강머리 앤 - 딸기 레이어 케이크 편>,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는 에피소드가 담긴 <빨강머리 앤 - 절망의 구렁텅이 편>,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앤의 아름다운 낭만이 가득한 에피소드로 묶은 <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이 에디션들 중 저는 <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을 최근에 읽어보았어요.



   이 책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기쁨의 하얀 길'은 애니메이션 1화에서 따온 이야기인데요. 남매인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는 농사일을 도울 남자아이를 원했건만, 착오로 인해 고아원에서 여자아이인 '앤'이 에이번리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마차를 타고 마중을 나간 매튜 아저씨는 해맑게 수다를 떠는 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런 와중에 앤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이 얼마나 절망적일지도 모른 채 매튜 아저씨와 '사과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아름답다는 말도 부족한 느낌이고...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아, 정말정말 멋있었어요.

너무 감동해서 가슴이 찡해요.


-본서 18쪽-



   몹시 감동한 앤은 이 길이 그냥 평범한 '사과나무 가로수 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게 너무하다고 느꼈는지, '기쁨의 하얀 길'이라는 낭만이 가득한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하는데요. 앤의 감수성 넘치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이런 작명 센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 '눈의 여왕' 편에서 앤은 집 안의 꽃에게 '보니'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창밖에 있는 벚나무를 보고 '눈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꽃한테 이름을 붙여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마릴라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말이죠. 일곱 번째 에피소드 '한적한 숲속' 편에서 친구 다이애나와 함께 자작나무 숲으로 놀러 간 앤은 근사한 자작나무 숲에 홀딱 반해 그곳을 '한적한 숲속'이라고 명명하는데, 다이애나는 그 이름이 무척 멋지고 낭만적이라며 좋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숲에 있는 샘에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요정인 드라이어드에서 따와 '드라이어드의 샘'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지요. 이외에도 아홉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다이애나와 같이 읽고 있던 책에서 따온 '연인들의 오솔길'이란 이름을 강가 옆에 있는 평범한 길에게 이름으로 붙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앤의 무한한 상상력은 지치는 법이 없어요. 앤은 낚시를 하다가도 불현듯 기사 랜슬롯이 있는 카멜롯 성에 죽어서 도착한 백합 공주가 되는 비극적인 공상에 빠져들 정도인데, 이 정도면 친구들과 '이야기 클럽'을 더 일찍 결성하지 않은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죠 뭐. 하하하.



   때론 상상력이 지나쳐 다이애나와 떨어져 지내게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장 내일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앤이지만, 저는 이러한 앤이기에 왠지 더욱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앤의 이런 엉뚱한 면이 저와 좀 닮아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말이죠,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소중함을 잘 느끼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신비에 명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앤과 저랑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빨간색 머리카락을 무척 좋아한다는 거예요. 앤은 왜 본인의 빨간 머리색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무척 예쁘기만 한데 말이죠. 어쩌면 앤의 상상력의 원천이 그 빨강머리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르는데! 머리카락이 힘의 원천인 삼손처럼 말이죠. 하하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의 낭만이 가득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에디션을 읽고 나면 아마 주변의 평범한 일상이 조금은 더 낭만적으로 보이게 될지도 몰라요. 앤의 풍부한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책을 슬그머니 추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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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프 그래픽 컬렉션
엘린 브로쉬 맥켄나 지음, 라몬 K. 페레즈 그림, 심연희 옮김 / F(에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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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인의 부모님은 제인이 어렸을 적 바다에서 일하다 돌아가셨다. 고아가 된 제인은 이모의 집에서 지냈지만, 얹혀사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기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인은 없는 듯 지내는 법을 배웠다. 이모의 집이든 학교든 그 어디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제인의 유일한 낙은 본 것을 떠올려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고, 이 재능으로 이곳을 탈출하는 것만이 당장 생각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제인은 일을 찾았고, 될 때마다 고기잡이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며 돈을 번 후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처럼 원래부터 없었던 듯 이모의 집을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예술학교를 다니며 자유롭게 미술을 공부하고팠던 제인은 장학금을 유지하려면 일주일 안에 일자리를 찾아오라는 예술학교 측의 요구에 급하게 일자리를 찾게 된다. 오빗 사의 구인 광고를 보고 높은 급료 때문에 무슨 직종인진 모르지만 일단 지원한 제인은 이력서를 들고 회사에 가자마자 제인의 이력이 깨끗하다며 채용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일할 곳의 주소를 이메일로 받고 다음날 찾아간 제인은 그곳이 미스터리한 사업가인 에드워드 로체스터의 집이며, 자신이 하게 될 일이 다름 아닌 보모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제인은 로체스터의 어린 딸 아델로부터 성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을 안내받다가 죽은 아내의 사진들로 가득 찬 집안을 보며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거기다 3층에는 절대 가면 안 되며, 만약에라도 갔다가는 해고될 것이라며 그렇게 해고된 보모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을 아델로부터 듣는다.


