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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침묵 없이는 말도 태어날 수 없다. 침묵은 말이 움트는 터전이다. 말의 가치는 그 말을 품고 있던 침묵에 의해 결정된다. 침묵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오지 않고 말의 뒤엉킴 속에서 기계적으로 생산된다. 그 말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 말들은 소음에 가까우며, 피카르트는 그래서 이러한 말들을 "잡음어"라고 이름 붙인다.
바야흐로 "잡음어"의 시대다. 말들은 어디에나 흘러넘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는 텔레비젼이며 라디오, 온갖 인터넷 매체들에서 쏟아지는 말들로 시끄럽다. 이 세계에서, 정적의 순간은 밤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말의 낮이 끝나면 말의 밤이 시작되고, 말의 밤이 끝나면 다시 말의 낮이 시작된다.
말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서로 뒤엉켜있다. 그 뒤엉킴 속에는 뼈와 살이 되는 말도 있고, 독이 되는 말들도 있으며, 들리지 않은 채로 흩어져버리는 공허한 말들도 있다. 문제는 그 뒤엉킴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뒤엉킴 속에서 길을 잃는다. 말의 포화와 포연은 우리의 정신을 흐려놓는다.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은 점점 기계적인 것이 되어가고, 그 기계적인 듣기-말하기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정적과 침묵의 장소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가 보지만 "잡음어"들은 우리의 탈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잡음어"의 감옥에 갇혀있다.
피카르트는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침묵"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그에게 침묵이란, 그저 고요하기만 한 정적과는 대별되는 것이다.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말이 그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 뿐이다." 15p) 그에게 침묵은 말을 배태하는 자궁이다.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말들은 위태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세계도 위태롭다. 세계는 말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침묵은 "실체를 갖고 현존하는 원현상"이다. 그는 책 여기저기서 "현존성, 실체성, 원현상"등의 개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가 잡음어의 "현상성"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잡음어의 언어들은 그저 하나의 "파생된 현상"에 불과하다. 그 언어 속에는 근원적인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 언어들은 그저 언어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실체가 없다. 잡음어가 지배적인 세계는 피상적인 세계다. 이 세계에서 "존재"는 "현상"으로 대체된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실체를 갖고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덧없는 "현상"으로 일어났다가 스러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지는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과 닮아있다. 피카르트는 잡음어가 지배하는 세계, 즉 "존재" 없이 "현상"만으로 충만한 세계에서 인간은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더이상 능동적으로 사상과 사물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사상과 사물 편에서 인간을 향해 달려들고, 인간은 거기에 흡수된다. 이 "대상화"의 문제는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이란 프롬의 "존재"와 직결된다.)
피상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자동생산되는 "현상의 소용돌이"로서의 세계는 공허하다. 그래서 피카르트는 현상의 근원으로서의 "침묵"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는 루소와 같이 "전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시의 잡음어들을 피해 전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회피일 뿐이라고 쓴다. 그에게 "침묵"이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침묵"에 접근해야 한다. 그저 회피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거기에서도 침묵을 만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거대한 도시의 소음을 전원으로 운반/분배할 뿐이다. 곧 전원 역시 소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130p)"
이 책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침묵"이라는 원형상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침묵이라는 자궁 속에서 나오지 않은 말들의 해악에 대해 경고한다. "침묵"을 "이야기"하는 그의 언어들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책은 이곳 저곳에 밑줄 그을 만한 경구들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침묵의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증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