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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피해자 - 스토킹과 사법 정의에 대한 어느 기자의 기록
곽아람 지음 / 생각의힘 / 2026년 5월
평점 :
_ 서사에 대한 소유권을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책을 써야만 하는 당위였다. (p.60)
곽아람 작가가 스토킹 피해자가 되어 약 6년간 소송을 이어가며 무너진 일상과 고통을 기록한 책이다. 읽는 내내 작가의 당사자성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스토킹은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차에 치이는 것 같은 재난에 가까웠다. 아무 이유 없이 스토킹을 당하고, 피해자다움을 요구받으며, 법원과 검찰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어주지 않는다. 피해자는 약자의 위치에서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과연 사회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의 사법 시스템을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고, 어떤 검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건의 향방이 갈리는 현실. 그렇다면 나약한 개인은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복불복 게임처럼 운에 자신의 삶과 안전을 맡길 수는 없기에, 작가는 결국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일상은 더욱 망가졌다. 회복하기 어려운 감정의 골짜기로 깊이 빠져드는 과정이 너무도 처절했다. 사회적 자원도 있고, 글을 쓰고 기록할 힘도 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자 신분일 때와 피해자 신분일 때 세상이 보여주는 온도차였다. 취재 기자로서 경험했던 경찰서와, 피해자로서 마주한 경찰서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검찰과 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취재가 시작되자’ 빠르게 태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시스템이 가진 기만성과 권력의 비대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읽는 내내 수많은 인덱스를 붙이며 읽은 책이다. 앞으로 남은 재판에서 부디 엄벌이 내려지기를, 더 나아가 스토킹과 성범죄 같은 범죄에 대한 처벌이 더욱 무거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법은 피해자의 피와 눈물을 먹고 자란다.”(p.183)라는 문장이 오래 남았다. 그 수많은 피와 눈물이 더는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이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목록에 남아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를 함께 읽고 회자한다면, 그 힘이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해본다.
많이많이 읽었으면 한다.
_ 처음 선배가 회사에 사건을 보고하라고 했을 때도 한참을 고민했다. 회사에서 ‘역시 여기자들은 안 돼. 남자기자라면 겪지 않을 사건에 휘말리다니 귀찮아. 앞으로는 여기자를 더 뽑지 말아야겠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내가 여자 후배들의 앞날을 막게 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중략) 일하는 여성으로 산다는 건 항상 자격증명을 요구한다. 원치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후배 여성들의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p.30-31)
_ 그러나 피해자가 되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깨달았다. 그런 믿음은 그간 내가 약자였던 적이 없어서 가질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내가 속했던 세계가 지나치게 말끔했다는 것을. 세상은 울퉁불퉁한데 나는 그간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고, 그런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형사사법 시스템이란 피해자가 물에 빠져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딱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목까지만 건져주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알던 세계의 기만성에 대해 생각했다. (p.271)
_ 피해자는 항상 서사를 빼앗긴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 있는 피해자에게는 대체로 무관심하고, 피해자가 죽어야만 그제야 관심을 기울이며 입에 올린다. 죽은 피해자는 말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는 남들에 의해 서술된다.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