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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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정치한 주제를 간결한 필치로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잘 쓰여진 책 같다. 이 책에서 가라타니는 '도덕'을 공동체 사회에서의 규범으로, '윤리'를 코스모폴리탄의 도덕으로 규정하고, 윤리의 문제를 개인에서 사회로, 국가로 까지 확장시켜 파헤친다. 주로 칸트의 '자유'개념을 '윤리'의 문제와 불가분의관계로 파악하여 논지를 전개해나가고 있는 이 책은 근대사회에 있어서의 '윤리' 문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가라타니의 기획이랄 수 있다.

일찌기 페르디난드 퇴티스가 게젤샤프트적 특성에 주목하여 인간 본래의 자연적인 '본질의지'가 억압되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관계를 각자의 이익과 목적에 따라 구획하는 '선택의지'가 지배적으로 되는 과정을 추동하는 근대성을 비판하며,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여 '협동조합 기업'을 새로운 사회의 기반으로 봐야한다는 비젼을 세웠듯, 가라타니는 맑스의 코뮤니즘 -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 연합사회 - 에 기반을 둔 '생산협동조합의 연합사회'에로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한편 <윤리 21>은 '윤리'의 배면인 '원인'과 '책임'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 어떤 '윤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책임'이 윤리의 완성이듯, 가라타니는 '책임'의 문제 역시 정밀하게 다룬다. 특히 칸트의 '사적자유'에로의 희망과 그것을 전제로 하는 '책임'에 대한 정치한 내용이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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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1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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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p.16) 공산당선언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단호한 명제가 <공산당선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공산당선언>은 Karl Marx와 Friedrich Engels에 의해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1848년 2월 영국에서 23쪽 분량의 판본으로 처음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맑스의 주요 논문으로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집필한 <공산당선언>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수고에 의한 <공산주의의 원칙>, 그리고 이진우의 해제로 이루어져 있다. 엥겔스가 1883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이 선언의 “근본 사상은 전적으로 마르크스의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 <공산당선언>은 마르크스 사상의 가장 중심에 놓인다.

제1장 공산당선언은 1.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2.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3.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4. 여러 반대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등 총4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맑스는 각 항목의 제목에 언급된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자 등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맑스는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명제가 도출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현실을 냉정하게 통찰함으로써 허위의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폭로한다.

맑스는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중세 봉건제 사회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그로 인한 프롤레타리아의 양산 등을 역사적으로 밝히고 그 구조적 모순을 폭로한다. 즉 “근대 부르주아지 자체가 장구한 역사적 발전과정의 산물이여, 생산 및 수송 방식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혁의 산물”(p.18)이라는 것이다. 맑스는 그러나 이 자본이 집중되는 소수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주문을 외워 불러낸 지하 세계의 폭력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마법사”(p.22)로 비유하면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전복될 대상으로 보았다.

맑스는 소수의 부르주아에게만 집중되는 “현대적 시민의 사적 소유는 계급 대립, 다른 계급들에 대한 한 계급의 착취에 기반을 둔 생산품의 제조와 획득의 최종적인 가장 완성된 표현”(p.34)이라고 보고 현대적 시민의 사적 소유제를 폐지해야한다고 했다. 즉 자본의 성격을 계급적 성격을 소멸시키는 공동 자본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맑스의 핵심 사상이 집약되었고, 전체적으로 간결한 필치로 작성된<공산당선언>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단순히 대립시키는 교조적 태도를 경계하고,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원리를 현실 자체에서 산출하려는 맑스의 과학적 태도가 용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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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과 육성
최수철 / 열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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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철, <알몸과 육성>, (열음사,1991) 내 등에 칼을 꽂고, 내 등에 칼을 꽂고, 내가 나의 뒤에 서, 내 등에 칼을 꽂아, 내 등에 칼을 꽂아, 내가 나의 뒤에 서.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정말 눈으로 읽지만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소설 속에 침윤되어 소설의 첫부분이 까마득하게 밀려나 버리는 경험을 했다. 이건 참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 당혹스러운 시점을 힘겹게 힘겹게 넘어가는 와중에 마주친 문장이 소설 읽기를 포기하게끔 했다. '사실, 이 글은 어느 모로 보나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적어도 지금은 이것이 소설이라고 고집스럽게 말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p. 136.)

