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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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와그의책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말의 엄숙성에 딴죽을 겁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말이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고 어려워야 하냐고. 그의 소설에 따르면, 일견 멋져 보이는 지식이나 지성의 언어도 뒤집어보면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왜 '보도방'이라고 하면 되고 '보지 도매'라고 하면 안 될까요? '보도방'이 '보지 도매방'의 줄임말이니 '보도방'이라고 하나 '보지 도매방'이라고 하나 차이가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지성의 언어(엄숙한 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른바 '식자'들은 그네들의 입맛에 맞춰 말로 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식자들의 언어 속에서 현실은 왜곡되고 조작됩니다. 식자들은 그 왜곡된 현실 속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언어는 합리화를 위해 고도로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그들에게 만들어주는 세계는 가짜 세계입니다. 살 만 하고 견딜 만 하게 가공된 세계입니다. 합리화를 모르는 언어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만이 진짜 세계를 살아갑니다. 진짜 세계는 늘 팍팍하고 괴롭습니다.

늘 팍팍하고 괴로운 진짜 현실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욕밖에 없습니다. 하층민들의 언어가 거칠고 막돼먹은 것은 그들이 하루하루 부딪히며 사는 생활 자체가 거칠고 막돼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현실은 지랄 같아서 욕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욕은 솔직합니다. 그것이 현실과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생생한 욕은 곧 생생한 세계입니다.

이기호는 이것을 압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 모인 그의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대부분이 문맹자들입니다. 그들은 '글/활자'를 모릅니다. 고상하게 말할 줄 모르고 고상하게 쓸 줄 모르며, 때로는 아예 어떤 말도 못하고 어떤 글도 못 씁니다. 이기호는 이런 식으로 말의 엄숙함에 맞섭니다. 그는 욕-말-글(활자) 순으로 올라가는 상승구조에 시비를 겁니다. 욕은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지만 말은 그것을 한 번 에둘러 표현하고, 글은 그것을 더 꼬아서 표현합니다. 욕은 날 것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말은 거기서 도망가고, 글은 아예 그것을 부정합니다.

이기호가 보기에 식자들의 언어는 현실도피의 언어입니다. 그들은 공중정원에서 저희끼리 아옹다옹 살아갑니다. 때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지만 그뿐입니다. 때로 아래를 향해 뭐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뿐입니다. 이기호는 이게 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으로, 일자무식한 사람들의 언어로 소설을 씁니다. 쉬운 말로 무거운 현실을 노래({버니})하기도 하고, 어려운 말로 우스운 현실을 짐짓 강변({최순덕 성령 충만기})하는 척하기도 하면서 말을 가지고 놉니다. 말은 엄숙한 무엇이었다가 그의 소설에서는 그냥 놀잇감이 됩니다. '엄숙한 말'의 권위는 이렇게 조롱당합니다. 발가벗겨집니다. '엄숙한 말'들이 우리에게 '엄숙할 것을' 요구했던 이유는, 그들의 텅 빈속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음이 벌겋게 드러납니다.

이기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갑니다. 그의 단편소설들에는 유난히 환각이나 환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현실 속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보여줍니다. 그 환상들은 그러나 도피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식자들의 엄숙한 말이 만들어내는 '살 만 한' 가상 세계와는 다릅니다. 그 환상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었다가, 마지막에는 꼭 그 징그러운 정체를 드러냅니다. {햄릿 포에버}에서 주인공은 햄릿을 보았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봅니다. {머리칼 서신}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여인을 성녀로 보았다가 마지막에는 메두사로 봅니다. {백미러 사나이}는 눈을 감고 뒤를 보면서 즐거웠다가, 눈을 뜨고도 뒤를 보게 되면서 인생을 망칩니다.

이렇듯 이기호가 보여주는 환각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 '환각'의 세계 속으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도망가려다 좌절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세계는 도망가려 하기 전의 세계보다 훨씬 더 무섭고 솔직합니다. 환각에서 깨어나 다시 보는 세계는 과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이기호는 그래도 환각을, 환상과 상상을 권합니다. 아프지만 상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 익숙해지지도 말고 현실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아픈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상상은 '엄숙한 말'의 거짓 권위에 속아서 꾸는 허황된 꿈과는 다릅니다. 그 꿈에 권위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꿈은 욕으로 꾸는 꿈입니다. 솔직해지기 위해 꾸는 꿈입니다. 더러운 것을 인정하기 위해 꾸는 꿈입니다.

