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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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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뭐길래. 애서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내뱉었을 말이다. 모든 '중독'이 다 그렇지만, 책이나 활자에 중독되는 것만큼 고약한 일도 몇 없다. 증상은 이렇다.  

-책이 없으면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지하철에도 못 탄다.  

-평생 안 읽을 지도 모르는 책을 몇 권씩이나 사들인다.

-남의 책에 욕심을 낸다.  

-책 냄새를 맡으면 아픈게 낫는다고 믿는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자의로는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  

-서재를 갖고 싶다는 이유로 아파트 전세 대출을 한다.  

여기까지는 책 중독의 초기나 중기 증상일 뿐이다. 말기 증상은 이렇다.  

-출판사에서 일하거나 출판사를 차리고 싶다.  

-도서관 사서와 결혼하거나 도서관과 결혼하고 싶다.  

-서점에서 일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  

모든 치명적인 질병이 그렇듯 이 증상이 말기의 말기에 이르면 이 사람은 죽는다. 실제로 '책'이라는 산업에 몸 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다.  

책이 뭐길래. 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매일 몇 번씩 되내이는 말일 거다. 한 명의 독자로 남아 있는 것이 편했을 뻔 했다고 후회하는 순간은 분명 온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그 순간 '취미'로서의 여유와 재미는 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일'로서의 피로와 열패감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온다. 모든 것의 안과 바깥은 다르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특히 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 애서가에게 책은 취미가 아니라 삶이며 삶 이상이다. 따라서 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취미를 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삶을 업으로 삼는 것이다. 당연히 삶에 매달리는 것처럼 업에 매달리게 된다. 책으로 살고 책으로 죽는다. 이 사람들에게 '책이 뭐길래'는 '사는 게 뭐길래'다. 그리고 그게 나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얼마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우물 안 개구리 햇님 생각일 뿐이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 천지다. 책을 좋아해서 책을 업으로 삼고, 책으로 먹고 살며 책으로 꿈꾸는 사람들. 책의 희망을 믿는 사람들. 책에서 세상의 미래를 읽는 사람들. 책을 쓰고 찍어내고 팔고 나누면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 세상이라는 책의 한 페이지로라도 기꺼이 쓰이기를 원하는 사람들. 차라리 한 권의 책이었으면 싶은 사람들.  

<노란 불빛의 서점>은 그 사람들을 대변하고, 나는 그 사람들 중의 한 명일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셰익스피어는 죽어도 햄릿은 죽지 않는다. 찰나를 영원으로 만드는, 책이라는 마술의 일부일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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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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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힘이 세다. 세계는 무수히 분절된,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층위에서는, 나도 이야기고 너도 이야기다. 존재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고, 소멸은 소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여기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언제나 이야기가 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이야기가 힘이 센 것은 아니다. 오직 재미있는 이야기만이 힘이 세다. 재미없는 이야기(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도 이야기긴 하다. 그러나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베이징 올림픽에서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다)가 되고,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박태환은 잘생겼다)가 되고, 마침내는 죽이는 이야기(나는 목욕탕에서 박태환의 알몸을 본 적이 있다)가 되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 사실의 차원을 넘어, 주관적 사실, 주관적 감상의 차원으로 진화하고, 결국은 반 구라의 차원까지 올라온 이야기만이 영원하다.

구라, 구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실을 담은 이야기가 영원한 까닭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실이 언제나 반-구라 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진실은 메마르고 꺼칠하기만 해서 가문 논바닥처럼 짝짝 갈라진다. 거기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자라지 못한다. 진실의 황무지에서 참한 이야기의 싹이 돋으려면 구라가 거기 물을 줘야 한다. 이야기 없이 진실은 전달될 수 없으므로, 구라 없이 진실은 전달되지 못한다. 진실과 구라는 항상 한 몸이다. 고로 이야기에서 사실과 구라를 해부하여 다른 접시에 담아 보려는 모든 노력은 헛되다.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접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진실로 듣는 한 짝의 귀 뿐이다.

보험사정인들은 '사실'을 원했고 파이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내가 읽은(들은) <파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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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도시 백서 - Snow White City
이신조 지음 / 열림원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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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대로다. '만토'는 가상의 도시다. 그것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도시이다. 강물이 흐르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네 어쩌구가 아니라 저기 물이 흐르게 할테니 가서 사시오 어쩌구다. 만토의 시민들은 모집되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 안에 갇힌다. 그리고 살아간다. 살아가다가 묻는다.

