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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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워치츠카 간호사와 어떤 의사, 경사가 봐도 누군지 알 수 없었던 세 번째 사람이 맨손으로 아그니에슈카의 배를 찢었다. 미엘레흐는 그들이 아그니에슈카의 뱀처럼 구불거리는 유리 같은 회분홍빛 내장을 손에 쥔 것을 보았고 창자에서 새어 나온 역겨운 가스 냄새를 맡았다. 미엘레흐는 굳어버린 듯 우뚝 선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의 악몽을 지켜볼 뿐이었다. 혼란이 그의 주위를 지배했다. 공포에 질린 환자들이 가시철망에 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시 울타리로 몰려들었다. 도망치려 하는 와중에 서로 짓밟았다. 도살의 장면에서 어떻게든 멀리 떨어지려 몸부림쳤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으로 짐작해 보건대 다른 임시 건물들에서도 똑같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p.23)

그는 죽어가는 경관에게서 불에 덴 듯 펼쩍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에 여전히 권총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학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부상자를 자신이 죽인 것이다. 그것도 부하를. 동료 경관을.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카롤 크워스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등대지기’의 몸에 마지막 경련이 지나갔을 때 그는 도망쳤다.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정문을 향해 뛰었다. (p.102)

…위협이 되는 군경은 예외 없이 저 오른쪽에 있는 작은 천막으로 보내집니다. 거기서 모두 ‘예방주사’를 맞지요. 그 덕분에 그룬발트 광장까지 가는 구급차 안에서 조용히 잠들 수 있고, 광장에 도착하면 즉시 아래로 내려가서 가솔린 범벅이 되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거요. 그 소년을 내가 비인간적으로 대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도시의 미래를 위해서 내 부하들이 겪어야 하는 희생을 생각해 보시오. 그 애가 죽어야 다른 애들 천 명이 살아남을 수 있소. 알아듣겠소?” (p.348)

‘아포칼립스’는 기독교적 종말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요한묵시록의 영어명인데, 장르 문학에서는 인류 멸망의 상황을 다룬 하위 장르를 뜻합니다. 아포칼립스 장르에서도 ‘좀비 아포칼립스’는 대중문화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인기 만점 카테고리입니다. 아포칼립스의 다른 하위 장르와 달리 그 멸망의 원인이 한때 인간이었던 것들이라는 점에서 비롯되는 무력감과 비애, 인간의 형상을 한 순수할 정도로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유한 좀비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폭력, 좀비의 확산 하에서의 혼돈의 군상극 등이 이 장르의 인기의 원인일 것입니다. 하나가 둘로, 다시 넷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좀비의 확산 속도와의 제로섬 게임을 해야하는 인류 세력의 절망은 독자에게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냅니다. 물론 좀비와의 격렬한 전투 그 자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독자도 있을 것이구요.

오늘 소개할 ‘브로츠와프의 쥐들’은 ‘좀비물’의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브로츠와프의 1960년대에 있었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공산주의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문학’으로 탄생시켰습니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 소련이 지배하는 1963년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출혈성 천연두의 대유행으로 봉쇄된 도시에서 환자들이 돌변합니다. 그들은 이성을 잃은 듯 보이고,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인간을 학살하고 문자 그대로 ‘인간을 잡아먹는 좀비’로 변하게 된 것이죠. 좀비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하며 사람들을 찢어발기고, 죽은 이들은 곧바로 좀비로 변하며 좀비의 세력은 들불처럼 순식간에 번지며 폐쇄적인 브로츠와프를 아비규환의 도시로 만듭니다. 경찰과 군인은 동료와 부하를 잃어가면서도 좀비를 막기 위해 분투하고, 간호학교 교장과 학생들, 가게 주인, 한 가족의 가장 등 평범한 이들이 좀비의 공격에서 가까스로 탈출하거나 희생되는 와중에 지도자들과 군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깁니다. 그러나 좀비는 사람을 가려가며 물어뜯지 않으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는 일반 시민들과 함께 무차별적인 죽음을 맞게 됩니다.

‘브로츠와프의 쥐들’는 분단위로 잘게 쪼개져 진행되는 챕터는 마치 브로츠와프 조감도를 전지적 시점으로 실시간으로 보는 듯한 효과를 부여하여, 독자로 하여금 극한의 긴장감과 속도감을 부여합니다. 또한 폐쇄적 권위주의 탓에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잔인하게 찢어발겨지는 사람들을 보며, 동시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가장 궁극적인 감정은, 절망입니다. 결국, 브로츠와프 뿐 아니라 전 지구가 좀비 떼로 뒤덮일 것이라는 근원적 공포 말입니다. 자신의 종의 절멸, 이것보다 더한 절망이 있을까요?

부커상과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권위있는 작가이자 슬라브문학 전문 번역가인 정보라의 기획과 번역으로 출간된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는 총 3부작중 1부작입니다. 부디 이 좋은 작품이 꼭 완결되기를 기원하며 조만간 이 책을 구매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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