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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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삶을 구성한다. 어디에 사는가, 어떤 건물에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도시 노동자와 농민의 공간은 다르며, 그래서 그들의 삶도 다르다. 도시인들 가운데에서도, 부유한 노동자들의 공간과 빈곤한 노동자들의 공간은 같지 않다. 자본가들의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거대도시는 이렇듯 서로 다른 계층들의 서로 다른 공간이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거대도시의 각 공간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섞이기도 하며, 경계면을 녹여 따뜻하게 만나기도 한다. 거대도시의 이러한 공간적 복합성은 그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이기도 하다.


도리스 레싱은 아프리카 태생의 영국인이지만, 런던에서 머물렀다. 이 책 {런던 스케치}는, 제목 그대로 런던이라는 거대도시를 이리 저리 배회한다. 창고에서 혼자 아기를 낳고 그 아기를 유기하는 여자아이를 다룬 첫 작품 <데비와 줄리>는 독자에게 이 책을 페미니즘 소설집으로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작품들은 차례차례 이러한 짐작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소설은 런던이라는 유서 깊은 도시 위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도시는 거대하지만 개인은 작다. 작을 뿐더러 그들은 연약(vulnerable)하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만나고 헤어진다. 구걸하는 여인과 전 사회복지부 직원으로서 만나기도 하고(사회복지부), 피곤한 직장인과 택시운전사로 만나기도 한다.(폭풍우) 가족들 역시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며(새 까페, 장미밭에서) 이혼한 남녀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자꾸 교차한다.(그 여자, 흙구덩이)

사람들은 만나면서 상처를 주고 받기도 하고, 가끔은 각자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타자와의 대면은 항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로맨스 1988) 그래서 만남에는 기술과 원칙이 필요하다.(원칙) 그러나 '사랑' 앞에 이 원칙은 사정없이 무너져 내린다. '사랑'은 언제나 상처를 준다. 그것은 사랑이 우리를 눈 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그 무엇'을 두려워한다.(그 여자) 사랑은 그 두려움의 반대급부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랑은 만들어진채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무너져내리는 모래성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을 과신하는 우리는 그래서 항상 사랑에 실패한다. 실패한 사랑은 다시 상처가 된다. 상처는 마음을 닫게 만들고, 닫힌 마음으로는 다음의 만남 역시 삭막해질 뿐이다.

'런던'이라는 추상적 공간은 변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 공간은 급격히 변화를 거듭한다. 숲은 공원으로 몰리고 숲이었던 자리에 빌딩이 세워진다. 나무뿌리들이 뒤엉켜있던 지하에는 이리저리 지하철 터널이 뚫린다. 어제 물방앗간이 있던 자리에 오늘은 근사한 까페가 들어선다. 공간이 변화하듯 사람들도 변하고 만남도 변한다.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어쩌면 피해갈 수 없는 삶의 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따로 서 있다. 가족이라고 해도 그렇고 부부라고 해도 그렇다. 소통의 방법론을 고민하지 않는 만남은 충돌일 뿐이며, 충돌의 결과는 부상뿐이다. 이런 삭막한 만남들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누가 더 다쳤으니 그나마 나는 괜찮다, 라고 위안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자궁병동, 응급실)

그러나 도리스 레싱은 이러한 충돌들을 너그럽게 바라본다. 본격 페미니즘 소설('본격'의 조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런던 스케치}는 여성성의 가치를 소중하게 그려낸다. 아기 참새를 보듬어 키우는 어미 참새처럼(참새들), 출산의 후산물들을 땅바닥에 흘리며 첫째 사슴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더라도 갓 낳은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사슴처럼(공원의 즐거움), 호전적인 남성과는 달리 여성에게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때로 그것이 이성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도리스 레싱은 여성성의 온기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다. {런던 스케치}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따뜻하게 읽히는 소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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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4-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뜻하셨나요? 전 표지의 새벽처럼 으슬으슬 오싹했어요. 꽤나 특이한 작가인건 분명해요. ^^ 헤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하이드 2005-04-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근데, 별이 하나네요?

dustystuff 2005-04-2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했습니다. 깜박했나봐요 -_-;;
쨋든 만나서 반갑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