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정 허균 - 화왕계 살인 사건
현찬양 지음 / 래빗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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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선사 이래로 인류에게 ‘이야기’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도구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수많은 이야기 중 노아의 방주로 대표되는 전세계의 ‘대홍수 설화’와 같이 복붙 수준으로 유사한 것도 참 많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그게 그거죠.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가장 유명한 탐정 소설 중 하나인 셜록 홈즈와 왓슨의 이야기가 우리 나라의 역사에도 있지 않았을까?

 

살인 사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강력 범죄이며, 한민족 중에도 홈즈와 같이 걸출한 천재와 왓슨과 같이 충직한 친우이자 의술가가 있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매 이 조선판 홈즈는 팔도 제일의 머리 좋은 양반 허균으로, 한번 맛보는 것만으로 식재료 뿐만 아니라 양념까지 구분하는 절대 미각의 소유자이자 맛있는 음식을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는 탐식가이자 탐정으로, 그의 곁에는 구암 허준의 수제자였건만 산 자의 맥과 혈을 찾지 못해 죽은 자를 보는 의원이 된 ‘재영’과, 과감하고 눈치 100단인 찬모이자 다모(조선시대 여경)인 ‘작은년’이 있으니, 조선제일탐정 허균이 조선 반도를 뒤흔든 이른바 ‘화왕계’ 연쇄살인 사건을 어찌 해결하지 못할 리가 있으랴?

 

소설은 주인공 식탐정 허균이 조선 반도 양반이라면 누구나 품고 싶어 했던 인기절정 기녀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러 모로 셜록 홈즈를 연상시키는 허균이 홈즈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가 먹는 것에 진심인 탐식가라는 것이죠. 소설 곳곳에서 그가 펼쳐 보이는 조선 시대 음식에 대한 집요할 정도로 해박하고 디테일한 지식은 처음에는 다소 생뚱맞게 느껴졌으나 그가 이를 사건의 단초, 나아가 결정적인 증좌로 절묘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게 되면 ‘역시 조선 제일 천재!’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식(食)이란 것은 인간의 필수적이자 반복적인 행위로 죽은 자가 먹었거나 현장에 남겨진 음식을 통해 사인을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도 활용되는 방법이니 허균이 추리에 음식을 활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의 추리에 있어 음식의 비중이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그의 엉뚱하고 수다스러우면서도 의뭉스러운, 독특한 캐릭터를 강조하고 나아가 다채로운 한식의 향연을 펼치는데 기여할 따름인데, 이런 점은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연관이 없어 보였던 기이한 살인 사건들이 허균의 명쾌한 추리로 점차 거대한 음모의 일부분 이었음이 드러남과 동시에 ‘홍보 책자나 요리책을 연상시킬 정도의 디테일한 ‘K-푸드’ 요리법과 재영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을 허균이 번번이 골탕을 먹이는 장면들과 맛깔난 전라도 사투리로 할말은 하는 작은년의 당돌함이 콜라보되니, 이게 바로 웰메이드 우당탕탕 좌충우돌 추리 활극 K-드라마가 되는 것이죠.

 

실제로 이 작품은 MBC 드라마 극본 공모전 당선작을 소설화 한 것이고 드라마 제작도 확정지었다고 하니, 틀린 말이 아닌 셈이 되네요. 작품에 잘 어울리는 배우만 캐스팅된다면 꾸준히 이어지는 ‘인기 퓨전 사극’이 될 것이라 예상하는데, 제 나름대로 한번 캐스팅을 해 보자면, 허균 역에는 이제훈 배우, 재영 역에는 조정석 배우(둘의 역할을 바꿔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작은년 역에는 김세정 배우를 추천합니다! ‘식탐정 허균’이 드라마로 방영되는 날을 고대해 봅니다!



