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지음, 제프리 앨런 러브 그림, 김영옥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신화, 혹은 신화를 향한 호기심은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부터 시작된다. 엊그제 읽어본 <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의 저자인 케빈 크로슬리-홀랜드 또한 아이슬란드에서 야영을 하며 느꼈던 경이로움을 통해 북유럽 신화에 빠져들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가 바이킹족에게 퍼지기 전 그들이 숭배했던 다양한 만물의 신들이 북유럽 신화의 토대가 되었고, 그 시작은 아마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령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어마어마한 천둥과 우렛소리로 많은 사람들이 종일 놀랐던 어느 날, 두 아이를 앞에 앉혀 놓고 아빠는 이렇게 운을 떼었겠지. "그거 아니? 토르와 흐룽그니르가 대결한 날에도 이렇게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천둥이 쳤었단다. 이 둘이 어떻게 대결을 하게 되었느냐면 말이지..."


미드가르드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토르가 아스가르드를 떠나 싸움터로 향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토르의 천둥이 지평선 전체를 빙빙 돌고 돌다가 낮은 북소리가 한참 동안 둥둥둥 울려 퍼졌다. 경고였다! 곧 미드가르드의 모든 인간들은 두개골 속을 파고드는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에 비명을 질렀다. 그날 이후, 인간들은 그런 폭풍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서로 이야기했다.


[본서 162쪽]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신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온화한 발데르를 죽게 만든 로키가 고문을 받으며 치는 몸부림이라고 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일 테다(218쪽). 신화는 이렇게 자연 속에서 울고 웃으며 견뎌온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이야기가 아닐까. 이러한 옛 신화들에 자꾸만 호기심이 가는 현재의 우리들 또한 자연스러운 본능에 이끌리는 것일 테고. 북유럽 신화의 거장으로 알려진 케빈 크로슬리-홀랜드가 전 연령대를 아우를만큼 쉽게 개작하면서도 극적인 재미 역시 놓치지 않은 <북유럽 신화 : 오딘, 토르, 로키 이야기>는 글과 한 몸처럼 어우러져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멋진 일러스트에 압도당해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이었다.



   이 책은 스웨덴의 왕 귈피가 게피온이라는 여신에게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는 아스가르드 왕국과 신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다 싶어 발할라로 떠나는 것으로부터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전사의 신(에시르)'과 '초록과 황금의 신(바니르)'의 힘겨루기 싸움 끝에 폐허가 된 아스가르드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 서리거인 티아시와 모사꾼 로키가 청춘의 황금 사과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이야기, 오딘과 로키와 -다리가 긴- 호니르가 실수로 죽인 오트르의 목숨값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마지막 장엔 이 책의 시작에 나왔던 스웨덴의 왕 귈피가 노인이 되어 다시 발할라로 떠나 이 세계의 끝과 시작을 가져다주는 전쟁, '라그나로크'를 전해 듣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온갖 책략으로 거인과 인간들을 농락하고, 서로의 권능에 대해 힘겨루기 하는 걸 쉬지 않는 아스가르드의 주신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삶은 하루도 따분할 틈이 없어 보인다. 긴 겨울의 지루함을 참지 못한 오딘으로 인해 벌어지는 토르와 흐룽그니르의 대결, 토르와 로키의 쓸데없는 우트가르드 원정,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신을 싫어하는 거인 휘미르에게 스스럼없이 힘자랑을 하다 정체를 들키는 토르 등. 북유럽 신들이 일으키는 해프닝을 보고 있으면 너무 재밌어서 웃음이 난다. 스스로를 증명하고 더 큰 명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신이라고 별 거 있나? 이렇게나 우스꽝스럽고 미련한 존재에 지나지 않은데 말야.'



   어렸을 땐 북유럽 신화의 신들 중 오딘을 가장 좋아했다. 최고신이라는 오딘의 지위와 지식을 향한 욕망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북유럽 신화를 다시 읽어보니 이 신화 중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로키라고 느껴졌다. 한마디로는 절대 정의 내릴 수 없는, 우리의 매력덩어리 '모사꾼' 로키. 재치와 독설뿐만 아니라 교활함까지 겸비한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증오하고 경멸하면서도 그들의 매력을 쉬 물리치지 못해 함께 여행 다니길 즐긴다. (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가! 아우 멋져) 로키가 여자 거인 앙그르보다 사이에 낳은 세 자식이자 괴물들인 요르문간드, 헬, 펜리르를 다른 신들이 본인 몰래 처리해버렸다는 걸 알았음에도 말이다. 로키는 신들을 골탕 먹이고 비아냥대길 무척 좋아하지만, 신들을 곤경에서 자주 구해준다. 하지만 거인의 자식이라는 숙명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 선함은 악함에 잠식되어버리고, 급기야는 이 세계에 '라그나로크'를 가져오기에 이른다. 참으로 미우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몹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껴진달까. (그리고 마블 스튜디오 영화 속 로키 역의 톰 히들스턴이 너무나 멋졌다는 점 역시... 현재 내가 로키를 꼽게 된 것에 어느 정도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쿨럭.)


   밤이 점점 길어지고 공기가 쌀쌀해져 가는 요즘. 뜨끈한 이불 속이 자꾸만 생각나는 계절이 찾아왔다. 기나긴 밤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엎드려 따뜻한 고구마 한 입을 딱 베어 물었을 때, 다른 한 손으로 넘기고 있을 만한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 적당하지 않을까. 뛰어난 이야기꾼인 케빈 크로슬리-홀랜드가 들려주는 이 무시무시하고도 재밌는 북유럽 신화 이야기가. 북유럽 신화를 시원시원한 그림과 함께 극적이고도 감각적으로 잘 구성한 책을 만나서 무척 기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