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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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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딱 '한 번'씩 주어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외의 것, 계급과 재산, 환경, 건강 따위는 물론 동일 선상에 둘 수는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되기도 하는 말은 잘 사는 사람이든 잘 못 사는 사람이든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 단 한 번의 삶을 살고 생을 마감한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두 번째 엔딩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엔딩은 기존 청소년 소설의 외전을 모은 단편집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언뜻 한 번의 엔딩을 이미 맞은 듯 보이나, 이 단편집에서 이야기는 새롭게 구성되고 다양한 시점으로 그려진다. 언뜻 보면 '두 번째 엔딩'을 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두 번째 엔딩처럼 느끼는 것은 독자의 착각일 뿐, 이야기는 언제나 하나의 맥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이야기가 다른 조명에 비쳤을 뿐이다.


  정말 궁금한 게 있어요.  그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요.

  우리 모두가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묻는 말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 역시 끊임없이 묻는다. 사람이 돌아온 길을 자꾸만 뒤돌아보며 머뭇거리는 것은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더 좋은 길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길과 달리 시간은 거꾸로 거슬러 갈 수 없으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배의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그게 두려워 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채 머뭇거린다.


  청소년 소설을 통해 머뭇거리는 청소년에게 용기를 주었던 소설은, '두 번째 엔딩'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을 통해 용기는 생겼지만 그럼에도 계기를 찾지 못하고 망설이는 많은 청소년에게 괜찮다는 잔잔한 용기를 준다. '~해도 괜찮아'라는 제목의 힐링 도서가 베스트셀러 판매대를 휩쓸던 지난 몇 년처럼, 현대사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 '괜찮아' 이 앞으로 나아가서 후회할 수 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나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멈춘 채, 머뭇거릴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끝을 맞이한다.


  그 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로운 길을 찾으면 된다. 방향을 틀고, 뒤집고, 상상하면 얼마든 길은 나오고 이야기는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아직 나오지 않은 책이기에 내용을 스포일러 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단, 이것만은 이야기할 수 있다.


  청소년 소설은 내가 자라는 데 있어서 큰 원동력이었다. 기존의 장편소설이나 단편소설집도 유익하고 재밌었지만 청소년 소설이 좀 더 읽기 편하고, 내 또래집단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마음에 전해지는 감동은 여느 성인 소설 못지않다. 내 청소년 시절을 함께 했던 그때 그 찬란한 소설들. 소년을 위로해줘, 리버보이, 나의 아름다운 정원......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그때 그 이야기들의 외전은,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려야만 했다. 읽기 어렵고 버거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벅차서 순식간에 읽지 못하고 한 편 한 편 깊이 음미하며 읽었다. 청소년 소설이 왜 필요한지, 왜 우리나라 청소년에게 이런 소설이 필요한지, 또 청소년 소설을 성인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금 느끼는 시간이었다. 잠시 잊고 있던 순수함, 그 시절의 고통,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청소년 소설의 대부분이 '장편'이라 읽기 어렵다면, 단편으로 구성된 이번 '두 번째 엔딩'을 읽고, 흥미가 가는 청소년 소설을 구매해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각각이 외전이기 때문이다. 외전이라 하여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꼭 읽어보기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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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장폴 뒤부아 지음, 이세진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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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출간 전의 가제본을 받아 읽어본지라,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또한 결말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달라는 문구도 읽은 터라, 그 외의 스포일러 또한 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 일회독만으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한국 장편소설처럼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만이었다. 아무래도 외국소설인 만큼 좀 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소설 자체가 어렵다거나, 난해하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단지 그 안의 의미를 내 안에서 문장으로 구상하는 데 있어 쉽지 않다고 느낄 뿐이다.


이 책의 소개 문구로 '실패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해서, 나는 내내 화자가 실패한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왜 성실한 근로자이며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자 키우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 교도소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읽었다. (이게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이 소설은 실패보다는 관계 속에 그 초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화자가 회상하는 성장과정 속에서 화자의 이름은 거진 언급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에 와서도 그의 이름은 제대로 언급되는 경우가 없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혼자 남은 고요 속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세 망자를 느낄 수 있다며 그들이 주는 편안함과 그리움,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가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말해주는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느껴진다. 평범한 사람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체념한, 그러나 다정한 시선을 지닌.


우리는 쉽게 누군가를 판단한다. 특히 그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면, 그 실패 너머의 그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그의 실패가 그의 인생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 속에서 생활한 이였다. 누군가에게는 다정한 사람으로, 누군가에게는 째째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디즈니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그랬듯 다양한 감정들이 공존하기에, 악인은 악한 감정만을 갖고 있는 게 아니며 선인 역시 선한 감정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인물들의 여러 감정을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p. 155


화자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남긴 마지막 설교이다.


