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현대사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 / 소나무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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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윈을 보면서 박정희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고 느꼈다. 2인자에 대해서 철저히 배격하고, 반상회 등을 통해 국민의 입과 귀를 통제하려고 애쓰며, 중앙 정보부를 통해 엄격한 감시체제를 만든 것은 너무나도 흡사하다. 장기 집권을 시도한 것과 정부 중심의 경제 정책을 운용한 것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지배층이 부정 부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용인하면서도 정작 네윈과 박정희 자신은 부정 부패가 적었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다.

그러나 네윈은 박정희와 달리, 자신의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그것이 초기 집권 시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었다. 물론 두 명 모두 친일을 했지만, 한국과 미얀마의 친일의 의미는 다르다. 네윈은 영국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일본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 두 지도자를 보면, 식민지였던 국가, 제3세계 국가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구분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명은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한 명은 한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통치 방식은, 독재의 형태로 비슷하였다.

제3세계에서 야심찬 엘리트 청년들이 군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려 하였다. 그리고 정치가들의 무능과 부패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들은 집권 초기에는 군인 다운 패기와 추진력으로 국가를 부흥시키려 노력하였고, 실제로 이들에 의해 제3세계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몰락은 비참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에 군부는 비참하게 몰락하였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군인'이었지 '정치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나라가 늦게 부흥되는 단점이 있더라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통치하는 것이 결국은 옳지 않았을까? 미얀마에서 계속되는 공산당의 반란과 소수 민족의 갈등, 한국에서 고착화된 분단의 문제 등을 살펴 볼 때 네윈과 박정희는 너무 자신을 과대 평가한 측면이 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국가'와 자신의 통치를 동일시하였다. 민중들의 지탄을 받아 가면서도 자신의 집권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어리석고 불쌍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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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카또오 노리히로 / 창비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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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평화헌법 폐기 주장은 우리가 양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고 일본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행동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평화 헌법 주장을 통해 역사에 대한 사죄 없이 자신들의 무장화와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침략의 피해 당사자인 한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결코 동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으로 그치지 말고,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평화헌법 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일본 민중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독일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오히려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침략 행위를 비판한다고 해서, 독일의 정체성Identity이 손상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침략 행위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대가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아시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았느냐'라는 식의 감정적이고 궤변적인 주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패전 후의 군국주의자들과 그들의 후계자인 자민당 세력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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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일본을 말하지 말라
후카사쿠 미쓰사다 / 서울기획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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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보면서 저자가 일본의 문화를 너무 미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환경에 맞는 문화를 가지게 마련이다. 쌀이 다른 잡곡류보다 영양상태가 월등히 뛰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집을 여름 중심으로 지어서 겨울에는 춥게 지낸 점, 고기를 잘 안 먹고 밥으로 영양을 보충한 것이 '자랑'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본 문화의 모습들을 건축술이나 생산력의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고, 미화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저자는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서 은연중에 우월감을 내비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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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론의 변용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0
아오키 다모쓰 지음, 최경국 옮김 / 소화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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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경제 성장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일본인의 특수성과 일본인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것들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적용시켜 본 결과,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경영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1990년대에 들어 일본의 경제 불황이 심해지면서 일본적인 특성에 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80년대 까지는 일본을 본받으려는 움직임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일본문화 담론이 가진 한계를 잘 지적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회 구조는 무척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유럽 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하였다. 일본인들이 집단적이라고 하지만, 독일의 집단주의적인 모습을 보면, '오직 일본만이' 집단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 다루었던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일본인과 일본 문화, 일본인과 집단 주의' 등 수많은 책들이 이러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였던 것 같다.