우리는 '위를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공중정원의 식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세계도 사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 봤자 팍팍하고 지긋지긋한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사실 어디에도 '행복한 위쪽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피라미드는 가짜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좌절하게 됩니다. 더 불행해지고 더 처절해집니다.

문제는 저 위의 허공이 아니라 딱딱한 우리의 발밑입니다. 이기호가 보여주는 꿈은 우리에게 발밑을 내려다보게 합니다. 그는 지독한 환각이 우리를 상승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현실을 바로, 그리고 가까이 보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집은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으로 끝나고,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 모자가 파종한 씨감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집 앞, 어느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정말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눈앞에 보이는 아무 땅이나 파보아라. 지상에서부터 약 십오 센티미터 정도만 파고들어가면, 그곳에 당신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당신이 상상치도 못했던,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있을 테니...... 주변이 온통 시멘트 천지라고? 철물점에 가서 시멘트 깨부수는 망치를 사라, 이 친구야. 시멘트 밑에 뭐가 있겠는가?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가볍지만 충분히 아픈 소설집입니다. 여기에 모인 소설들은 크게 휘두르는 어퍼컷이나 훅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세기의 잽들입니다. 한 방 크게 맞아야 넘어질 것 같았던 우리는 그러나 잽 몇 방에 무너지고 맙니다. 세계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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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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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없이는 말도 태어날 수 없다. 침묵은 말이 움트는 터전이다. 말의 가치는 그 말을 품고 있던 침묵에 의해 결정된다. 침묵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오지 않고 말의 뒤엉킴 속에서 기계적으로 생산된다. 그 말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 말들은 소음에 가까우며, 피카르트는 그래서 이러한 말들을 "잡음어"라고 이름 붙인다.

바야흐로 "잡음어"의 시대다. 말들은 어디에나 흘러넘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는 텔레비젼이며 라디오, 온갖 인터넷 매체들에서 쏟아지는 말들로 시끄럽다. 이 세계에서, 정적의 순간은 밤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말의 낮이 끝나면 말의 밤이 시작되고, 말의 밤이 끝나면 다시 말의 낮이 시작된다.

말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서로 뒤엉켜있다. 그 뒤엉킴 속에는 뼈와 살이 되는 말도 있고, 독이 되는 말들도 있으며, 들리지 않은 채로 흩어져버리는 공허한 말들도 있다. 문제는 그 뒤엉킴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뒤엉킴 속에서 길을 잃는다. 말의 포화와 포연은 우리의 정신을 흐려놓는다.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은 점점 기계적인 것이 되어가고, 그 기계적인 듣기-말하기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정적과 침묵의 장소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가 보지만 "잡음어"들은 우리의 탈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잡음어"의 감옥에 갇혀있다.


피카르트는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침묵"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그에게 침묵이란, 그저 고요하기만 한 정적과는 대별되는 것이다.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말이 그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 뿐이다." 15p) 그에게 침묵은 말을 배태하는 자궁이다.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말들은 위태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세계도 위태롭다. 세계는 말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침묵은 "실체를 갖고 현존하는 원현상"이다. 그는 책 여기저기서 "현존성, 실체성, 원현상"등의 개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가 잡음어의 "현상성"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잡음어의 언어들은 그저 하나의 "파생된 현상"에 불과하다. 그 언어 속에는 근원적인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 언어들은 그저 언어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실체가 없다. 잡음어가 지배적인 세계는 피상적인 세계다. 이 세계에서 "존재"는 "현상"으로 대체된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실체를 갖고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덧없는 "현상"으로 일어났다가 스러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지는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과 닮아있다. 피카르트는 잡음어가 지배하는 세계, 즉 "존재" 없이 "현상"만으로 충만한 세계에서 인간은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더이상 능동적으로 사상과 사물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사상과 사물 편에서 인간을 향해 달려들고, 인간은 거기에 흡수된다. 이 "대상화"의 문제는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이란 프롬의 "존재"와 직결된다.)