서평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소설의 재미가 얼마나 있을까.

서평단을 신청하며 적었었다. 너무 힘들다고. 힐링받고 싶다고. 소설은 잔잔하게 이렇게 나에게 힘이 되준다. 이 소설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당신에게 관용을, 타인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참 단순한 말, 우리 아버지께서 사람의 허물을 크게 보지 말라면서 늘 하시던 말씀이지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거든 축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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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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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보미 작가의 <작은 동네>의 서평을 몇 가지 읽어본 적이 있다. 사실 서평이라기보다는 인스타그램에서 책을 홍보하기 위해 쓴 편집자들의 간단하고 짤막한 소개문구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서평이라고 해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러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문구는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었다. 그 옆으로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가 있어서 나는 그 느낌을 생각하며 책장을 펼쳤다.


  책을 받아 읽기 며칠 전 나는 심은경 작가의 <설이>를 읽은 후였다. <설이>는 심은경 작가가 10년 만에 낸 성장소설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나는 과거의 작은 동네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화자를 보며 이 소설은 성장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책장을 덮은 지금도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히 틀에 부합하는 성장소설은 아닐지라도 화자는 변화의 지점을 맞이했다.


  보통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될 때에는 길게 길게, 누가 보든 신이 나서 스포일러를 마구 포함하고는 하는데 이 소설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읽었을 때 느낀 그 몰입감과 다음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 어쩔 줄 모르는 이 감정을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도 느꼈으면 좋겠다.


  앞서 말했듯 첫 시작은 성장소설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중후반부로 갈수록 소설 전체를 은은하게 지배하고 있던 불온하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정감이 독자를 잔심시킨다. 아니 그래서, 도대체? 를 연발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게 나의 어머니가 여러 번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지만 씩씩거리고 있었다. 소설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여러 차례 탄식을 내뱉고 흥분해서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


  최대한 스포일러를 자제하면서 몇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다.


  소설에는 많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언젠가의 소설들이 그랬듯 여자들이 성녀 혹은 창녀라는 프레임, 또는 그냥 살해당해 죽거나 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여성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중요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점도 아주 매력적이다.


  남자들이 보여주는 모습도 재미있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아버지, 그건 그 여자의 선택이었다며 끝까지 화자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겉으로만 화자의 비위를 맞추려는 남편. 본인들은 질문을 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끝내 화자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모습. 인상적이었다.


아, 후회를 한다는 건 아니야. 정말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거야.

······ 다른 선택······ 다른 삶······ 뭐 그런 거 말이야. p. 232

다른 선택, 다른 삶. 하지만 이런 건 그냥 하는 말에 불과하겠지. 얘, 생각해봐. 언제나 우리가 그 일을 선택할 가능성은 백 퍼센트인 거야. 내 말 알겠니? p.235


  소설 내에서 '엄마'는 선택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그 여자의 선택이었으니까. 라는 식으로. 후회하지 않느냐는 말에도 그다지 후회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다. 소설 초반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고 온 것들, 그러니까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렇기에 후회하지 않으려 한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끊임 없이 되돌아보고 있다. 아닌 척해도 결국 삶이란 그런 것이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내 마음 속에 자신이 떠나온 섬을 안고 있던 어머니. 작은 동네를 떠나 새롭게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 작은 동네를 품에 안은 화자는 닮았다. 닮을 수밖에 없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으나" 어머니와 딸이니까. 모전여전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또 입이 근질거린다.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부탁한다. 제발 읽어서 확인해달라.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선택은 절대적이다. '엄마'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여러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했다 믿지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네가 선택했잖아, 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백퍼센트인 것이다. <작은 동네>는 '백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선택된 선택지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읽고 나면 잔잔하게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어쩔 수 없던 선택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손보미 작가는 언제나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가 세심하게 관찰해낸 인간의 심리와 묘사에 찬사를 보낸다. 읽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다. 나 역시 화자처럼 내 안에 <작은 동네>를 간직하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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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은희경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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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희경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삶이 고착화된 인물들이다. 큰 새로움을 겪을 일 없는, 설사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근간을 흔들 만큼의 일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인물들이다. (물론 날씨와 생활의 아직 어린 화자는 예외다. 그녀에 대해서는 또 따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젊은이들을 그리 부러워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그리고 돈도, 능력 있는 친구도 갖고 있지 못하다. 뇌와 근육에 신선한 피가 흐르고 거기에 열정과 시간까지 넉넉하므로 그들 앞에는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나의 경우 그 과정을 거쳐 도달한 곳이 지금의 이 자리이다. 젊음으로 되돌아가서 그 힘든 과정을 되풀이해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보다는 이 지점에서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209면)

  20대를 찬양하는 글들은 많다. 그들의 젊음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 성장, 변화는 언제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그 과정은 몹시 지난하고 힘들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하지만 이에 관한 글은 적다. 최근 몇 년 사이 '힐링' 도서가 유행을 타면서부터 현 20대의 고통과 연민에 관심이 옮겨지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들 쉽게 말했으니 말 다했다.