* 인스타그램/네이버 블로그/알라딘 서재에서 ‘도란군’ 계정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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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아
김필산 지음 / 허블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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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완만한 대왕들’이라는 단편에는 글랜에 살고 있는 드랙스와 드랜이라는 두 대왕이 나오는데, 이들이 지각하는 시간의 흐름은 인간과 달라서 아주 느립니다. 두 왕은 평소처럼 하루의 시작으로 대화를 나누다 로봇 하인 진드롬에게 자신들을 섬길 우주 어딘가에 있을 지성체를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이들이 ‘잠깐’ 대화를 하는 동안 100년의 시간이 흘렀고, 진드롬은 한 쌍의 인간 남녀를 데려옵니다. 대왕들은 연약한 인간들 대신 진드롬 같은 로봇을 복제하는게 어떻겠냐는 의견으로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 진드롬에게 이들이 어떻게 됬는지 물어봅니다. 이에 진드롬이 ‘왕성히 번식하여 문명을 이루었으나, 2000년 전에 핵전쟁을 일으켜 자멸’했다고 답하니, 두 대왕은 진드롬에게 자신들을 섬길 수준이 되는 지성체를 다시 찾아오라 명령하고 잠에 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저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이 단편을 지금껏 읽은 ‘시간’이 주제인 SF 소설 중 가장 창의적인 작품으로 평가했었습니다. ‘엔트로피아’를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한 장군이 선지자를 찾아가 ‘조국을 지킬 방법’을 묻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자신은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경험하고 느끼며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져서 태어남으로 가고 있는,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선지자는 그를 의심하는 장군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강대한 나라의 왕에게 그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하는 남자와 이를 거스르고자 노력하는 왕세자, 광기의 연금술사에 의해 엄청나게 복잡한 방정식을 연쇄적으로 푸는 것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책이 된 사람과 이 책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남자, 시간여행이 일상화되었으나 미래의 역사가 불변하다는 진리를 모두가 알고 시대에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여 미래를 바꾸고자 미래를 침공한 남자. 선지자는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했으며, ‘미래는 하나의 강물로 흘러’가며, ‘인간은 선택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단언합니다.

주인공인 선지자가 읽었거나 겪었던 3가지의 서로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가 담긴 액자식 구성과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건의 과거부터 수백년 후의 미래를 다루는 이 작품은, 복잡한 구성과 큰 스케일로 필히 서두의 연표를 참조해가며 집중해서 읽을 것을 권합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읽어도 무방한데, 두 번째 책 이야기인 ‘책이 된 남자’는 소설의 메인 테마인 ‘시간’과 관계없는 지금의 인류에게 있어 가장 혁신적인 기술인 AI의 작동 원리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 뛰어난 작품성과는 별개로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깰 정도는 아닌데, 각각의 이야기는 그 내용과 관계없이 선지자가 과거를 향해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는 네 번째 이야기가 숨어 있는데, 바로 선지자가 어떻게 미래에서 과거를 향해 살아가는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 번이나 읽은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해보자면, 선지자의 삶은 외부에서 바라보면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지만(몇천년씩 살아가는 것은 물론 기이하지만), 선지자 내면에서의 시간에 대한 인식은 그 반대입니다. 그렇기에 선지자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와 어떻게, 언제 헤어지는 지를 알고, 미래에 읽었던 책에 담긴 이야기를 장군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그는, 미래를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며, 자신의 탄생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또한 한탄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미래는 우리 자신이 층층이 쌓아가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미래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말이죠. 다시 말하면, 미래는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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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헝거 게임 시리즈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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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잘어치는 별로 싫지 않았다. 군사적 관점으로 볼 때 흥미로웠다. 그러나 모킹제이는 뭔가 혐오스러웠다. 그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자연이 미쳐 날뛰는 일이다. 그들은 죽어 없어져야 했고 빨리 죽어야 했다. (p.467)



적들을 벌할 수 있는,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그들이 내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방법을 고안하라는 게 숙제였어. 마치 퍼즐 같았지. 나는 퍼즐을 잘 풀어. 그리고 모든 좋은 창작물이 그렇듯 핵심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순해. 헝거 게임. 가장 사악한 충동을 영리하게 스포츠 행사로 포장한 거시. 엔터네인먼트로 만든 거야. (p. 575)