   기묘한 느낌을 주는 로체스터의 집에서 제대로 일 한 지 하루 만에 심적으로 지쳐버린 제인은 이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지만, 무덤 같은 저택에서 외톨이처럼 지내는 아델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아델의 불행한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고집을 피우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로체스터와 드디어 대면하게 되고, 로체스터의 매부인 리처드 메이슨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제인의 아델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알게 된 로체스터는 점점 제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 로체스터에게 제인 역시 호감을 가지다가도 로체스터의 알 수 없는 행동들에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그와 동시에 로체스터 저택의 비밀에도 한 걸음씩 점점 다가가게 되는데...



   위의 이야기는 샬롯 브론테의 명작 <제인 에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그래픽 노블 <제인>의 줄거리이다.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원작을 본 지 오래된 <제인 에어>였던 데다 그래픽 노블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이 <제인>을 읽은 뒤 원작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어보게 되었다. 원작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제인 에어는 영화나 여러 매체를 통해 계속 접해왔기에 원작과 비교하며 읽는 데는 그다지 무리가 없었다.


   그래픽 노블 <제인>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느낀 건, 장면 전환이 무척 감각적이란 점이었다. 마치 영화처럼 말이다. 이야기 흐름이 콘티처럼 펼쳐져서,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전에 읽었던 그래픽 노블 <인어 소녀>처럼 회화가 가진 아름다움을 주로 강조한 그래픽 노블과는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고,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글쓴이가 '엘린 브로쉬 맥켄나'였는데, 알고 보니 맥켄나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극본과 '굿모닝 에브리원',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등 흥행 성적이 좋았던 여러 영화 극본을 썼고 연극도 각색한 베테랑 작가였다. 이 베테랑 작가와 그림 실력이 출중한 '라몬 K. 페레즈'가 만났으니 이렇게 영화 같은 멋진 그래픽 노블이 나왔을 수밖에.



(아래부터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에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소설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다르게 '한 여성의 자주적인 성장 소설로는 그다지 안 느껴진다'라고 느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이 <제인>에서는 내가 원작을 읽으며 그렇게 느꼈을 법한 이유들을 조금 상쇄시켜주는 설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작에서 로체스터는 아내인 버사를 골방에 감금한 채 해외를 돌아다니며 집에서 거의 지내지 않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캐릭터였는데, <제인>에서는 해외 업무 때문에 집에 거의 있지 않는 것으로 각색을 했다. 또한 로체스터는 원작에서 제인과 중혼을 시도하는 파렴치한 인간이지만, 이 책에서는 -적어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제인과 결혼까지 시도하진 않는다. 그리고 원작에선 로체스터의 아내가 -정말 정신병이 생겨서 감금당한 것인지, 아니면 로체스터의 술수에 휘말려 10년 넘게 감금생활을 하며 정신병을 얻은 것인지, 하여튼- 정신병 때문에 골방에 감금당한 채 지내고 있는 것을 <제인>에서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아 혼수상태인 채로 누워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거기다 로체스터의 딸인 아델이 원작에서는 정부의 딸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의 딸인 걸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원작과 다른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제인 에어가 그저 가정교사가 아닌 화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이고, 미술학교를 다니기 위해 구해야 했던 일자리 때문에 로체스터 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원작이나 이 그래픽 노블이나 위압적이고 이기적이며 자식에게 애정도 없는 나이 많은 로체스터에게 -대체 왜 빠져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결국 빠져드는 제인 에어라는 설정은 그대로다. 뭐 이 로맨스가 원작의 큰 중심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니, 이 설정은 결코 바꿀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제인>은 원작과 비교해 곁가지를 많이 쳐낸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멋진 그림과 영화처럼 펼쳐지는 이야기 전개는 이 책을 손에 든 순간부터 다 읽을 때까지 절대 덮을 수 없게 만든다. 이 그래픽 노블을 만든 두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책 초반 몇 장만 읽어도 느낄 수 있다. 함축된 짧은 문장과 거친 바다 및 공허함이 가득한 무채색의 그림 몇 장만으로도 제인이 얼마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잘 와닿게 설명해내는 걸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습도 때문에 곧잘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이 여름에, 눅눅한 불쾌함도 잊은 채 푹 빠져 읽을 수 있는 그래픽 노블을 만나서 무척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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