오, 빌어먹을. 소설의 첫부분에서 분명히 이건 소설이다. 이것이 소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는 작가의 확신에 찬 문구가 뒤통수를 후려 갈긴다. 젠장, 게다가 그 문장을 마주치자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정말 쓴 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난 소설을 읽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가를 읽는 것인가? 아니면, 난 실험당하는 마루타인가? 한 번 잡은 책은 반드시 끝장을 보는 성격탓으로 좀이 쑤시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소설 읽기를 마쳤다. 사실 이것은 소설 읽기라기 보다 내 참을 성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이 소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난 철저하게 내 의식이라든가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 혹은 모니터를 보고 있는 시선의 단절 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밖에서 젊은 남녀가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울음 소리가 내 소설 쓰기를 방해한다. --큭큭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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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여자
하성란 지음 / 창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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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옆집여자>, (창비, 1999) 단편 10편으로 묶여진 소설집, 그것도 처음으로 읽게 되는 소설가의 소설집, 더욱이 그것이 여류 소설가의 소설집을 읽어 낸다는 것은 자못 설레이고, 기분좋은 긴장이다. 그러나 그것의 배면에는 단편이라는 점과 여류 소설가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적잖이 부담이 누워 있으리라.

단편이 주는 상징과 은유는 분명코 내게 '분석'이라는 절차를 요구하리라. '분석'을 하지 않기 위해서, 소설 속에 그대로 침윤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저 침윤되는 깊이만큼의 아니 그보다 못한 정도의 앙금을 얻기 위하여 시작한 소설읽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분석'을 한다는 것은 분명코 애초의 약속에 어긋나게 되는 터이다.

하성란의 단편은 재미있기 보다는 좋았다라고 말해야 할 듯 싶다. '좋았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전후 사정없이 무턱대고 '좋았다'라는 말은 분명 실어증의 한 증세일 것이다. 대개는 '이러저러한 점이 좋았다', '이러저러해서 좋았다'라고 하는 것이 정상인의 어법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난 그냥 '좋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말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내 의도다. 말할 것이다. 이 '말할 것이다'라는 말에는 벌써 어떤 '냉소'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라고 말할 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태도의 문제다. 하성란의 소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난 그것을 말하기 위해 앞에서부터 주저리주저리 떠든 것이다. 그냥 말하면 될텐데도 이렇게 까지 길게 끈 변명을 하자면 이 글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계속해서 쓰면 어떤 말이 나올까를 나는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지금 내가 무엇을 쓰고자 하는지 모른다. 그냥 나도 나를 관찰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하성란의 소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녀의 소설은 상당히 모범적이다. 마치 어린 나이에서부터 익혀온 서커스의 여러가지 기술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해서 그녀의 소설은 예리하면서도 그 예리함때문에 답답하다. 마치 어려운 주관식 문제의 모범 답안을 보는 것 같다.

'세탁기는 이제 고물이 다 되었습니다.……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힘을 내자꾸나, 영미야.'(p. 12.) '명희에게서 선물을 받았습니다.……뒤집개였어요. 뒤집는 면은 스테인레스인데다가 뒤집는 면과 자루의 각도는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알맞게 굽어 있고요, 실리콘 재질의 손잡이가 달려 전도가 잘 되지 않는 고급스러운 뒤집개였어요.……나는 뒤집개에게 명희란 이름을 붙여주었어요.'(pp. 21∼pp. 27.)