이 도시는 가상의 도시야, 가짜 도시란 이야기지. 그럼 나는? 이 가짜 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물론 나도 가짜다. '가상도시백서'의 인물들에게 정체성이란 그저 몇 줄의 컴퓨터 데이터, 혹은 몇 장의 서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늘 두 가지 일을 한다. 가짜 일(표면적인 직업)과 진짜 일(모종의 국가계획을 위해 비밀리에 주어진 임무). 사람들은 가짜 일을 하는 서로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늘 의심한다. 정말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시민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결합은 요원하다. '진실'은 통제소인 시청에만 있는데, 이 시청의 명칭이 '거울탑'이다. 거울은 비추되 속을 보여주지 않고, 받은 것을 돌려주되 자기 것을 내주지는 않는다. 진실은 거울 속에 갖혀있다. 아무도 서로가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 사실 나도 내가 정말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싶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기계화된 사회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박동하는 심장을 가졌고, 그 심장의 피는 늘 뜨겁고 붉다.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싶다. 외부에 대한 체념은 사실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아무도 정말 체념하지는 않고, 내가 누구이며 내 욕망이 누구의 것인지, 또 이 욕망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끝없이 궁금해한다. 그래서 담배갑속에 비밀 쪽지를 넣고 음지에서 불법적인 일을 의뢰한다. 아닌 줄 알면서 기대하고 거짓인 줄 알면서 믿는다.

'스노우 화이트'라는 술집에 모인 여섯 사람들도 그렇다. 사실 가상도시 '만토'의 시민들은 이미 한번 죽은 사람들이다. 제각기 목적이 있어서 이 도시의 시민이 되기를 자원했지만, 가상도시의 시민이 되고나서 그들은 그들 역시 '가상'시민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그 중의 몇몇은 여기에 끌려 이 도시에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쨋든 그들은 뽑혔고, 만토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폐쇄와 가식의 도시인 만토의 시민이다.

술집 '스노우 화이트'에 한 여자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여자가 여섯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여자는 거울탑에 살고있고, 사실 이 여자 자체가 거울이다. 그 여자가 정말 무얼 하는지, 정말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여섯 사람은 그 여자에 비친 자기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되쏘인 자신의 이미지를 보면서 묻는다. 저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는 여기 나는 누구인가.

물론 대답은 없다. 거울은 대답하지 않는다. 여섯 사람은 독백처럼 자신의 생활을 진술한다. 하지만 진술할 뿐이다.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누군가는 파멸의 길에 접어들기도 하지만 변하지는 않는다. 여섯 사람들 중 아무도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못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는 생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울이 변한다. 그 여자, 거울탑에 살고 있는 그 여자가 변한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거울탑 위층의 남자를 사랑해버린 그 여자가 변한다. 그 여자는 그 사랑 때문에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진실을 궁금하게 했고 그 어두컴컴한 허위와 은닉의 내부에 불을 밝혔다. 안타깝게도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만토에서 추방된다. 이 여자가 여섯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균열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여자 스스로가 이미 균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만토의 균열이었고 결국 만토시민들의 균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추방된다. 발목이 잘려 불구가 된 채로.

1세계, 2세계, 3세계라는 식의 세계구분과, 북한과 남한을 연상케하는 제국/공화국의 구분, 그리고 통일국가로서의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연합국의 존재와 그 상징도시로서의 가상도시 '만토'의 설정은 이 소설을 현실과 굉장히 닮은, 그러나 현실에서 약간 엇나간 공간에 던져놓는다. 그 공간은 현실도 아니고 상상도 아닌,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모호한 공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카프카와 헉슬리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고, 때로는 폴 오스터를 생각케 한다.

가상도시 만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실세계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한 가지다. '가상'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가상도시 만토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다르지만 충분히 닮았다. 여섯 사람 각각의 이야기는 사실 현대인 내부의, 외부에 대한 여섯 가지 투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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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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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와그의책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말의 엄숙성에 딴죽을 겁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말이 엄숙해야 하고 진지해야 하고 어려워야 하냐고. 그의 소설에 따르면, 일견 멋져 보이는 지식이나 지성의 언어도 뒤집어보면 사실 별 것 아닙니다. 왜 '보도방'이라고 하면 되고 '보지 도매'라고 하면 안 될까요? '보도방'이 '보지 도매방'의 줄임말이니 '보도방'이라고 하나 '보지 도매방'이라고 하나 차이가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지성의 언어(엄숙한 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리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른바 '식자'들은 그네들의 입맛에 맞춰 말로 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식자들의 언어 속에서 현실은 왜곡되고 조작됩니다. 식자들은 그 왜곡된 현실 속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언어는 합리화를 위해 고도로 발달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그들에게 만들어주는 세계는 가짜 세계입니다. 살 만 하고 견딜 만 하게 가공된 세계입니다. 합리화를 모르는 언어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만이 진짜 세계를 살아갑니다. 진짜 세계는 늘 팍팍하고 괴롭습니다.