헝거 게임 시리즈의 메인 빌런 코리올라누스 스노우는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어 반란을 억제하고 수많은 정적들을 독살로 제거하며 수십년간 독재자로 군림한 엄청난 능력자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편에서 그 능력을 직접 발휘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죠. 이는 본편이 캣니스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된 형식적 특성과 그녀의 적대자가 서사적으로는 스노우 개인이 아닌, 판엠이라는 독재 국가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본편에서의 위상에 비해 과소평가되었던 그의 과거를 다룬 프리퀄이 만들어진 이유는 영화판 스노우 역의 고 도널드 서덜랜드의 열연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덕분에 스노우 대통령은 엄청난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자랑했고, 이 설정의 일부가 본서에 그대로 차용되었을 정도라고 할 정도니 말이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스노우 대통령의 어떤 과거를 담고 있을까요?



스노우 가문은 판엠의 명문가였으나 13개 구역과의 전쟁 당시 반란군의 기나긴 수도 봉쇄 기간 중 생존을 위해 가문의 재산을 모조리 써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부모님이 모두 사망하며 완전히 몰락하게 됩니다. 남은 것은 쓸만한 자재는 모조리 떼어 써버려 폐허나 다름없는 아파트 한 채와 허울뿐인 캐피톨 아카데미 학생(명문가 자제면 무료 재학이 가능한)인 자신과 사촌 누이, 친할머니, 거기에 굶주림뿐. 그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금년 헝거게임에서 처음 도입되는 조공인에게 한 명씩 배정되며 아카데미 학생 중에서 선발하는 멘토 24인 안에 드는 것. 여기서 좋은 결과를 거두게 되면 대학 장학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에 그는 진심을 다했고, 결국 멘토로 선정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조공인은 가난한 12구역 출신 소녀 루시 그레이 베어드였습니다. 그녀는 추첨식에서 기이한 행동을 보이며 주목받았지만, 우승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연약한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녀의 생존을 위한 전략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캐피톨 시민에게까지 서로 죽이는 살인게임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인기가 없던 헝거 게임을 부흥시킬 방안을 찾아내라는 멘토 과제에 성실히 임해 스폰서십, 승자예측 도박, 우승자 포상 등의 규칙을 제출하여 호평을 받게 됩니다. 또한 루시 그레이의 신뢰를 얻기 위해 조공인들만 갇힌 우리 안을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하나 이 시도는 별다른 신뢰는 얻지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맙니다. 과연 스노우와 그레이, 두 소년 소녀는 각자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프리퀄을 만드는 목적이 팬심 충족이라면, 저는 이 책을 그 목적 이상으로 부합하는 잘 만들어진 소설로 정의하겠습니다. 실제로도 본편만큼은 아니지만 소설과 영화 모두 큰 인기를 얻었기도 하구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헝거 게임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비열한 독재자, 잔인한 데스게임에 환호하는 우매한 대중과 이에 편승하는 쇼 비즈니스 산업, 활을 든 소녀 영웅 등의 장르소설적 설정이 아니라, 스티븐 킹이나 빌 게이츠 등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극찬한 수잔 콜린스의 ‘엄청난 필력’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착착 감기는 찰진 대화들과 인물의 심리 묘사, 촘촘한 스토리 전개는 내가 지금 영 어덜트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진지한 순수 문학을 읽고 이는 건지 헷갈리게 합니다. 장르문학 치고는 조금은 가벼운 배경과 설정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헝거 게임 시리즈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데는 작가의 공이 절대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스노우와 함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루시 그레이 베어드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는 반대로 말하면 작중 스노우가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그려졌다는 말이죠)과 초기 헝거게임의 모습이 적은 비중으로 그려졌다는 점 등입니다. 하지만 스노우 대통령의 다양한 과거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사실상 스노우 원맨쇼인 이 소설, 읽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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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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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작가인 세스지가 일본의 소설 창작 사이트에 석 달간 올렸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와 관련된 괴담들’의 게시글을 편집하여 출간한 작품입니다. 긴키 지방은 일본 혼슈 서부 지역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지역명으로, ‘수도에서 가까운 지역’을 의미하며, 교토가 수도였던 시절의 지명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경인 지역’인 셈이죠.