'이제 나는 세탁기와 뒤집개와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떨 때 명희는 아주 낯선 사람 같아요. 명희와 나는 많이 다릅니다. 같은 뒤집개를 쓰고 똑같이 생긴 쇼핑백을 끌고 다닌다고 해서 같아질 수는 없어요.'(p.25.) '명희가 뭔가를 내밉니다. 코팅까지 했군요.……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캐나다는 오타와, 오스트레일리아는 캔버라, 에티오피아는 아디스아바바, 부룬디는 부줌부라…… 자디잔 글씨들이 종이 한 장 가득합니다.'(p. 29.)
'세탁기 앞에 서 있거나 생선을 구울 때면 이제는 세계 각국의 수도를 외웁니다.……세탁기가 힘겹게 탈수를 합니다. 세탁기의 원리는 아주 단순하답니다. 탈수는 원심력을 이용한 거래요.……6.5킬로그램의 빨래를 담을 수 있는 원통형의 빨래통이 날아가지 않는 것은 도방가지 못하다도록 빨래통을 감싸고 있는 상자 때문일테지요. 하지만 언젠가 원심력을 감당해내지 못한 세탁기가 베란다 창문을 뚫고 날아갈지 모를 일입니다. 세탁기의 뚜껑을 쓰다듬으면서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립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니?'(p.31.)

미쳤군, 아주 돌아버렸어. 하지만 난 멈추지 않습니다. 점점 더 가속도가 붙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캔버라, 부룬디는 아디스아바바, 미국은 마세루, 오스트리아는 워싱턴, 일본은 쿄오또오…… 내 기억력은 아직 쓸만합니다.'(pp. 35∼36.) ----<옆집여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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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3
서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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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 소설에서 받는 느낌은 일종의 당혹감이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전통적 소설과의 결별을 통해서 얻어진 것 그의 독특한 문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소설 <강>은 늙은 대학생 김씨와 세무서 직원 이씨, 그리고 얼마 전까지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박씨가 군하리라는 소읍에서 있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여정과 그 소읍에서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전통적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갈등구조라든지 사건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서정인의 소설이 전통적 소설 문법의 반경에서 벗어나 소시민적 일상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의 문체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눈이 내리는군요.”
(중략)
“예. 진눈깨빈데요.”
(중략)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중략)
“정말이지 이건 진눈깨비야”

“아직 안 가?”
“곧 가요.”
“여기가 중국집인 줄 아니?”
“왜 내가 중국집에 있어요?”
차장은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너, 곰이로구나?”
“내가 왜 곰이어요? 아저씬 뭔데요?”
“나? 난 네 할배다.”

“왜 저 사람들은 여기서 안 내릴까?”
“여기에 볼일이 없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고 다음 정거장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겠군. 우리가 율평인가 밤평인가에 볼일이 없었던 것처럼.”

소설 <강>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등장인물들 간에 대화는 지극히 사소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언어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서정인은 이러한 시시껄렁한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서 그의 주제의식을 날카롭게 묘파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등장인물의 이러한 대화의 기원은 일종의 상실로 보여진다.(그런데 이걸 증명하기 위해선 책을 더 읽어 봐야 되고, 언어학적 분석이 더 따라가야 할 것 같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상실감이 그것이다. 소설 <강>의 등장인물들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일 뿐이다. 자연히 이들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저주하기 시작한다. 즉 세계와의 불화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화가 등장인물이 가진 상실감의 기원이 된 듯하다. 늙은 대학생 김씨는 여관집에서 만난 공부 잘하는 소년을 통해서 그러한 상실감을 확인한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본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중략)…아―, 되찾을 수 없는 것의 상실임이여!”

이러한 상실감은 소설 말미에 나오는 술직 작부에게서도 보여진다.

“아, 신부는 좋겠네. 첫날밤에 눈이 쌓이면 부자가 된다는데, 복두 많지.”
그녀는 두 눈을 껌벅인다. 수많은 눈송이들이 눈앞에서 명멸한다. 그녀는 신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신부들은 똑같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행복, 기대, 불안. 또는 그 전부…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세계와의 불화, 자기 자신과의 불화가 기원이 되는 등장인물들의 상실감은 그 자신들을 주변인으로 남게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다. 그러나 서정인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그러한 갈등상태를 배면으로 넘기고 등장인물들 간의 재기발랄한 대화를 전면에 배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러한 아이러니적 이중 구조를 통해 서정인의 소설은 짙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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