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최수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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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내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는 '우로보로스'였다. 어째서 '우로보로스'가 떠올랐을까? 그것은 단순히 소설의 첫부분과 마지막의 첫부분이 같다는 이유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대뇌피질을 뚫고 들어오는 질문은 '왜 매미인가?'라는 것이었다. 왜 하필 매미인가? 땅 속에서 6-7년 동안 잠을 자다가 세상에 나와 6-7일 정도 밖에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그 생(生)의 가열함 때문인가? 온 몸으로 울어대는, 오로지 온 몸으로 울어서 생(生)을 소진시키는, 자신의 울음이라는 역동적 행위를 우주 끝까지 퍼뜨리는 생(生)의 자장 때문인가?

우선 나는 '매미'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이유를 '생(生)의 가열함' 때문이라고 가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최근에 줄곧, 아직까지도 나를 지배하는 하나의 관념의 실체, 즉 '추방된 나'와의 마주함에서 오는 갈등과 소설의 주인공과 연결시켜 보기로 한다.

소설은 단 하루 동안에 주인공의 의식의 미분화를 보여준다. 자아의 들락날락거림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도자의 끊임없는 환속일 수 있고, 공화국으로부터의 시인의 끊임없는 추방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의식의 '결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로보로스. 그 들숨과 날숨 사이에 우로보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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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땅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9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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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말해서, 무릇 소설이 삶의 반영이라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 소설은 질질끌고 있었다. 한달음에 읽어내릴 수 없도록 나를 유폐시켰다. 그것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자폐적 의식에서 기인했으리라.

소설은 종내 독자를 유페시키고 작가의 비극적 세계인식의 편린들로 극광을 뿜어내었다. 그것은 현실이 삶에 가하는 혹독한 형벌의 단말마였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그들에게 있어 역사는 자기와는 무관하기만한 '무엇'이라는 점에서(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 소설 속에서 '역사'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 역시 '역사'에 대해선 생각조차 갖고 있지 않다.) 닮아 있다. 이들은 그저 제 생의 한켠에 편안히 누을 수 있는 자리 하나 갖고 싶었던 소박한 보헤미안들이다.

그러나 현실이 이들에게 가하는 무시할 수 없는 억압은 이들을 철저히 이데올로기의 허울로 결박한다. 움쩍달싹하지 못하는 이들은 좀체로 그 허위를 보지도 못하고 벗어버릴 수도 없다. 이들은 그저 '피리부는 사나이'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는 '아이들'의 미래의 모습이다. 소설은 바로 '피리부는 사나이'의 비극적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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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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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한우의 <한국은 난민촌인가>를 읽고 난 후에 읽은 책세상의 두 번째 책이다. 예전에 읽었던 김융희의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과 김영건의 <철학과 문학 비평, 그 비판적 대화>까지 포함하면 총4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총4권의 책세상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세상 문고에 어떤 일관된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책세상 문고가 어떤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책세상에서 엮어내는 문고는 아직 비주류다. 그러니까 메이저 출판사에서 펴내는 것들과는 다른 흐름, 즉 출판의 혹은 인문학의 틈새를 파고들어 새로운 주제를 새로운 필진으로 하여금 엮어낸다거나 혹은 묻혀있던 주제를 재차 발굴하여 엮어낸다는 점이다. 이것이 책세상 문고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읽었던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라는 책 또한 그 성격이 책세상의 노선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고미숙이 몸담고 있는 연구공간 ‘너머’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근대성’에 대한 전복적인(?) 해석이다. 고미숙은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표제문에서 이 책이 밝히고자 하는 바를 비교적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한국의 근대성은 주로 이론이나 운동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왔다. 내재적 발전론이나 근대화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근대성 논의의 저변에는 파행이 아닌 정상적인 과정, 이상적인 형태로서의 근대가 명료하게 상정되어 있다. 이러한 암묵적인 전제가 그간 인문학의 연구를 관통해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이로 인해 한국의 근대는 미화되거나 과잉 해석되어온 감이 있다.

이 책은 우선 이러한 척도들에서 벗어나 근대가 태동하는 현장에서 근대의 기원을 사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기원으로의 회귀가 아닌, 기원에서 일어난 전도 과정을 통해 기원을 전복하는, 즉 근대성의 외부를 사유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확히 백 년 전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근대적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앞으로 새로운 주체 구성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이 탐색은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을 단초로 진행될 것이다.」

표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는 근대성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작업, 즉 근대를 맞이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사유하기를 천명한다. 때문에 고미숙의 작업은 까다롭고 지난한 작업일 수 있다. 고미숙의 작업이 까다롭고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작업이라는 것이 당시에 발행된 신문을 꼼꼼히 읽어내려 가야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미숙이, 연구공간 ‘너머’가 ‘한국의 근대성’을 파헤쳐 보기 위해 실천하고 있는 야심찬 기획이기도 하다. 적잖은 용기 없인 시도해 볼 수조차 없는 기획이라는 판단이다.

