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다. 아름다운 영화. 그러나 슬픈 영화. 마지막 책장을 넘기자 긴 한숨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밀려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감동'이라 부른다. 식상하게도 그렇다. 감동, 감동이다. 어린 시절, 별 거 아닌 작은 일에도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랬다. 나는 울보였다. 걸핏하면 울었다. 뭐가 그리 서럽고 아팠을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많이 먹고 난 후에야 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부에 자기 자신을 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의 중심부에 자기 자신을 두는 사람은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모든 초점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맞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상처를 받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아 아는 지금도 여전히 불완전한 인격을 가진 나는 나도 모르는 새 혹은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연을 쫓는 아이>는 '상처'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한 나라의 역사와 맞물려 전개되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회복'의 노래를 부르고만 싶었다. 아무라도 붙들고 '용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용서'라는 말은 인간을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과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말인 사랑의 바탕에는 용서가 깔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아미르의 성장 과정을 따라가는 동안 나 역시 그가 겪는 성장통을 고스란히 맛봐야 했다. 그리고 수없이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를 피할 수 없었다. 아미르가 처했던 모든 위기의 순간에 나라면,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미르는 나약한 우리네 모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비겁하게 몸을 사리며 숨는다. 필요할 때마다 자신과 주변을 속인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손을 댄다. 그리고 남에게 그 죄를 덮어 씌운다. 그리고는 정당화한다. 그래서일까. 아미르가 용기를 내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어했을 때, 절실한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처에 얽매인 우리 영혼은 용기를 내서 상대방과 나 자신을 용서할 때 완전하게 회복될 수 있다. 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상처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자유롭지 못한 연줄을 끊어내는 것과 같다. 줄 끊어진 연을 쫓아 달리다가 그 연을 가슴에 품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500여페이지가 넘는 긴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한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탄탄하게 맞물린 짜임새 있는 구성에 일단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대략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도 좋았던 점으로 들고 싶다. 무엇보다 혼란하고 암담한 시대에 작가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고마운 마음으로 후속작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도 내 품에 안으려 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내게 美 이민 사회를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돼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수박 겉핥기식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부분에 대한 '막연한' 이해 정도만 가능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하면 맞을까. 사실 깊이 빠져서 읽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서사가 중심이다. 1, 2권 합해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 거의 대화와 서술로만 이뤄져 있다 보니 지루하다는 생각을 많이 갖게 만들었다. 이 책에서 심리적인 부분에 대한 세세하고도 감각적인 묘사나 개성 넘치는 문체 혹은 눈에 띄는 특별한 사건 등을 찾기는 어렵다. 또 해외 동포 자녀들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운운하기에는 책이 너무 보편적인 색깔을 띠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논하는 게 오히려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나름 읽을 만하다. 최근에 읽었던 <달콤한 나의 도시>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연상시키는 면이 어느 정도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달콤한 나의 도시>가 더 매끄럽게 읽히지만. 이 책의 주요 인물 3인방은 모두 여자다. 이 책에 나오는 남자들은 세 여자의 형편없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고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케이시 한, 엘라 심, 리아 조 세 사람이 주요 인물이고 그 중 케이시 한이 이 책의 중심에 서 있다고 보면 된다. 세 여인은 각각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미 금융가의 중심에 우뚝 서서 백만장자의 공짜 음식을 먹고자 하는 케이시 한, 평범하지만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엘라 심,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 그리고 신앙 외에는 삶의 낙이 없는 리아 조. 책은 그녀들이 각각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를 엿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네들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이렇게나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특히 주인공 격인 케이시의 선택들은 그녀의 부모만큼이나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당신은 아직 멀었어. 좀 더 넓어져야 해." 