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늘 가능성으로 가득한 지평을 연다. 「녹시」의 번역이 열아홉 편 있다 해도, 『오뒷세이아』의 영어 번역본이 60권 있다 해도 또 다른, 또 새로운 번역본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번역은 원본이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살아 있게 만든다. 번역가가 하는 일은 원본을 훼손하거나 손상하는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살아 있도록 생명을 주고 되살리는 일이다. - P221
번역가는 원저자의 언어만 번역하는 게 아니라 침묵까지 번역한다. 번역은 언어의 빈틈을 다룬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읽고, 그 의미를 번역된 글의 여백에 눈에 보이지 않게 다시 침묵으로 담는다. - P208
[오뒷세이아』 4장에 나오는 해신(海神) 프로테우스는 사자, 뱀, 나무, 물 등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지만,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면 변신하기를 포기하고 진실을 들려준다. 번역도 때로는 그렇게 꽉 붙드는 일이다. 무수히 변하는(폴리트로폰) 원본을 고정하고 틈새에 스며 있던 의미까지 꽉 짜내어 진실을 듣기 위해서. - P205
어떻게 보면 결코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어떻게 하더라도 욕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번역가들을 미치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체셔 고양이가 말하듯 "미치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테니까". 사실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 P107
흔히들 말하듯이, 나는 판사이면서 배심원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나는 우유부단하고 애매모호한 성격 때문에 불가능에 접근해가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번역 행위가 그와 정반대로 가능에 접근하면서 결코 거기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샘 스페이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캐스퍼 거트먼은 나의 이런 태도를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으리라. "나는 양방향 중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사람 혹은 아무런 방향으로도 가지 않는 사람을 좋아해.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 그런 자는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취약해 갑자기 산산조각 나면서 사람한테 엎어진단 말이야."이 모든 사항은, 극찬을 받았던 번역서를 포함해 내 모든 작업에 대해 내가 느끼는 궁극적 불만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이것은 앞날에 모종의 반역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