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남자는 해를 따라 삽니다. 해가 뜨면 아픈 부위에 통증을 못 느끼다가 해만 지면 아픈 부위의 통증이 심해지나 봅니다. 그래서 어제처럼 주로 밤에 전화를 겁니다. 아프기 시작할 때, 벌써 여러 날째 밤마다 불려나갔고, 그때마다 술에 취해 몸도 마음도 비틀거리는 남자를 지키다 들어옵니다.
E. 허버트가 말했습니다. 남자들은 낙원에서 끌어낸 것이 여자라면, 남자를 다시 낙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자도 여자일 뿐이다.
저히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안다고 말하지 말라’는 제목의 영화를 본 건 수백개도 넘는다. 그러나 그때 이상하게도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였다. 이윤기 감독은 그 점에서 참 조심스러운 듯 보인다. 무심한 듯 흘러가는 한 여자의 외면을 파열시키는 기억, 떠오르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그 기억의 파도를 무던히도 세밀하게 그저 보여주려 든다. 아마 이윤기 감독이 <여자, 정혜>를 지금보다 훨씬 어수룩하게 품었어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은희는 자기가 예쁘다는 걸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뿐이었다. 그 계집애가 가진 건. 은희라는 이름. 여자라는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은희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건 은희가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