라며 나를 시험(test)하려 드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똑똑하고 매력적인 동양 여자지만 그 내부는 혼돈과 무질서의 바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이나 괴롭고 불편했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그녀가 내려놓은 젓가락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법이니까. 무슨무슨 상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내 정서에 맞는다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문화권이 완전히 다른 나라의 이야기니 더 그럴 수도. 그러나 나와는 그다지 맞지 않은 책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중요한 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궁금하면 읽어보는 게 최선. 아, 그리고 분량이 많아선지 오타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책이 대박나서 더 찍게 되면 꼭 수정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
한 아줌마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 담긴 책이다. 순간순간 울컥울컥하는 느낌이 치솟을 때마다 스스로 그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불쌍해~" 라고 한 마디 던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소설이 아니다. 실제했던 삶이다. 그저 한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말, 그런 류의 이야기라면 차라리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펑펑 한바탕 울고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 라고 어줍잖은 감상을 이야기하고 그냥 끝! 하고 선언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정이란 말은 이 상황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쿨하게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달자, 그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는 되도록 담담하게 책을 읽어내려갔다. 마흔이란 나이를 생각해 봤다. 사실 몇 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 "40이 되기 전에 갈 길을 확실히 정해 놔야 해. 결혼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 존경하는 스승은 늘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형편없는 제자다. 아직까지도 그저 그렇게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놓인 인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동굴 속에 과연 뭐가 있을까 생각만 하고 있다. 발을 디뎌 그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춤주춤하고 있다. 비겁한 나. 나는 어쩌면 상처받지 않으려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슴도치처럼. 나와는 대조적으로 신달자, 그녀는 포기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잔인한 현실을 온 몸으로 맞받아쳤다. 까맣게 타버린 가슴을 부여잡고 그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한다."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녀가 흘린 절망의 눈물을 먹고 희망이 싹을 틔웠다. 어쩌면 신은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 걸 알기에 그녀의 그릇에 어울리는 시련을 허락하셨는 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그 부분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보인다. 잔인한 운명이라 생각하면서도 신앙의 힘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해 나간다. 나 같으면 헤어나오지 못했을 삶의 고비 고비마다 그녀는 다리 근육에 최대한 힘을 빼고 호흡을 잘 가다듬어 가며 고통의 고개를 넘고 있다. 훌쩍 여유있게 넘어가는 것도 그 앞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어찌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는 고백한다. "어쩌면 나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절체절명으로 불행한 일은 없다. 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하는 지도 모른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는 일이 더 많다." - p. 257 나 역시 너무 일찍 체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직 마흔이 아니다.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늦은 것도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자. 여전히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채 동굴은 내 앞에 있다. 발을 디뎌 보자. 최소한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지는 말자.
"보글보글 쫄깃쫄깃 xxx라면~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xxx라면~" 한 라면 광고 cm송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가독성도 좋고 문체도 톡톡 튀는 것이 제법 맛깔스러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창비 청소년 문학상에 빛나는 김려령의 <완득이>를 읽게 된 건 순전히 주인공 이름 때문이다. '도완득'이란 이름 석 자에서 느껴지는 정감어린 느낌, 친근감(혹은 촌스러움)이 나를 이 책으로 이끈 주요인이라 할 수 있다. 사랑스런 완득이와 만나면서 자연스레 내 청소년기를 떠올렸다. 일탈을 꿈 꿔 본 적이 한번도 없던 평범하다 못해 아주 아주 심심했던 나의 학창시절. 교실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이들과도 그럭저럭 잘 지냈던 나. 생각해보면 나는 작지만 약간은 매운 느낌을 주는 아이였던 거 같다. 그 시절에 내게 꿈이 있었던가? 너무 오래돼 생각나지 않는다. -_- 도완득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다. 그러나 흔히 비주류 아이들이 폴폴 풍기는 반항적인 인상을 완득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단 한 가지, 헛소리 잘하는 반 친구 혁주에게 주먹을 가끔 휘두르는 게 흠이라면 흠일 것이다. 혁주가 완득이의 주먹 세례를 받고 담임이나 제 부모에게 쪼르르 가서 이르지 않는 걸 보면 아이들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란 게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쿨한 모양새가 과히 나쁘지 않다. 그러나 주류들은 약간 다르다. 