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끝간 데 없이 차갑기만 한 눈으로 둘러싸인 히말라야 한가운데서 삶과 사투를 벌이는 산사나이들의 이야기가 내게는 뜨겁게 다가온다. 촐라체에 오르기 위해 제 발로 산으로 갔지만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산은 날카로운 얼음으로 사내의 살을 찢고 차가운 바람으로 희망을 도려내고 예고없는 눈사태로 절망을 부채질한다.

그들은 죽으러 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어찌보면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촐라체로 뛰어든 것이고 산과의 대결을 위한 출발은 공정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어줄 것이 없었던 산도, 처음부터 얻을 것을 기대하지 않은 형제와의 대결이. 하지만 산이 주는 시련과 절망 속에서 형제는 오기가 생긴다. 끝모를 분노가 얇아진 가슴을 뚫고 형제에게 오기를 불어넣는다.  형제를 떠난 사람들과 형제가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었던 애증들, 실패의 연속인 지루한 삶 속에서 그들을 일어나게 한 것은 삶에 대한 복수였고 서로에 대한 미움이었고 트라우마로 남은 과거의 것들에 대한 원망이었다.

옷에 묻은 눈처럼 그저 털어버릴 수만 있는 거라면 후련하겠건만 그럴 수 없는 마음의 짐들이었기에 촐라체에 오르는 동안 형제는 그렇게 고통스러웠나 보다. 막상 오른 정상은 기대보다 훨씬 아니었고 기쁨보다는 실망에 마음을 내주었다. 상민과 영교의 마음에 쌓인 서로에 대한 원망과 오해는 쌓이고 쌓여 그들을 결국 산에서 헤어지게 만든다. 상처의 근원이 다른 형제는 마음의 짐을 더는 과정에서 혹독한 피맛을 보게 된다. 과거의 망령들을 떨쳐버리지 못한 형 상민은 과거의 인물들과 다시 조우하면서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형에 대한 실망감과 빚만 남기고 죽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가까웠던 아저씨에 대한 분노에 마음을 다쳤던 동생 영교는 형을 이해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끈을 놓으면서 비로소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촐라체 한가운데서 형제가 싸운 건 산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다. 그리고 최후에 그들은 웃을 수 있었다.

내 앞에도 촐라체가 우뚝 서있다. 외모적으로 훌륭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내가 밟고 넘어가야 하니까. 어쩌면 넘는 동안의 고통스러운 과정 때문에 잔인하게 짓이길지도 모르겠다. 올라가다 방향을 잘못 틀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고 같은 자리만 빙빙돌다 가는 세월 잡기에는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참 다행이다. 한창 힘들고 제자리 걸음일 때 이 책을 만났으니. 고통의 무게를 잴 수는 없겠지만,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든 거구나라는 걸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앞서 간 사람들이 세워놓은 벽이 내게는 너무 높다.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답을 찾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가끔 너무 오랫동안 쉴 때도 있다. 그래도 요즘은 조금 앞으로 걷고 있다. 또 언제 헤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방향을 돌리지는 않으려 한다. 우선 나를 믿고, 나의 친구들을 신뢰한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에게 '의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내 일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감당해야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의 고통과 희생은 쓰게 삼켜 넘기고 멋지게 성장하고 싶다.        

상처입은 조개는 고통을 감싸고 인고의 세월을 견텨야만 비로소 진주를 잉태할 수 있다. 추한 것을 보지 못한 아름다움은 진부하다 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꽃핀다. 조금 힘들다. 하지만 알 것 같다. 내가 이 촐라체를 넘으면 그 어떤 생크림 케이크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그래서 뛰어가지는 못하더라도 천천히라도 걸어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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