재미있었던 것은, 향후 일본에서의 국제화 논쟁이, 한국에서의 국제화 논쟁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쇄국적'인 입장에서는 일본과 외국과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여 일본의 국제화에는 한도가 있고, 외국인이나 이문화와의 상호 교류도 어디까지나 일본 문화의 특질에 입각하여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나라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것을 현대화한 서편제 같은 영화를 예로 들어, 우리 전통적인 것을 잘 살리면 세계에서도 인정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성이 결여된 전통 문화의 세계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현대 음악은 해외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가부키 같은 연극이 해외에서 받는 반응은 단지 '매우 특이하다'는 것일 뿐, 외국인들의 감성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개방적'인 입장에서는 지금과 같이 국제 사회 속에서 일본이 외국과 상호 교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서는 제도나 조직도 개방하여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고 외국어와 일본어를 병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한참 논의되고 있는 '영어 공용어 사용' 문제를 보는 것 같다.

사실 민족이라는 것이 비록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이 많이 밝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민족 혹은 민족성의 구분을 완전히 뛰어 남는 국제화가 있을 지 의문이다. 청나라가 한족을 점령한 후, 청나라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지배층인 만주족이 오히려 피지배층인 한족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영어를 많이 써야 세계화, 국제화에 대비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한국 혹은 일본이 미국에 흡수되는 것을 바라는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의 일본 문화론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단순히 일본 대 서구(미국)의 비교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또한 일본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반대로 비하해서도 안 된다. 역사적인 사실과 사회 경제적 자료를 통하여 일본의 문화에 관한 담론은 더욱 체계화되고 정교해져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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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 사이로 본 일본문화
노성환 / 교보문고(교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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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기독교가 한국보다 훨씬 먼저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한국의 그것보다 크지 않다. 나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글을 관심 있게 읽게 되었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성장하지 못한 것은 집단주의의 영향력이 가장 큰 것 같다.

회사의 사장의 종교 혹은 마을에서 믿는 종교에 따라서 개인의 종교가 결정될 수 있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에서 기독교 아니 다른 어떤 외국의 종교(이슬람교, 힌두교(?))가 들어와도, 불교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많이 숙이지 않는 한에서는 수용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저자는 일본인의 현세적인 모습도 원인으로 들고 있다. 성과 속이 어우러져서 유흥가 거리 속에서도 있는 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 이외의 국가들도 과연 그렇게 '종교적'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도 수능시험을 앞두고서는 절이나 교회에 신도가 많아지면서 자녀들의 좋은 성적과 입학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만, 시험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썰물처럼 빠져 버린다. 그리고 다시 세상적으로 살아간다. 비단 우리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가 먼저 보급된 서양에서도 단순히 종교가 '종교'로서의 역할만 했다기보다는, 병자 치료와 학교 교육, 친목 도모 등의 세속적인 역할도 같이 감당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인들이 특별히 종교성이 없다고 보는 견해는, 일본인들을 무시하는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일본의 특이성을 '비웃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인들이 집단성을 이용하여, 기독교인이 회사를 경영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기독교를 전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할복문화는 고대에는 야만적으로 이루어졌다. 내장을 끄집어내어 던지며 죽는 경우가 많았으며, 한 일자 또는 열 십자 형 등 다양하게 배를 갈랐다. 근세에 들어서면 할복한 다음 창자를 들어내는 것은 반항의 표시로 간주되어 금지되었고 대신 옆에서 가이샤쿠가 목을 쳐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렇게 잔인한 것이 일본에서만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일본만이 이렇게 잔인하다고 보기보다는, 세계 모든 나라가 고대나 중세 심지어 근세까지도 이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만연했던 것 같다. 서양의 화형이나 한국의 '찢어 죽이기'등도 역시 할복만큼이나 잔인한 것 같다.

물론 할복은 자신이 직접 배를 가른다는 것에서 일반적인 사형방식과 다르지만, 패전한 장수가 할복하는 것은 이미 죽음이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사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살로서의 '순수한' 의미로 할복을 한 경우도, 다른 나라에서도 -형식은 다양하겠지만-자살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본 고유의 특이한 문화라고만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을 듯 하다.

할복은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본의 고유 전통이라고 해서, '일본적'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무시와 비하를 전제하는 것 같다. 보다 보편적이고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할복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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