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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살해사건 - 누가 양치기 조지 글렌을 죽였는가
레오니 슈반 지음, 김정민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던가. 여기서는 양도 사회적 동물이다. 최소한 인간은 양의 말을 못알아듣지만 양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이 양들은 정말로 폭넓은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귀엽고 몽글몽글하고 털이 한 가득인, 어딘가 바보 같고 순진해보이는 양들이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동물원의 양들이 그냥 양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조지 글렌의 양만 특별한 걸 수도 있지만.
일단 명목은 양치기가 죽고, 그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양들이 머리를 뭉쳐 풀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내용을 읽다보면 고심하다가도 금새 맛난 풀과 푹신한 꿈자리로 신경을 돌리고 마는, 이 산만한 양떼 때문에 추리고 뭐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시되는 건 양들의 귀여운 작태. 귀엽다. 정말 귀엽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귀엽다. 출판사 이야기대로라면 "호기심 많고 집요하며 똑똑한 미스 마플, 나이가 많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양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리치필드 경, 기억력이 뛰어난 모플, 동물원이나 서커스 등에 대해 잘 아는 오델로, 뛰어난 후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마우데" 등이 함께 모여 좌충우돌 살인범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살인범 찾기라는 추리소설의 근본적 목적보다는 무리지음과 고독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 양들이 있는 마을은 양을 관광상품으로 삼아서 먹고 사는, 아일랜드의 작은 농촌이다. 서로에 대한 것은 모르는 게 없다. 하지만 쉬쉬하며 어둠속에서 흘려보낼 따름인 문제들도 있다. 그 속에는 미묘한 일그러짐이 있다. 우리의 양치기 조지 글렌은 그런 것에 환멸을 느끼고 양들과만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어느날 죽었다. 삽에 꽂힌채. 마을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리기에 바쁘다. 누군가는 실연으로 슬퍼하고 누군가는 제 잇속 챙길 궁리만 하고, 누군가는 겁에 질려 떨고. 정작 조지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갖는 듯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조지의 아내조차도.
양들은 무리지어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며 떨어져 홀로 지내는 것은 죄악이자,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들의 삶은 건초더미에서 서로에게 몸을 기대어 잠들었다가 낮에는 밖에 나와 풀을 뜯어먹고, 가끔은 특이한 양치기가 읽어주는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소설, 또는 양들이 걸리기 쉬운 병에 대한 안내서를 다같이 듣는 게 전부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양치기가 죽으면서 변화가 찾아온다. 양치기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본래 생활하던 그 틀을 깨트리면서, 무리 지어 생활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해야할 시간이 찾아왔다. 양들은 자신들만이 조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며 새로운 모험에 나선 것이다. 이 변화의 가장 큰 상징이라면 오델로와 멜모트. 오델로는 서커스단에 있다가 조지의 눈에 띄여 이 목장에 왔다. 그는 서커스단에서 배운 기술로 양들을 통솔하는 기술을 배웠다. "네가 양들을 보살펴야해." 양이 양을 보살핀다. 그는 매번 서커스단에서 잠시 함께 지낸 멜모트의 조언을 떠올리며 혼자서 결정해야한다고, 집중하고, 숫양의 분노를 잠시 누르고, 생각해야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내인다. 그리고 무언가 한다. 아무래도 양이니까 어설프기도 하고 반쯤 우연으로 때려잡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무언가 해낸다. 함께, 그리고 혼자. 한편 멜모트는 어린 시절 어느 사건 때문에 무리에서 떨어져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는 혼자서 오롯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우르르 몰려 다니며 행동하는 양떼와 달리 그는 돌아와서도 양떼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조지가 말하는 것과 닮았다. 그는 나타났을 때처럼 가버릴 때에도 홀로 뜬금없이 사라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건 그를 존경하던 오델로 뿐.
한번의 봄여름가을겨울도 채 기억해내지 못하는 양들 주제에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정의'와 '도덕성'을 획득했다. 게다가 무리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각자가 생각하고 머리를 맞대어 행동하는 방법도 익혔다. 따로 떨어져 나가서 풀을 뜯는 방법, 즉 자아 정체성을 획득했다! 대단해! 소설이 끝날 때까지 지지부진한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양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양을 통해 사람들을 그려냈다기 보다는 그냥 '양'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은 아마 이게 처음이지 않을까? 멋지다! 양들이여. 귀엽다! 양들이여.
사건의 내용은 중간중간 비어있다. 대마초를 거래하는 마피아. 매킨지를 죽인 마을 사람들. 베스의 마음. ... 양들이 아는 내용 외에는 우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양들의 관계와 이야기는 깊이 있게 묘사되어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피상적이다.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어렴풋한 분위기만 감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양들에 비해 후각이 나쁘기 때문일까. ㅡ,ㅡ;;
아무튼, 양들에 의한, 양들을 위한, 양들에 대한 소설... 무언가 장르를 정하기가 애매모호하지만 그런 게 뭐 어떠랴 재밌으면 됐지 싶은 재밌는 소설이었다.
유일한 단점... 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번역과 편집이 개뼈따구 같다는 것. 오자가 쉴새 없이 보인다. 중간중간 번역이 턱턱 걸린다. 해설이 상당히 대충이다. 뭐 이 책으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대교나 베델스만이나 작지 않은 회사인데 둘이 합쳐진 거라면 좀더 잘 해내야 했던 게 아닐가. 정말 재미난 소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