늘 팍팍하고 괴로운 진짜 현실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욕밖에 없습니다. 하층민들의 언어가 거칠고 막돼먹은 것은 그들이 하루하루 부딪히며 사는 생활 자체가 거칠고 막돼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현실은 지랄 같아서 욕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욕은 솔직합니다. 그것이 현실과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생생한 욕은 곧 생생한 세계입니다.

이기호는 이것을 압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 모인 그의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대부분이 문맹자들입니다. 그들은 '글/활자'를 모릅니다. 고상하게 말할 줄 모르고 고상하게 쓸 줄 모르며, 때로는 아예 어떤 말도 못하고 어떤 글도 못 씁니다. 이기호는 이런 식으로 말의 엄숙함에 맞섭니다. 그는 욕-말-글(활자) 순으로 올라가는 상승구조에 시비를 겁니다. 욕은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지만 말은 그것을 한 번 에둘러 표현하고, 글은 그것을 더 꼬아서 표현합니다. 욕은 날 것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말은 거기서 도망가고, 글은 아예 그것을 부정합니다.

이기호가 보기에 식자들의 언어는 현실도피의 언어입니다. 그들은 공중정원에서 저희끼리 아옹다옹 살아갑니다. 때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지만 그뿐입니다. 때로 아래를 향해 뭐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뿐입니다. 이기호는 이게 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으로, 일자무식한 사람들의 언어로 소설을 씁니다. 쉬운 말로 무거운 현실을 노래({버니})하기도 하고, 어려운 말로 우스운 현실을 짐짓 강변({최순덕 성령 충만기})하는 척하기도 하면서 말을 가지고 놉니다. 말은 엄숙한 무엇이었다가 그의 소설에서는 그냥 놀잇감이 됩니다. '엄숙한 말'의 권위는 이렇게 조롱당합니다. 발가벗겨집니다. '엄숙한 말'들이 우리에게 '엄숙할 것을' 요구했던 이유는, 그들의 텅 빈속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음이 벌겋게 드러납니다.

이기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갑니다. 그의 단편소설들에는 유난히 환각이나 환상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현실 속에 있을 법하지 않은 일들을 보여줍니다. 그 환상들은 그러나 도피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식자들의 엄숙한 말이 만들어내는 '살 만 한' 가상 세계와는 다릅니다. 그 환상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었다가, 마지막에는 꼭 그 징그러운 정체를 드러냅니다. {햄릿 포에버}에서 주인공은 햄릿을 보았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를 봅니다. {머리칼 서신}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여인을 성녀로 보았다가 마지막에는 메두사로 봅니다. {백미러 사나이}는 눈을 감고 뒤를 보면서 즐거웠다가, 눈을 뜨고도 뒤를 보게 되면서 인생을 망칩니다.

이렇듯 이기호가 보여주는 환각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 '환각'의 세계 속으로 도망갈 수 없습니다. 도망가려다 좌절하고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세계는 도망가려 하기 전의 세계보다 훨씬 더 무섭고 솔직합니다. 환각에서 깨어나 다시 보는 세계는 과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이기호는 그래도 환각을, 환상과 상상을 권합니다. 아프지만 상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 익숙해지지도 말고 현실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말고,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아픈 상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상상은 '엄숙한 말'의 거짓 권위에 속아서 꾸는 허황된 꿈과는 다릅니다. 그 꿈에 권위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꿈은 욕으로 꾸는 꿈입니다. 솔직해지기 위해 꾸는 꿈입니다. 더러운 것을 인정하기 위해 꾸는 꿈입니다.

우리는 '위를 향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공중정원의 식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세계도 사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 봤자 팍팍하고 지긋지긋한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사실 어디에도 '행복한 위쪽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피라미드는 가짜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좌절하게 됩니다. 더 불행해지고 더 처절해집니다.

