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 - 시야를 열어주는 휴머니즘의 대답들
앤드루 콥슨 지음, 허성심 옮김 / 현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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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삶의 우연성, 즉 삶의 궤적을 완전히 바꿔놓는 사건들의 무작위성에 큰 흥미를 느낍니다. 사실 일상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죠. (중략) 다시 말하자면 우연성이란 게 엄밀히 말해 과학은 아니지만 소설을 전개하기 위한 출발점을 제공해줍니다. (p.205, 이언 매큐언)

하지만 실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예요. 저는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우연이나 뜻밖의 발견이 차지하는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진화 과정을 살펴볼 때 우연이라는 요소를 거의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종의 이야기를 역경 속에서 분투하는 영웅의 이야기처럼 만들고 싶어 하니까요. 그런 서사는 일종의 오만함을 심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겸손의 태도와는 어긋나는 것이죠. (p.306, 앨리스 로버츠)

이 책은 <What I Believe>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한 31명의 대담을 엮은 기록이다. 인본주의를 중심에 두고, 그 안에서 각자가 믿는 가치관과 삶의 태도가 펼쳐진다.

사실 인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바탕으로 지구 생태계를 위협해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AI의 등장은 전혀 다른 형태의 위협을 불러왔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삶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때로는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판단력이 기술에 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결국 인본주의의 토대를 뒤흔드는 새로운 위기다.

이 지점에서 책 속 ‘우연성’에 대한 사유가 유독 오래 남았다. 이언 매큐언과 앨리스 로버츠가 말하듯, 우리의 삶과 역사, 진화와 발견은 인간의 의지나 능력보다 수많은 우연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우연은 과학처럼 설명할 수 없지만, 삶의 방향을 틀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연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 어쩌면 오늘날 AI가 인간의 능력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역시, 인류가 얼마나 계획하지 못한 사건과 뜻밖의 발견들 위에서 미래를 쌓아올려 왔는지를 보여주는 예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에는 AI나 기술적 위협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가치,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인간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는 대담을 읽다 보면, 인간이란 원래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찾고, 우연을 해석하며,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연성과 겸손, 그리고 인간만이 가진 해석의 능력—그 모든 것이 인본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AI 시대에 오히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더 선명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AI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를 찾아야만 기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이 의미를 찾기 위해 보이는 본능적 행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AI가 흉내 내기 어려운 어떤 ‘본질’을 찾는 일이 아니라, 우연과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를 잃지 않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AI가 판단하는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해석하고 방향을 고르고 이야기로 엮어내며 살아가야 하니까.



불확실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새로운 증거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필요할 때 관점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어서 장점으로 평가됩니다. (p.21, 짐 알칼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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