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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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누군가 다시 입겠지'라며 헌 옷 수거함에 옷을 넣으며 했던 막연한 기대는 현실이 아니다. 153개의 추적기로 살펴본 헌 옷의 여정은 대부분 태워지거나 매립지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p.45)

헌 옷이 정말 ‘다시 누군가의 옷장으로’ 돌아갈까? 이 책은 그 막연한 믿음을 산산이 깨뜨린다.

헌 옷에 하나하나 추적기를 달아 실제 여정을 따라가 본다. 우리는 ‘재활용된다’고 믿었지만, 현실의 헌 옷은 재활용이 아니라 그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버려질 뿐이었다.

1. 한국은 중고 의류 수출국 세계 4~5위라고.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사실 패션에 엄청나게 민감한 민족이다.

2. 중고 의류 수출은 통계상 ‘재활용’으로 잡힌다. 한국 땅 안에서 매립이나 소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활용’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재활용이라기보다 ‘쓰레기 수출’에 가깝다.

3. 한국의 많은 옷은 말레이시아 조호르주 항구에 도착한 뒤, 다시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흩어진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국가는 중고 의류 수입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속은 느슨하다. 헌 옷은 ‘기부품’이나 ‘이삿짐’으로 분류되어 들어오고, 결국 매립되거나 소각되는 식으로 처리된다.

4. 인도 파니파트는 이른바 ‘헌 옷의 수도’로 불린다. 한국은 가장 많은 헌 옷을 보내는 나라 중 하나로, 전체 헌 옷 수입 중량의 27%가 한국에서 온다고 한다.

5. 폐기된 헌 옷이 소각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 물질은 주변 지역 사람들의 호흡기 질환을 부르고, 수질·대기·토양 오염은 피부병 등 또 다른 질병을 낳는다.

6. 헌 옷의 ‘재활용 공정’이라고 불리는 일은, 실제로는 표백하고, 말리고, 공장으로 나르고, 다시 갈아 섬유로 만드는 일이다. 마스크도 없이, 맨발로 일하는 노동자들. 인도 파니파트의 열악한 현장을 보며, 이 구조에 책임있는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는가 묻게 된다.

7. 선진국은 중고 의류 문제를 자국 안에서 해결하지 않는다. 규제가 없으니 기업도 달라질 이유가 없다. H&M, 자라, 유니클로 등 패스트패션 브랜드 매장마다 놓인 헌 옷 수거함 역시 말레이시아, 아프리카, 인도 등지로 향한다.

8. 기업은 ‘좋은 일을 한다’고 말하지만, 그 옷들 역시 결국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단지, 우리의 눈앞에서만 사라질 뿐이다.

9. 옷 쓰레기를 진짜로 줄이기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적인 소비만으로는 부족하다. 대량생산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기업이 ‘필요한 만큼만’ 만들도록 하고, 남은 재고는 함부로 폐기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

10. 유럽은 2026년부터 판매되지 않은 옷과 신발 등을 폐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과연 미뤄도 되는 문제일까. 옷을 사고 버리는 일은 '지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다. 그 아픔이 주로 먼 나라에서 발생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p.209)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지구가 아픈 것보다 사람이 아픈 것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인도 파니파트의 표백 공장을 다녀온 저자가 마주한 얼굴들. 그 얼굴을 기억하는 그는 이제 더 이상 옷을 가볍게 수거함에 넣지 못한다고 말한다. 옷을 오래 입고, 새 옷을 살 때도 오래 입을 수 있는지부터 따져본다고.

우리가 누리는 권리가 누군가의 고통 위에서 세워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권리라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의 시작과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화는 인지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p.260)

이 무시무시한 ‘추적기’는 어쩌면 옷에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버리는 온갖 쓰레기들, 애초에 팔리지도 않고 남아 있는 물건들에도 각각의 여정이 있을 것이다. 가끔 마트에서 산처럼 쌓인 물건들을 보면 압도될 때가 있다. ‘이 많은 것들 중 팔리지 않은 것들은, 나중에 다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 때.

<헌 옷 추적기>는 그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불편하지만 알아야하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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