소설의 서두는 친구가 실종되어 재보를 받고 있다는 호소로 시작됩니다. 작품의 중심은 1에서 4의 넘버링으로 이어지는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들인데, 자신을 본서의 작가와 동일한 ‘세스지’라고 칭하는 화자와 호러 잡지의 의욕적인 신참 편집자가 되어 소속 회사가 과거에 다루었던 긴키 지방 괴담을 파헤치다 실종된 ‘오자와’군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중심글 사이에 이 잡지의 단편, 독자 투고글 및 편지, 인터뷰 녹취, 인터넷 정보 수집글, 심령 전문 인플루언서의 심령스팟 탐사 스레 등이 무작위로 배치되는데, 그 내용도 하교 길에 행방불명된 소녀, 수련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숙소 베란다에서 보이는 산속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의 목격담, 유명 심령 스팟인 터널에 들어가 라이브 방송을 하던 인플루언서의 돌변, 호기심에 찾아간 심령 스팟에서 목격한 얼굴만 내밀고 무슨 말을 지껄이던 남자가 자신의 일상에서 계속 목격되자 패닉에 빠져 버린 대학생, 입지 찢어질 만큼 활짝 웃으며 2층까지 점프하는 여자, ‘기다리는 거야’라고 말하며 항상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있던 모친이 윗층의 자살자가 끔찍하게 추락한 장면을 ‘생글생글 온화하게’ 웃으며 지켜보던 어머니, 크고 흰, 사람처럼 생긴 동물과 같은 존재를 산에서 목격한 아이, 신자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는 ‘스피리추얼 스페이스’라는 교단의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편집자의 잠입 취재기 등으로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나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괴담들이 모두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며, 독자는 화자의 친구가 실종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인상 깊게 느꼈던 점은, 분명 소설임을 알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점차 느끼게 되는 사실감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흔한 인터넷 괴담 정도 수준의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작가인 세스지가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와의 연관성을 집요하게 강조하며 점차 현실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서 ‘있을법한 유사한’ 사건이 계속 벌어지니 독자들은 이를 ‘그럴 듯’하다고 인지하게 되는 것인데, 감정을 자극하고 단순화되고 반복적이며 99%의 거짓에 1%의 진실만을 담은 괴벨스의 선동에 나치 독일 치하의 국민들이 넘어갔던 것과 유사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획득한 리얼리티는 정체가 불분명한 화자와 친구의 실종의 미스터리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되며, 마침내 목도하게 되는 이 모든 것의 근원에 독자는 진실로 공포감을 느끼게 됩니다.



반전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의 화자의 독자를 향한 고해는 이 공포감의 마지막에 도돌이표를 추가하게 됩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괴담을 다시 읽게 되며 느끼게 되는 소름은, 나도 소설 속 에피소드에 등장한 희생자들처럼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발로인 것입니다. 웰메이드 모큐멘터리 호러 소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관하여’를 읽고 다같이 저주에 빠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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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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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워치츠카 간호사와 어떤 의사, 경사가 봐도 누군지 알 수 없었던 세 번째 사람이 맨손으로 아그니에슈카의 배를 찢었다. 미엘레흐는 그들이 아그니에슈카의 뱀처럼 구불거리는 유리 같은 회분홍빛 내장을 손에 쥔 것을 보았고 창자에서 새어 나온 역겨운 가스 냄새를 맡았다. 미엘레흐는 굳어버린 듯 우뚝 선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악몽을 지켜볼 뿐이었다. 혼란이 그의 주위를 지배했다. 공포에 질린 환자들이 가시철망에 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시 울타리로 몰려들었다. 도망치려 하는 와중에 서로 짓밟았다. 도살의 장면에서 어떻게든 멀리 떨어지려 몸부림쳤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으로 짐작해 보건대 다른 임시 건물들에서도 똑같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p.23)

