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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대성당│레이먼드 카버│문학동네│2007.12.10
나는 단편을 유독 기피합니다. 어딘지 좀 가벼운듯 호도(糊塗)하여 그 짧은 이야기들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고작 원고지 몇 장으로 무슨 얘길 쓰겠단거야!' 라는 범박(泛博)한 어깃장이었지요. 그런데 작년 그리고 올해 우연히도 단편집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그 이야기들이 나의 오만을 보란듯 너그러이 포용합니다.
레이먼드, 그는 일상속에 비일비재하게 존재하는 -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했던 - 삶의 목소리로 진실에 닿습니다.
12편의 이야기는 다소 지루할 법하게, 혹은 의아하도록 - 과연 이것이 소설의 소재가 될까 싶은데 너무나 태연히 - 봄날 반짝이는 강물처럼 느긋하게 흐릅니다. 직장동료 부부와의 저녁 식사, 실직 후 쇼파 위 생활에 침잠한 남편과 칸막이 객실에서 기차를 잘못 타게 된 남자, 비타민을 팔고 있는 여자 등 나의 곁 누군가 경험했을 듯한 일상의 에피소드가 소재가 되는데 그 장면은 선명하고 가깝게 마주하다 방심의 찰나의 순간 간유리 너머로 바라보는 듯 께느르한 기분입니다. 몽롱함, 그 안에 조심스럽게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이야기들이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빌려 테이블 끝 아슬하게 얻어진 유리잔처럼 긴장의 끈을 바투 조여옵니다. 신산한 삶,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함께 빵을 먹고, 통화를 하며 마주 얹은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상의 행위로서 회복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은 텍스트 하나하나를 소화시키려는 듯 한템포 더 느리게 읽어내렸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아이를 잃은 슬픔의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안의 부부와 주문한 케이크를 찾아 가지 않는 무책임한 손님에게 화가 난 제과점 주인, 그들 관계의 시작점은 그렇게 어긋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밤을 지새워 빵을 만들어 팔아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제과점 주인의 삶을 향한 노여움, 아들의 8번째 생일날 사고로 아이를 잃게 된 부부의 절망은 막 구워낸 롤빵으로 위로됩니다. p. 142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했다. 어쩌면 고작 롤빵, 그러나 삶의 허기를 달랬던 롤빵. 명치 끝이 아릿합니다.
『대성당』에서는 아내의 맹인 친구의 방문이 탐탁치 않은 남편이 등장합니다. 잠든 아내의 탐스러운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는데도 그는 아내의 옷을 제대로 만져주지 않습니다. 어짜피 맹인은 볼 수 없으니까. 맹인을 향한 경시(輕視). 그 시간 우연히 TV에 대성당의 모습이 방영되고 노인은 대성당의 모습을 함께 그려주기를 바랍니다. 노인의 손을 얹고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가면서 그의 위약한 경계심은 봄날의 눈처럼 녹아내립니다. p. 352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딱 붙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p. 353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노인의 어두운 눈은 비록 타인의 손을 통해 대성당을 바라보지만 남자는 그 어둠을 통해 삶의 본질에 가까이 닿게됩니다.
그저 빵을 먹고 그림을 그리는 특별하지 않은 행위가 고된 삶의 비감함을 어루만지는 일, 그것이 레이먼드 카버의 힘일까요?
그리고 깊은 우연,
사고(思考)의 발화점, 그 곳에는 언제나 '김연수'가 있었습니다.
저자의 텍스트의 곧음이 역자를 만나 간결함을 더했습니다. 무심한 듯 툭툭 던져내는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더라도 이제 괘념치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으로 <대성당>을 만날 수 있는데 과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을 덧댄 <대성당>은 어떠할지 이런 순간이면 언어에 대한 갈증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내게 더할나위 없는 즐거움이지만 그 즐거움이 흔들어 놓은 나의 일상이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허우적거림이 깊어질 뿐입니다.
종이책읽기를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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