  속된 말로 부모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금수저가 아닌 이상 20대, 사회초년생이 어떠한 기반을 갖고 있기는 어렵다. 기반이 없는 위태로운 환경에서 꿈을 꾸고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어떠한 욕망을 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의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30대가 되어 어느 정도 발판을 다진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였을 때 20대에 관하여 돌아보았을 때 "치기와 가난으로만 기억된다"고 말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안정된 기반은 정말로 안정된 것인가. 젊은 시절 멀리 떼어놓고 왔다고 믿었던 어린 날의 치기와 가난은, 그러니까 청춘은 정말 영영 잃어버린 20대만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래 벽에 걸어두었던 액자가 벽에 흔적을 남기듯 우리가 세월을 지내면서 잃어버렸다 믿었던 청춘 역시 마음속에 흔적을 남긴다. 이것이 은희경의 소설집 속 화자들에게는 상실과 실패와 같은 '구멍'으로 나타난다.

  최근 유행하는 닌텐도 게임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한국인들의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커뮤니티에 떠돌던 글이 있다. 분명히 힐링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에서 사람들은 돈을 벌고, 빚을 갚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무트코인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현실의 주식 부럽지 않은 투자 역시 성행한다. 기반을 다지기 어려운 현실, 부단히 기반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의 특징이 게임 속에서도 드러난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집에서 화자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치기와 가난으로 얼룩졌던 20대를 지나 어떻게 30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략 속에서도 후술되는 그의 가치관과 이야기를 통해 그가 20대를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본인은 치열하지 않았다고 느낄지라도 나는 견디는 모든 삶이 다 치열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이 있다. 분명히 있다. 모두 다 가지고 갈 수는 없다. 모르고 지나가는 일도 많지만, 때로는 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것을 덮어놓는다. 그리고 잊는다. 구멍 위로 덮어놓은 천에 먼지가 쌓인다. 구멍이 구멍처럼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바람에도 먼지는 날아가고, 천은 펄럭인다. 펄럭이는 소리는 구멍의 존재를 더 적나라하게 부각시킨다.


  당신에게는 그런 순간이 없었나요? 뜻하지 않은 낯선 한순간 자신의 존재와 부재 사이의 좁은 틈, 거기에 갇혀버린 듯한 공포스러운 전율을 느낄 때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당신 형 역시 우주 미아처럼 돌아올 주소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불현듯 두려움에 사로잡혔겠죠. 순간적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만난 셈이니까요.  (「의심을 찬양함」262면)


  소설집 속 성인 화자들은 젊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젊음이 주변에서 마냥 찬양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며, 젊음을 누리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다. 그 고통을 다시 한 번 감내하겠다 말할 만큼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처럼 '젊음은 치기와 가난'이었다고 회상하며 별거 아니었다는 듯 축소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젊은 날에 대한 아쉬움은 그들 안에 불티로 남아 미풍에도 크게 반응한다. 아무리 무던하게 가라앉혀도 틈만 나면 호시탐탐 살아날 기회를 노린다. 결국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직시하는 순간. 그 순간 좌절하게 된다. 그야말로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B는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경계선이 도처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심코 넘었다가는 곧바로 블랙홀로 빨려들어 어딘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가게 되는 경계선 말이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뿐,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모두가 그 경계선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날씨와 생활」60면)

  날씨와 생활의 화자 B는 몽상가다. 평범한 여중생이지만, 언제든 그 경계선을 넘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우연이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를 들면 숨겨진 부자 부모가 나타난다든가,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그런.) 그러나 그녀의 상상과 달리 현실에서 그녀를 찾아온 것은 수금원이었다. B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남자를 곤란하게 해줄 우연을 바라지만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B는 좌절하게 된다. 모든 성장의 과정이 그렇듯 B 역시도 좌절을 통해 성장한다. B가 바라는 방향이었든, 아니었든.

