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 대원앤북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멤버인 '다카하다 이사오' 하면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바로 1979년 일본 후지TV를 통해 방영된 '빨강머리 앤'이에요. 이 애니메이션으로 인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앤 시리즈가 더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옛날 작품임에도 저뿐만 아니라 현재의 어린이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는 이 오래된 고전 애니메이션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있으려나요?


   이 다카하다 이사오 버전의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 작품 중에 명장면이 담긴 에피소드들을 골라 여러 주제의 에디션으로 대원앤북에서 차례차례 출간하고 있는 걸 발견했는데요. 소울푸드와 우정에 관한 에피소드가 담긴 <빨강머리 앤 - 딸기 레이어 케이크 편>,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는 에피소드가 담긴 <빨강머리 앤 - 절망의 구렁텅이 편>,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앤의 아름다운 낭만이 가득한 에피소드로 묶은 <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이 에디션들 중 저는 <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을 최근에 읽어보았어요.



   이 책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기쁨의 하얀 길'은 애니메이션 1화에서 따온 이야기인데요. 남매인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는 농사일을 도울 남자아이를 원했건만, 착오로 인해 고아원에서 여자아이인 '앤'이 에이번리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마차를 타고 마중을 나간 매튜 아저씨는 해맑게 수다를 떠는 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런 와중에 앤은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이 얼마나 절망적일지도 모른 채 매튜 아저씨와 '사과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예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아름답다는 말도 부족한 느낌이고...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아, 정말정말 멋있었어요.

너무 감동해서 가슴이 찡해요.


-본서 18쪽-



   몹시 감동한 앤은 이 길이 그냥 평범한 '사과나무 가로수 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게 너무하다고 느꼈는지, '기쁨의 하얀 길'이라는 낭만이 가득한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하는데요. 앤의 감수성 넘치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이런 작명 센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 '눈의 여왕' 편에서 앤은 집 안의 꽃에게 '보니'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창밖에 있는 벚나무를 보고 '눈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꽃한테 이름을 붙여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마릴라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말이죠. 일곱 번째 에피소드 '한적한 숲속' 편에서 친구 다이애나와 함께 자작나무 숲으로 놀러 간 앤은 근사한 자작나무 숲에 홀딱 반해 그곳을 '한적한 숲속'이라고 명명하는데, 다이애나는 그 이름이 무척 멋지고 낭만적이라며 좋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숲에 있는 샘에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의 요정인 드라이어드에서 따와 '드라이어드의 샘'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지요. 이외에도 아홉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다이애나와 같이 읽고 있던 책에서 따온 '연인들의 오솔길'이란 이름을 강가 옆에 있는 평범한 길에게 이름으로 붙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앤의 무한한 상상력은 지치는 법이 없어요. 앤은 낚시를 하다가도 불현듯 기사 랜슬롯이 있는 카멜롯 성에 죽어서 도착한 백합 공주가 되는 비극적인 공상에 빠져들 정도인데, 이 정도면 친구들과 '이야기 클럽'을 더 일찍 결성하지 않은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죠 뭐. 하하하.



   때론 상상력이 지나쳐 다이애나와 떨어져 지내게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장 내일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한 앤이지만, 저는 이러한 앤이기에 왠지 더욱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앤의 이런 엉뚱한 면이 저와 좀 닮아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말이죠,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소중함을 잘 느끼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주의 신비에 명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앤과 저랑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빨간색 머리카락을 무척 좋아한다는 거예요. 앤은 왜 본인의 빨간 머리색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무척 예쁘기만 한데 말이죠. 어쩌면 앤의 상상력의 원천이 그 빨강머리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르는데! 머리카락이 힘의 원천인 삼손처럼 말이죠. 하하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의 낭만이 가득한 에피소드로 가득한 이 에디션을 읽고 나면 아마 주변의 평범한 일상이 조금은 더 낭만적으로 보이게 될지도 몰라요. 앤의 풍부한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한 이 책을 슬그머니 추천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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