주류인 아이들은 손해보는 짓을 절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전교 1, 2등끼리 사귀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교 2등이 전학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약간은 불명예스러운 일이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내 보기엔 전학갈 정도는 아니었는데, 알고 보니 전교 1등 집에서 상대 남학생의 전학을 종용했다. 그것이 또 문제가 되어 전교 1등은 '왕따'가 되고 만다. 아이들에게 아이들만의 방식이 있다는 걸 어른들은 모른다. 나도 어른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 주변 아이들의 행태를 보며 혀를 찬다. 어쩌면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게 어른인 내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니 완득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아이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난쟁이, 엄마는 베트남 사람, 삼촌은 허우대만 멀쩡한 비정상인... 아버지가 돈을 버는 방식 역시 주류들이 외치는 정상적인 방식이 못된다. 완득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담임 똥주는 옆집에 살면서 사사건건 완득이 일에 참견하고 나서는 데다, 지키고 싶은 비밀을 온통 떠벌리는 통에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게 만든다. 매주 교회 가서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완득이는 착한 아이다. 노는 아이도 아니다. 공부를 좀 못한다 뿐이지 삐뚫어지지 않은 바른 아이다. 운동을 시작하고 목표가 생긴 후 완득이는 어쩌면 타고난 품성일지도 모를 성실함을 더욱 잘 발휘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을 나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실한 사람만이 끝을 볼 수 있다. 노력 뒤에 오는 그 무엇은 반드시 성실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 케이블 티비를 보다가 원더걸스의 선애가 원더걸스 멤버로 성공하기까지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걸 알게 됐다. 7년이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더구나 모든 걸 참고 인내하는 세월이었다면 더욱 길게 느껴질 게 틀림없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부끄러운 감정이 밀려 들었다. 요행이란 세상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한 순간이다. 완득이게도 그런 성실함이 엿보인다. 곁눈질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앞만 보고 달릴 아이다. 많은 상처가 있지만 상처를 상처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완득이라면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완득이의 미래가 장밋빛일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허나 분명한 건 미래는 그 누구도 알수 없다는 것.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에 제 몫을 다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는 사실. 늘 우리는 그걸 기억해야 한다. 여성 작가임에도 중성적인 느낌의 톡톡 튀는 문체를 보여 주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착한 주인공 캐릭터가 아주 아주 마음에 든다. 성공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무척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음을 훈훈하게 하기에 부족함 없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외 계층의 문제를 다뤘음에도 그다지 깊이가 없었다는 점은 조금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이런저런 문제들을 헤짚어 놓고는 수습이 미진하다는 느낌이랄까. 내가 좋아하는 가즈키의 더 좀비스 시리즈나 <GO>와 많이 비교가 되기도 했다.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쓰는 연습이 좀 더 필요하리란 쓴 소리를 마지막으로 리뷰를 마칠까 한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쓴 리뷰의 영향으로 접한 책이다. 하워드 진을 노엄 촘스키와 함께 살아있는 미국의 양심이라 부르는 이유를 책을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양심있는 지식인,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우뚝 선 그를 이해하는 데 책은 큰 도움이 됐다. 더불어 그가 쓴 <미국 민중사>를 꼭 읽어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뒀다. 그게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그랬다. 나는 아직도 <미국 민중사>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그가 젊은 세대를 위해 다시 쓴 <미국 민중사>를 읽게 된 것이다. 미국의 역사는 침략과 약탈로 얼룩진 역사였다. 콜럼버스는 개척자가 아닌 약탈자였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언 종족을 말살한 장본인이다. 미국의 독립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가진자를 위한 퍼포먼스였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었다. 링컨에 반기를 든 남부연합을 연방에 복귀시키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노예 폐지론을 이용한 것이다. 이쯤되면 하워드 진이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가진자와 지배자의 편이 아닌 민중의 입장에서 책을 서술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 단 것마냥 나는 답답했고 또 울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가진자가 아닌 못가진 자며 민중이기 때문이다. 가진자들의 생각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것을 용납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철저하게 경제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국의 이익이라는 명목하에 (사실은 몇몇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한 것)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많은 약소국들을 좌지우지하며 그 나라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들에게는 철저하게 보복 혹은 제재를 가했다. 심지어는 자국민들까지 속여가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6.25 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되었지만 결국 반목과 불신의 상태에서 5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반공, 멸공이란 미명하에 민주화를 철저하게 탄압했던 우리의 역사는 미제국주의(저자 역시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말하고 있다.)