고미숙이 밝히고 있는 근대 계몽기란 “구체적으로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 즉 청일전쟁,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등 근대적 전환의 기폭제가 되는 사건들의 연대이고, 종착점인 1910년은 잘 알다시피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로 접어드는 연대”라고 규정하면서 근대 계몽기는 문자 그대로 우리의 근대가 시작된 ‘기원의 공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그것은 “단지 중세 봉건 체제에서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했다는 거시정치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유체계와 삶의 방식, 규율과 습속 등 구성원 개개인의 신체를 변환시키는 차원까지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강제 개항으로 인해 느닷없이 유입된 ‘근대에 대해 당시의 구성원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 단순한 질문이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가 쓰여지게 된 출발점이 된 것은 췌언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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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난민촌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7
이한우 지음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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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난민촌인가’라는 매우 신선한(적어도 내가 보기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한국의 난민촌적 성격을 추출해보겠다”는 저자의 매우 야심찬 기획과는 달리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듯 보인다. 물론 책의 분량이 170여페이지 남짓하는 문고판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책의 질적 수준이 조악한 저널리즘적 속성을 뛰어넘고 있지 못하고 현상에 대한 정확한 투사와 깊은 성찰이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금의 시대에 있어 ‘한국의 난민촌적 성격을 추출해보자’는 저자의 기획은 매스 미디어의 마취봉에 휘둘려 온 나와 같은 감동없는 세대 -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시간조차도 또 다른 생산물의 소비를 위해 폐기해야하는 - 또한 자신의 정체성조차도 뿌리내리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전에 살고 있는 세대에게 반성적 물음을 던져주는 아주 멋진 기획이다.

저자는 우선 ‘난민’의 어휘에 대한 개념을 “한마디로 내전, 정치적 억압, 경제적 재난, 빈곤 등의 이유로 조국을 떠난 사람들” 더 나아가 “실체적, 정신적으로 조국을 상실한 사람들”로 규정한다. 저자는 ‘난민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물으면서 ‘난민 의식’을 살핀다. 저자는 ‘난민 의식’을 살피기 위해 두 가지 범주를 설정하는데, 인간의 의식을 살피는 데 실마리가 되는 시간과 공간이 그것이다.

저자는 난민의 시간 의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난민이 된다는 것은 자기 나라와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한다. 자기 나라와의 단절이지만 실은 ‘나라’와의 단절이다. 자기 나라와 단절되더라도 다른 나라와 새로운 연결을 맺는 이민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라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난민이 된다는 것은 나라라는 것 자체와의 결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호적이니 국적이니 가족, 친척이니 하는 것들과의 외형적 단절은 물론 죽음의 문제와도 직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처절한 내면적 단절이다.」p.25.

또한 저자는 한국의 실체적 조국 상실로서의 일제 강점기의 난민 의식을 살펴보면서 빅터 프랭크가 경험한 아우슈비츠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저자는 일제 36년을 여러 측면에서 <죽음의 수용소>(빅터 프랭클)로부터 해석의 준거틀을 이끌어내면서 난만의 과거의 의미를 살아온 삶 전체가 증발한다는 곧 삶이 완벽하게 뿌리 뽑협다는 뜻으로 ‘뿌리없음’으로 규정하고, 난민의 미래란 불확정, 불안, 희망 없음, 절망 등으로 드러난다고 말하면서 난민의 미래의 의미를 ‘무(無)전망’이라고 규정한다.

「난민의 과거와 미래는 서로 만나려야 만날 수가 없다. 뿌리 없음으로서의 과거는 그 자체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현재와는 무관하다. 무(無)전망으로서의 미래도 현재와 절연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그것은 파편화된 시간성이자 구조적 시간 감각의 파괴이다.」p.27.

인간의 일차적인 공간 체험의 범위 또는 단위는 ‘자기 나라의 영토’이다. 풍토니 기질이니 하는 말은 바로 공간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인간의 공간 의식은 이미 성장하면서 체질화 된다. 그러나 난민의 공간 의식은 어떤가? 난민이 될 경우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원천으로서의 ‘국가’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

결국 어떤 사람이 난민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던 삶의 의미망이 갈기갈기 찢긴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개개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원천으로서의 틀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삶의 의미망이 바로 우리 삶의 공간인데 난민이 됨으로써 그는 무(無)공간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난민의 행동 양식과 한국인의 난민화, 대한민국의 난민촌화를 부추기는 요인을 분석한다.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책은 용두사미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며 필자의 직업을 재확인이라도 하듯 조악한 저널리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또한 주제의 검증 방식이 근거 없는 양비론 이상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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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창비신서 119
이매뉴엘 월러스틴 지음 / 창비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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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윌러스틴이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 체제로 보고, 그것을 전체 역사에 걸쳐 그리고 구체적이고 독특한 실체로서 다룬 사회과학 이론서이다. 윌러스틴 스스로도 언급했던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저술은 개념 정의 후 장소와 시기에 따른 발전사를 다루는 논리․연역적 분석이거나 자본주의체제의 커다란 변형에 중점을 두고 전체적으로 그 상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이런 분석 방법은 자본주의에 대한 시점이 현재에 귀납됨으로 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전체상이 단순히 작금의 상황을 비추어 보기 위한 신화적 배경막으로만 구실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 체제로 보는 윌러스틴의 분석 방법은 자본주의의 변형 및 전체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분석 방법이라고 하겠다.

윌러스틴의 이 책은 자본이 자기 확장을 위한 목적으로써 만물의 상품화를 가져왔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이익을 위한 투쟁이 일어나며, 이런 정치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권력의 시녀로서 당대의 불합리한 담론을 합리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윌러스틴은 후반부에 “진보와 이행에 관하여”라는 결론에 해당하는 글을 실음으로 해서 역사적 자본주의에 전체상을 밝힌다.

윌러스틴의 이 책은 짧은 분량으로 엮어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무척 어렵다. 번역자도 밝히고 있듯이 윌러스틴의 진술이 매우 함축적이고 요약적인데서 나오는 불가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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