그는 죽어가는 경관에게서 불에 덴 듯 펼쩍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에 여전히 권총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학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부상자를 자신이 죽인 것이다. 그것도 부하를. 동료 경관을.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카롤 크워스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등대지기’의 몸에 마지막 경련이 지나갔을 때 그는 도망쳤다.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정문을 향해 뛰었다. (p.102)

…위협이 되는 군경은 예외 없이 저 오른쪽에 있는 작은 천막으로 보내집니다. 거기서 모두 ‘예방주사’를 맞지요. 그 덕분에 그룬발트 광장까지 가는 구급차 안에서 조용히 잠들 수 있고, 광장에 도착하면 즉시 아래로 내려가서 가솔린 범벅이 되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거요. 그 소년을 내가 비인간적으로 대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 내 부하들이 겪어야 하는 희생을 생각해 보시오. 그 애가 죽어야 다른 애들 천 명이 살아남을 수 있소. 알아듣겠소?” (p.348)

‘아포칼립스’는 기독교적 종말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요한묵시록의 영어명인데, 장르 문학에서는 인류 멸망의 상황을 다룬 하위 장르를 뜻합니다. 아포칼립스 장르에서도 ‘좀비 아포칼립스’는 대중문화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인기 만점 카테고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다른 하위 장르와 달리 그 멸망의 원인이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무력감과 비애, 인간의 형상을 한 순수할 정도로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유한 좀비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폭력, 좀비의 확산 하에서의 혼돈의 군상극 등이 이 장르의 인기의 원인일 것입니다. 하나가 둘로, 다시 넷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좀비의 확산 속도와의 제로섬 게임을 해야하는 인류 세력의 절망은 독자에게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냅니다. 물론 좀비와의 격렬한 전투 그 자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독자도 있을 것이구요.

오늘 소개할 ‘브로츠와프의 쥐들’은 ‘좀비물’의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브로츠와프의 1960년대에 있었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공산주의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문학’으로 탄생시켰습니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 소련이 지배하는 1963년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출혈성 천연두의 대유행으로 봉쇄된 도시에서 환자들이 돌변합니다. 그들은 이성을 잃은 듯 보이고,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인간을 학살하고 문자 그대로 ‘인간을 잡아먹는 좀비’로 변하게 된 것이죠. 좀비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하며 사람들을 찢어발기고, 죽은 이들은 곧바로 좀비로 변하며 좀비의 세력은 들불처럼 순식간에 번지며 폐쇄적인 브로츠와프를 아비규환의 도시로 만듭니다. 경찰과 군인은 동료와 부하를 잃어가면서도 좀비를 막기 위해 분투하고, 간호학교 교장과 학생들, 가게 주인, 한 가족의 가장 등 평범한 이들이 좀비의 공격에서 가까스로 탈출하거나 희생되는 와중에 지도자들과 군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깁니다. 그러나 좀비는 사람을 가려가며 물어뜯지 않으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는 일반 시민들과 함께 무차별적인 죽음을 맞게 됩니다.

‘브로츠와프의 쥐들’는 분단위로 잘게 쪼개져 진행되는 챕터는 마치 브로츠와프 조감도를 전지적 시점으로 실시간으로 보는 듯한 효과를 부여하여, 독자로 하여금 극한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부여합니다. 또한 폐쇄적 권위주의 탓에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잔인하게 찢어발겨지는 사람들을 보며, 동시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가장 궁극적인 감정은, 절망입니다. 결국, 브로츠와프 뿐 아니라 전 지구가 좀비 떼로 뒤덮일 것이라는 근원적 공포 말입니다. 자신의 종의 절멸, 이것보다 더한 절망이 있을까요?

부커상과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권위있는 작가이자 슬라브문학 전문 번역가인 정보라의 기획과 번역으로 출간된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는 총 3부작중 1부작입니다. 부디 이 좋은 작품이 꼭 완결되기를 기원하며 조만간 이 책을 구매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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