  소설 속 인물들은 지나간 젊음을 체념하고, 자신들은 더는 성장할 것이 없고 놀라울 것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그들의 확신은 타당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곧 무색해진다. 삶을 관통하는 좌절 앞에 잠시 말을 잃고 아연해진다. 인물들은 금세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좌절하는 순간 그들 내부에서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결코 이전의 사람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견고한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지만, 그와 동시에 간절하게 변화를 원한다. 무리에 소속되어 평균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특별하고 싶다. 젊음은 가난과 치기였으나 그것이 그립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걸 밀 용기도 재력도 없다. 우연을 바라게 된다. 뜬금없는 경계. 과거와 미래, 그 사이의 간극을 종이처럼 접어 만나게 하는 상상.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것은 망상이다.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것이고 그 자체가 감정을 갖는 일은 없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멸시하는 것은 결국 '나'다. 멸시를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한 없이 공허해진다. 내가 안정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 유약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 나는 한 번 더 기회를 얻는다고 느꼈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변화를 가져다줄 기적 같은 우연. 파랑새처럼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그들 주변을 맴돌고 있던 사인을 이제야 캐치한 거라고. 극적인 변화는 물론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비효과가 그렇듯 작은 파동은 언뜻 소소하게 보이나 삶의 궤도를 크게 바꿀 때도 있다.

  젊음만의 특권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꺼졌다고 느끼더라도 불티를 찾아보면 분명히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왔던 어느 한 장면처럼, 어느 순간 과거는 당신의 책장의 반대편에서 책을 밀어낼 것이다.

  해설을 쓴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은희경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날카로운 상처를 낸다. 읽고 나면 아릿한 느낌이 남는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긍정적인 기운이 감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리 긍정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더 변화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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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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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애한다면서요, 그거 사랑하고 공경한다는 뜻인데, 그래요,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뭐 인류애적으로라도요."


경애의 마음, 254쪽

  김금희 작가의 소설은 마치 잔물결이 이는 호수 같다.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조용하고 쓸쓸한 것 같은데, 잔물결이 이는 표면이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것만 같다.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작가를 만난 후, 이 작가의 장편소설은 또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을까 기대하던 차에 이렇게 사전서평으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영광이고, 행복하다.

 

  경애의 마음은 주인공 경애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자어인 경애(敬愛),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나는 가제본을 받아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가장 많이 집중해서 읽었다.

마음이라는 건 뭘까.

  어떤 때는 돌처럼 굳어 어떤 말에도 파동 하나 생기지 않다가도,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로 강하게 출렁거리는, 이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무엇이기에 단단한 육체를 잡고 함부로 흔드는 걸까. 왜 몸이 아픈 건 마음이 아픈 것보다 더 힘든 걸까.

  소설의 주인공 경애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잃었다. 호프집에서 일어난 화재 때문이었다. 그 친구를 통해 상실의 아픔을 알고, 오랫동안 아파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남들에게는 너무나 게으르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추모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방치하고, 시간 속에 내맡겨버리는 것이다.

  경애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마다 매번 약해졌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태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겠지만, 그것이 경애에게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샤워하기 위해 욕실로 가는 발걸음조차 너무 무겁고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힘들어서, 나를 잃어버릴까봐. 내 형태가 사라질까봐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게 고작인.

같은 시간 속에 상수역시 친구를 잃고 흐르는 시간 속에 멋대로 구겨져 흘러갔다. 묵묵히 일상을 견뎌내며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얼굴을 알기도 전부터 두 사람이 공통으로 잃은 친구를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온라인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를 통해 성인이 되어 새롭게 다가온 사랑이 남긴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같은 회사, 같은 팀이라는 필연을 통해 직접 대면하게 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은, 페이스북 페이지 언니는 죄가 없다를 통해 언니의 가면을 쓴 상수가 경애에게 전한 메시지였다. 경애는 사랑으로 인해 크게 상심했고, 마음을 폐기하고 싶다고 상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상수는, 언니는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야채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경애의 마음, 172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생긴 상처, 그 상처가 나를 집어삼키고 비참하게 만들 때,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을 방치하는 최선밖에 다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없애버리고 싶다. 마음을 폐기해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상수 역시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상수가 경애에게 건넨 말, 폐기하지 마세요. 스스로가 스스로의 아픔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는 해줄 수 없었던 말이다. 상수와 경애가 만나, 타인의 마음과 닿은 그 순간 일어난 변화다. 단순히 경애에게만 건네는 것이 아닌 상수 자신에게도 건네는 말.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건강하세요. 그것이 우리의 매뉴얼입니다.

  이 말을 경애는 꼭 쥐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자신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상수 역시, 자신이 건넨 이 말을 통해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으려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근래 들어 무척 힘들고 지쳐 있었다. 내 문제에 명확하게 답을 제시해주는 건 아니었지만 위로가 되어주는 말이었다.

 

  내 주위에 누군가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상실이라든가, 현실의 부당함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의-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 경애의 마음을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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