피상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자동생산되는 "현상의 소용돌이"로서의 세계는 공허하다. 그래서 피카르트는 현상의 근원으로서의 "침묵"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는 루소와 같이 "전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시의 잡음어들을 피해 전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회피일 뿐이라고 쓴다. 그에게 "침묵"이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침묵"에 접근해야 한다. 그저 회피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거기에서도 침묵을 만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거대한 도시의 소음을 전원으로 운반/분배할 뿐이다. 곧 전원 역시 소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130p)"

이 책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침묵"이라는 원형상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침묵이라는 자궁 속에서 나오지 않은 말들의 해악에 대해 경고한다. "침묵"을 "이야기"하는 그의 언어들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책은 이곳 저곳에 밑줄 그을 만한 경구들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침묵의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증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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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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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삶을 구성한다. 어디에 사는가, 어떤 건물에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도시 노동자와 농민의 공간은 다르며, 그래서 그들의 삶도 다르다. 도시인들 가운데에서도, 부유한 노동자들의 공간과 빈곤한 노동자들의 공간은 같지 않다. 자본가들의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거대도시는 이렇듯 서로 다른 계층들의 서로 다른 공간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거대도시의 각 공간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섞이기도 하며, 경계면을 녹여 따뜻하게 만나기도 한다. 거대도시의 이러한 공간적 복합성은 그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이기도 하다.


도리스 레싱은 아프리카 태생의 영국인이지만, 런던에서 머물렀다. 이 책 {런던 스케치}는, 제목 그대로 런던이라는 거대도시를 이리 저리 배회한다. 창고에서 혼자 아기를 낳고 그 아기를 유기하는 여자아이를 다룬 첫 작품 <데비와 줄리>는 독자에게 이 책을 페미니즘 소설집으로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차례차례 이러한 짐작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소설은 런던이라는 유서 깊은 도시 위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도시는 거대하지만 개인은 작다. 작을 뿐더러 그들은 연약(vulnerable)하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구걸하는 여인과 전 사회복지부 직원으로서 만나기도 하고(사회복지부), 피곤한 직장인과 택시운전사로 만나기도 한다.(폭풍우) 가족들 역시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며(새 까페, 장미밭에서) 이혼한 남녀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자꾸 교차한다.(그 여자, 흙구덩이)

사람들은 만나면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고, 가끔은 각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타자와의 대면은 항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로맨스 1988) 그래서 만남에는 기술과 원칙이 필요하다.(원칙) 그러나 '사랑' 앞에 이 원칙은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다. '사랑'은 언제나 상처를 준다. 그것은 사랑이 우리를 눈 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 무엇'을 두려워한다.(그 여자) 사랑은 그 두려움의 반대급부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랑은 만들어진채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져내리는 모래성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을 과신하는 우리는 그래서 항상 사랑에 실패한다. 실패한 사랑은 다시 상처가 된다. 상처는 마음을 닫게 만들고, 닫힌 마음으로는 다음의 만남 역시 삭막해질 뿐이다.

'런던'이라는 추상적 공간은 변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 공간은 급격히 변화를 거듭한다. 숲은 공원으로 몰리고 숲이었던 자리에 빌딩이 세워진다. 나무뿌리들이 뒤엉켜있던 지하에는 이리저리 지하철 터널이 뚫린다. 어제 물방앗간이 있던 자리에 오늘은 근사한 까페가 들어선다. 공간이 변화하듯 사람들도 변하고 만남도 변한다.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어쩌면 피해갈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따로 서 있다. 가족이라고 해도 그렇고 부부라고 해도 그렇다. 소통의 방법론을 고민하지 않는 만남은 충돌일 뿐이며, 충돌의 결과는 부상뿐이다. 이런 삭막한 만남들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누가 더 다쳤으니 그나마 나는 괜찮다, 라고 위안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자궁병동, 응급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이러한 충돌들을 너그럽게 바라본다. 본격 페미니즘 소설('본격'의 조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런던 스케치}는 여성성의 가치를 소중하게 그려낸다. 아기 참새를 보듬어 키우는 어미 참새처럼(참새들), 출산의 후산물들을 땅바닥에 흘리며 첫째 사슴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더라도 갓 낳은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사슴처럼(공원의 즐거움), 호전적인 남성과는 달리 여성에게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때로 그것이 이성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도리스 레싱은 여성성의 온기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다. {런던 스케치}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따뜻하게 읽히는 소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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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4-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뜻하셨나요? 전 표지의 새벽처럼 으슬으슬 오싹했어요. 꽤나 특이한 작가인건 분명해요. ^^ 헤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하이드 2005-04-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근데, 별이 하나네요?

dustystuff 2005-04-2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 깜박했나봐요 -_-;;
쨋든 만나서 반갑네요^^
 
이미지의 힘 - 영상과 섹슈얼리티 동문선 문예신서 182
아네트 쿤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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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는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항상 콘텍스트 사이에서만 존재하고, 그 "사이" 공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그 사이공간은 하나가 아니다.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 역시 분화된다. 어떤 주제(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따라서 그 주제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이" 공간들의 연구와 함께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이미지도 그렇다.