문제는 저 위의 허공이 아니라 딱딱한 우리의 발밑입니다. 이기호가 보여주는 꿈은 우리에게 발밑을 내려다보게 합니다. 그는 지독한 환각이 우리를 상승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현실을 바로, 그리고 가까이 보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집은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으로 끝나고,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 모자가 파종한 씨감자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집 앞, 어느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이 정말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눈앞에 보이는 아무 땅이나 파보아라. 지상에서부터 약 십오 센티미터 정도만 파고들어가면, 그곳에 당신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당신이 상상치도 못했던,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있을 테니...... 주변이 온통 시멘트 천지라고? 철물점에 가서 시멘트 깨부수는 망치를 사라, 이 친구야. 시멘트 밑에 뭐가 있겠는가?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



{최순덕 성령 충만기}는 가볍지만 충분히 아픈 소설집입니다. 여기에 모인 소설들은 크게 휘두르는 어퍼컷이나 훅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세기의 잽들입니다. 한 방 크게 맞아야 넘어질 것 같았던 우리는 그러나 잽 몇 방에 무너지고 맙니다. 세계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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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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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없이는 말도 태어날 수 없다. 침묵은 말이 움트는 터전이다. 말의 가치는 그 말을 품고 있던 침묵에 의해 결정된다. 침묵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오지 않고 말의 뒤엉킴 속에서 기계적으로 생산된다. 그 말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 말들은 소음에 가까우며, 피카르트는 그래서 이러한 말들을 "잡음어"라고 이름 붙인다.

바야흐로 "잡음어"의 시대다. 말들은 어디에나 흘러넘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는 텔레비젼이며 라디오, 온갖 인터넷 매체들에서 쏟아지는 말들로 시끄럽다. 이 세계에서, 정적의 순간은 밤에도 찾아오지 않는다. 말의 낮이 끝나면 말의 밤이 시작되고, 말의 밤이 끝나면 다시 말의 낮이 시작된다.

말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서로 뒤엉켜있다. 그 뒤엉킴 속에는 뼈와 살이 되는 말도 있고, 독이 되는 말들도 있으며, 들리지 않은 채로 흩어져버리는 공허한 말들도 있다. 문제는 그 뒤엉킴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뒤엉킴 속에서 길을 잃는다. 말의 포화와 포연은 우리의 정신을 흐려놓는다.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은 점점 기계적인 것이 되어가고, 그 기계적인 듣기-말하기는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정적과 침묵의 장소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가 보지만 "잡음어"들은 우리의 탈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잡음어"의 감옥에 갇혀있다.


피카르트는 그래서 다시 우리에게 "침묵"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그에게 침묵이란, 그저 고요하기만 한 정적과는 대별되는 것이다.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말이 그치는 곳에서 침묵은 시작된다. 그러나 말이 그치기 때문에 침묵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 비로소 분명해진다는 것 뿐이다." 15p) 그에게 침묵은 말을 배태하는 자궁이다.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말들은 위태로우며, 그렇기 때문에 "침묵과의 관련을 잃어버린" 세계도 위태롭다. 세계는 말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침묵은 "실체를 갖고 현존하는 원현상"이다. 그는 책 여기저기서 "현존성, 실체성, 원현상"등의 개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그가 잡음어의 "현상성"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잡음어의 언어들은 그저 하나의 "파생된 현상"에 불과하다. 그 언어 속에는 근원적인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 그 언어들은 그저 언어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실체가 없다. 잡음어가 지배적인 세계는 피상적인 세계다. 이 세계에서 "존재"는 "현상"으로 대체된다.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실체를 갖고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덧없는 "현상"으로 일어났다가 스러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논지는 에리히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과 닮아있다. 피카르트는 잡음어가 지배하는 세계, 즉 "존재" 없이 "현상"만으로 충만한 세계에서 인간은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더이상 능동적으로 사상과 사물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사상과 사물 편에서 인간을 향해 달려들고, 인간은 거기에 흡수된다. 이 "대상화"의 문제는 프롬이 {소유와 존재}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피카르트가 말하는 "침묵"이란 프롬의 "존재"와 직결된다.)

피상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자동생산되는 "현상의 소용돌이"로서의 세계는 공허하다. 그래서 피카르트는 현상의 근원으로서의 "침묵"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는 루소와 같이 "전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도시의 잡음어들을 피해 전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회피일 뿐이라고 쓴다. 그에게 "침묵"이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침묵"에 접근해야 한다. 그저 회피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거기에서도 침묵을 만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거대한 도시의 소음을 전원으로 운반/분배할 뿐이다. 곧 전원 역시 소음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130p)"

이 책은 세상 여기저기에서 "침묵"이라는 원형상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침묵이라는 자궁 속에서 나오지 않은 말들의 해악에 대해 경고한다. "침묵"을 "이야기"하는 그의 언어들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책은 이곳 저곳에 밑줄 그을 만한 경구들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침묵의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증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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