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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도르프 연결공간
반-바지. 지음 / 김영사 / 2024년 12월
평점 :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동차 튜닝 취미에서 유래된 말인데 ‘대상이 되는 원본을 다양하게 변형한 것들을 접했거나 직접 변형시켜 보았지만 결국은 원본이 제일 낫다’라는 의미로 쓰이며, 지금은 ‘원본이 제일 좋다’라는 관용어구로 쓰이곤 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SF 문학에 있어 ‘순정’은 ‘하드 SF’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드SF는과학기술이나 규명되지 않은 자연 현상 등의 자연과학 그 자체가 주인공이 되거나 이를 바탕으로 한 광범위한 규모의 사고실험을 다루는,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용어에 걸맞는 SF의 하위 장르입니다. 이미 수십년 전에 이 개념이 확립이 된 영어권이나 일본 SF계와 달리 한국에서는 SF문학의 최근의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의 하드 SF 소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대중적인 인기가 오히려 하드 SF의 발전을 저해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SF 만화도 정말 좋아하는데, 한국 만화 역시 그 희소성이 더욱 심해서, 수십 년 전의 출판 만화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SF 만화는 거의 없는 것이 실정입니다. 그런데 하드 SF 단편 만화를 그리는 작가의 작품집이 북펀딩으로 나왔다니, 참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디시인사이드 만화 갤러리를 거쳐 현재는 X와 개인 블로그를 통해 활동하는 ‘반-바지’-라는 가명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공개하지 않-는 국내에 거의 유일한 ‘하드-SF-만화-아마추어’ 작가입니다. 그가 2018년에 출간하여 큰 호응을 얻었던 ‘슈뢰딩거의 고양희’와 이후 그린 만화들을 모은 두 편의 단편집을 알라딘 북펀딩을 통해 출간했습니다. 그를 기억하고 있던 팬들은 즉시 환호했고, 1,695명이 참여한 6천여만원의 매출 및 목표금액을 5745% 초과 달성하며 알라딘 북펀드 역대 참여인원 기준 3위, 매출 기준 7위를 기록했습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박경리의 토지, 도스토옙스키 컬렉션 등의 거대한 팬덤이 존재하는 책의 펀딩과 맞먹을 정도의 성과인데, 저와 같은 하드-SF-만화 매니아들이 이런 펀딩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잘 알 수 있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엽편 분량이 대부분인 이 책의 단편만화는 시간여행부터 인공지능, 외계문명, 안드로이드, 다중우주, 양자역햑 등 SF의 온갖 소재를 그만의 독특하고 창의적이고 따뜻하고 수다스럽게 풀어냅니다. 특히 ‘시간여행’ 관련 단편이 정말 많은데, 전통적인 출판만화 구도를 활용하여 컷 사이를 넘나든다던지, 왼쪽과 오른쪽의 모든 방향으로 보아도 스토리가 성립된다던지 하는 형식상의 참신함도 이 책의 볼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림 실력이 뛰어남은 두말하면 잔소리죠. 다만 최소화된 채색과 필압의 조화가 돋보이는 극화체의 작화는 요즘 시대의 그것과는 거리감이 있으므로 감상에 주의를 요합니다. 수록된 작품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솔직히 재미가 없는 것도 있다는 점도 함께 말이죠.
작가의 SNS와 블로그에 가면 모든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참된 SF 장르의 독서가라면, 이 좁디 좁은 세상이 잘나가는 옆 세상처럼 언젠가는 창대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땅히 구매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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