그런데 한 번 "재현"된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의미를 갖게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권력을 지닌다. 우리는 이미지가 가진 권력에 의해 그 이미지를 "보는 자"로서의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다시말해서, 이미지는 조작되지만, 우리도 그 이미지에 의해 조작된다. 관람자(보는 사람), 그리고 독자(읽는 사람)는 그래서 항상 이미지(보이는 대상), 텍스트(읽히는 대상)와 긴장관계 속에 있다. 보는 행위나 읽는 행위가 여러 차원에서 신중하게 고찰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아네트 쿤의 {이미지의 힘: 영상과 섹슈얼리티}는 그래서 "이미지"라는 주제를 여러 겹의 다른 문제들로 해체한 뒤에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테면, "복장전도"라는 소재에 대한 저자의 접근방식은 이렇다. 첫째, 복장전도가 나타나는 영화 텍스트 자체를 분석한다. 둘째, 그 영화 텍스트를 생산하고 구축하는 영화 제작과 관련된 콘텍스트들을 분석한다. 셋째, 그보다 더 넓은 사회적/문화적 콘텍스트들을 분석한다. 책에서 이 각 단계는 정확히 분리된 세 부분의 텍스트로 구성된다. 분리된 세 단계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일(해석하는 일)은 역시 독자의 몫이다. 아네트 쿤은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 텍스트가 또다른 권력으로서 독자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을 막으려 한다고 쓴다.

저자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이미지와, 이미지를 재현하는 시스템, 재현된 이미지의 의미(권력)가 관객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의 논지는 로라 멀비의 영화관람이론과 여러 모로 닮아있지만, 이미지의 주변부에 대해 좀 더 넓게 살핌으로서 그보다 더 멀리 나간다.

이미지는 하나의 기호이며, 기호는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역사/문화/사회적 콘텍스트들에 의해 방향이 결정된다. 의식/무의식적으로 서사의 기술은 발달하지만, 그 서사의 내용은 그보다는 더디 발달하며, 오히려 답보하기도 한다. 아네트 쿤은 소프트 코어 포르노 사진들과, 복장전도가 등장하는 영화들, 그리고 성병에 관련한 선전영화들을 소재로 삼으면서 그 이미지들이 '성차'를 고정시키고, 그 고정된 '성차'에 의존하는 시스템(가부장)을 강화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옷 바꿔입기(복장전도)"가 등장하는 영화들에서는 이 "바꿔입기"가 어떤 맥락에서 재현되는지가 문제다. 만약 그것이 코미디 영화라면, 관객들은 주인공이 여장을 했거나 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관객들이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당황해하는 여주인공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복장전도라는 소재 자체는 원래 성차를 흐리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있다. 옷은 성차를 확실히 드러내주는 사회적 상징이다. 남녀가 옷을 바꿔입는 일은 그래서 그 상징 자체를 위협하거나 조롱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행위가 코미디 영화 속에서 소비됨으로서, 그 행위의 상징성은 거세되고 웃음만이 남는다. 관객들은 이미 그 남자/여자가 여장/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복장전도가 재현되는 두 번째 경우는 스릴러 영화에서다. 스릴러 영화들에서는 관객들도 그 사람의 정확한 성별을 끝까지 알 수 없다. 이 영화들은 여자인 줄 알았던 범인이 사실 여장한 남성이고, 남자인 줄 알았던 범인이 사실은 남장한 여성이었다는 서사의 "전복"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이 경우에서는 옷을 바꿔입은 그 사람들이 어떤 인물들로 그려지는가가 문제인데, 저자가 분석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바꿔입은 자들"은 "범인"이며 "성도착자"들인 것으로 그려진다. 결국 코미디 장르 바깥에서의 "복장전도"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일"이 되고, "복장전도"의 행위로 인해 성차가 흐려지는 일 역시 "나쁜 일"이 된다. 결국 두 형태의 영화들 속에서 복장전도는 모두 그 상징성을 거세당한다.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가부장에 복무한다. 하지만 저자는 성병에 관련한 도덕영화들을 다룬 마지막 장에서 "검열" 행위 자체가 하나의 생산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버텨 읽기", "거슬러 읽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미지 역시 다양한 문맥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미지의 힘 자체 보다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그 조작된 권력을 얼마만큼 간파하는가가 문제다. "학술"로서의 페미니즘과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저자는 쓴다. 방법론의 확장이 실천에 영향을 주는 바가 분명히 있고, 실천의 확장이 방법론에 영향을 주는 바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가지의 에세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간파하는 읽기", "버티고 거스르는 읽기"의 방법론을 확장하고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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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 - 한국 사회문화사 01
이효인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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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 작품은 창작되는 시대의 향을 품고 태어난다. 작품을 보면, 작품을 품었던 그 시대의 자궁 속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영화도 그렇다. <위대한 독재자>와 <시민 케인>을 당대의 역사적 정황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작품이 당대를 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당대에만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것일수록 작품은 스스로를 오래 지속하며, 그 향을 새로운 시대의 수용자들에게 전파한다.

