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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의 상자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5년 2월
평점 :
*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읽고 있는 책에서 아는 작품이나 작가가 언급될 때면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리뷰할 ‘미정의 상자’의 정소연 작가는 번역가로도 활동하는데, 알고 보니 제가 읽었던 여러 SF 소설-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어둠의 속도, 플랫 랜더, 허공에서 춤추다 등-이 정소연의 번역이었는데, 재미있게 읽은 작품도 있어 기회가 되면 다시 읽고 싶습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친한 지인을 만나게 되면 반가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잠깐이라도 멈추어 근황을 묻고, 시간이 맞을 경우 약속을 잡게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관계에 목말라 있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우리는 고독을 바라면서도 진실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문학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이런 ‘관계에 대한 탐구’가 주된 소재로 사용됩니다. ‘미정의 상자’처럼 말이죠.
[카두케우스 이야기-관계의 변화] 우주 공간 사이를 단숨에 건너갈 수 있는 비상점의 발견 이후 인류는 이를 통해 초광속 이동이 가능한 ‘도약’ 기술을 발명하였고, 인류는 우주 곳곳에 진출하게 됩니다. 이 기술은 ‘카두케우스’라는 회사가 독점하고 있어 모든 인류는 이 회사에 종속된 ‘카두케우스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회사의 탐욕스러운 자원 개발을 위해, 인간은 수백수천만의 덩어리로 비상점 너머의 행성에 던져져 생체 채굴 기계가 됩니다. 회사는 이들과 계약을 맺고, 이들이 캐내는 자원을 대가로 생계지원 프로그램을 수백 년 간 제공하는데, 광물이 고갈되면 이 프로그램은 종료되어 개척민들은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합니다.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동생의 치료를 위한 의료 행성으로의 이사 때문에 우주 비행사의 꿈을 접은 소년, 조난당한 우주선을 구한 행동이 규칙 위반으로 결론이 나 최종 실기 시험에서 탈락한 우주 비행사 후보생, 도약을 할 때마다 발생하는 시간 지연 효과 때문에 며칠 전 작별 인사를 한 배우자가 재회의 순간마다 자신보다 늙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우주 비행사. 광막하게 늘어난 공간만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밀도도 엷어지는, 그렇기에 관계에 목마르거나 또는 나의 꿈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파편화된 인간들. 정소연은 이야기합니다. 헤어지지만, 우리는 서로의 마음 속에 있다고. 그래서 우리의 작별은 가슴 시리도록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다고.
[무너진 세상에서 우리는-관계의 상실] 펜데믹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켰습니다. 우리는 가까이 지내던 이가 아프고 죽을 때 옆에 있을 수조차 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슬퍼한 경험이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상실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의, 가족의 아파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좌절합니다. 무너진 세상에서의 펜데믹은 이 무력감을 더욱 증폭시켰고 우리는 홀로 이 늪에 빠지게 되어 허우적거릴 체력과 정신조차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소설 속 미정이 사랑하던 유경을 떠나 보내고, 살기 위해 인적 드문 곳으로 떠나다 우연히 발견한 신비로운 ‘미정의 상자’는 상처받고 지친 미정에게 또다른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미정은 상자를 통해 과거로, 미래로, 현재로 나아가 그 가능성의 실현을 체험합니다. 관계의 상실을 치유하게 되는 것이죠.
미정은 상자를 통해 희망을 엿보고 위안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미정의 상자를 발견한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책을 읽은 이들 또한 정한 것이 없는 이 상자를 통해 크고 작은 관계의 변화와 상실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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