와 무관하지 않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잘못과 과오를 범한 미국.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경제논리 아래 지금도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 왜 미국은 동네 골목 대장 노릇을 자처하는 것일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자각하고 있다. 강력함에 대한 자각, 즉 새로운 욕구, 우리의 강력함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 말이다. ...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제국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 p. 155 미 정부는 과시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나는 짧은 역사를 가진 어린아이에 불과한 미국이 갑작스레 너무 많은 부와 힘을 갖게 되었기에,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미숙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누가 얘 좀 말려줬으면...) 차를 탔을 때 시야가 좁은 경우(특히 관광버스) 어지럼증을 느끼며 멀미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멀미하는 사람들은 시야가 확 트인 앞자리를 선호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역시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양한 시각을 가진 책들을 읽으면서 시야를 넓히지 않는다면 어지럽게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갈 길을 잃고 어두컴컴한 낯선 곳에서 토악질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90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수고로 만들어진 이 책이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주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쓴 리뷰의 영향으로 접한 책이다. 하워드 진을 노엄 촘스키와 함께 살아있는 미국의 양심이라 부르는 이유를 책을 보고 나서야 이해했다. 양심있는 지식인,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우뚝 선 그를 이해하는 데 책은 큰 도움이 됐다. 더불어 그가 쓴 <미국 민중사>를 꼭 읽어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뒀다. 그게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그랬다. 나는 아직도 <미국 민중사>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그가 젊은 세대를 위해 다시 쓴 <미국 민중사>를 읽게 된 것이다.
미국의 역사는 침략과 약탈로 얼룩진 역사였다. 콜럼버스는 개척자가 아닌 약탈자였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언 종족을 말살한 장본인이다. 미국의 독립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가진자를 위한 퍼포먼스였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을 일으킨 게 아니었다. 링컨에 반기를 든 남부연합을 연방에 복귀시키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노예 폐지론을 이용한 것이다. 이쯤되면 하워드 진이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가진자와 지배자의 편이 아닌 민중의 입장에서 책을 서술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묵직한 돌 하나 단 것마냥 나는 답답했고 또 울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가진자가 아닌 못가진 자며 민중이기 때문이다. 가진자들의 생각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것을 용납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철저하게 경제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자국의 이익이라는 명목하에 (사실은 몇몇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한 것)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고 많은 약소국들을 좌지우지하며 그 나라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들에게는 철저하게 보복 혹은 제재를 가했다. 심지어는 자국민들까지 속여가며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6.25 전쟁으로 국토는 초토화되었지만 결국 반목과 불신의 상태에서 5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반공, 멸공이란 미명하에 민주화를 철저하게 탄압했던 우리의 역사는 미제국주의(저자 역시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말하고 있다.)와 무관하지 않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잘못과 과오를 범한 미국. 그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자본주의라는 경제논리 아래 지금도 침략과 약탈의 역사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 왜 미국은 동네 골목 대장 노릇을 자처하는 것일까?
우리는 새로운 것을 자각하고 있다. 강력함에 대한 자각, 즉 새로운 욕구, 우리의 강력함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 말이다. ...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제국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 p. 155
미 정부는 과시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나는 짧은 역사를 가진 어린아이에 불과한 미국이 갑작스레 너무 많은 부와 힘을 갖게 되었기에,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미숙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누가 얘 좀 말려줬으면...)
차를 탔을 때 시야가 좁은 경우(특히 관광버스) 어지럼증을 느끼며 멀미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멀미하는 사람들은 시야가 확 트인 앞자리를 선호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역시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양한 시각을 가진 책들을 읽으면서 시야를 넓히지 않는다면 어지럽게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갈 길을 잃고 어두컴컴한 낯선 곳에서 토악질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90을 바라보는 노학자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수고로 만들어진 이 책이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사고할 수 있는 힘을 주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