이렇게 해서 예술의 수용자들은 하나의 예술 작품 속에서 두 가지 역사와 대면하게 된다. 하나는 그 작품 내부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자 내부의 역사이다. 이 두 역사는 서로 길항하기도 하고 접촉하여 충돌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역사의 만남, 그리고 서로간의 의미작용이 수용자가 예술작품을 즐기면서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한편 대개 모든 영화는 암실에서 다수를 대상으로 상영된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밝은 스크린 뿐인 암실 안에서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영화가 재미없는 것은 우리가 그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결국 그 영화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이야기는 하나지만 관객은 여럿이다. 결국 다수의 관객이 하나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적응하거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다시 말해 그 영화가 재미있다, 재미없다, 라고 여기는 것은) 그 관객들이 무언가 비슷한 판단 체계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판단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관객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 그 자체, 즉 관객들이 몸담고 있는 역사이다.

이효인은 여기에 착목한다. 근대의 한국 영화는 결국 근대의 한국 역사다. 영화는 한국의 근대를 어떻게든 지나갈 수 밖에 없다. 다만 어떻게 지나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결국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근대를 한국 영화가 어떻게 지나가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한 관찰기록이다. 그리고 그가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산출해낸 사고틀의 범주는 쾌락, 근대, 강박, 여자이다.

한국의 근현대는 난맥상이다. 일제의 억압에 해방되고 나서 친미/친일 정부가 들어섰고, 처절한 전쟁을 보낸 뒤에는 군사정권의 반공 파시즘이 득세했다. 헐벗고 굶주리던 나라가 몇십년 만에 흥청거릴 만한 경제수준을 지닌 국가가 되었고, 쫄딱 망해버릴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와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대책 없고 정신 없는 역사였고, 그만큼 야만적인 역사였다.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멘탈리티는 이리하여 기형적으로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그 과정은 이렇다. : 그들은 이 잔혹한 "근대"의 역동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쾌락"을 희구했다. 하지만 그 쾌락은 시대의 암흑 속에서는 언제나 "강박" 밑에 존재하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강박적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이 책은 그 과정들을 당대의 영화를 들여다봄으로서 증명한다.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는 당대의 잔혹함에 비해 턱없이도 무력했던 한 지식인(장선우)의 자기 변호를 읽어내고, <쉬리>에서는 전쟁의 본질을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멜로적 장치와 스펙타클로 우회하려는 영화의 전략을 읽어낸다.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면서 남성 관객들이 "지켜주지 못한 공통의 '누이'"에 관한 강박을 씻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박하사탕>을 통해 역사에서의 전면적인 여성 배제를 통찰한다.

저자의 전작인 <한국영화역사강의 1>의 속편으로 기획되었다는 이 책은, 결국 이 땅의 영화들이 이 땅을 살아온 모든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변절과 저항, 혁명과 좌절의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웅변해준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에서 그치치 않는다. 그는 시대의 질곡을 정면에서 파헤친 영화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음을 계속해서 지적한다.

모든 영화는 시대와의 대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을 갖고 있다. 관객이 의도하는 바와 영화가 담고 있는 바가 일치했을 때 관객들은 즐거워하겠지만, 그 즐거움은 결국 현실 외면의 죄책감을 가릴 구실이 될 뿐이다. 솔직한 영화는 관객들에게 불편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편한 영화가 필요하다. 서로 다른 역사가 생산적으로 만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새로운 역사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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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2005-04-12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적 최근의 영화까지 나오나 봅니다. 내가 본 영화가 얼마나 거론됐는지 궁금한데.. 영화갖고 이야기하면 참 재미있을것 같고 흥미있습니다. 이 책이 궁금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