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와 비주류, 사회 속 경계짓기"
- 비주류의 감성을 잘 다룬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최근 ‘비주류’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비주류 정치인과 비주류 경제학자부터 비주류 예술가까지 사회의 수많은 분야에서 비주류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많은 인디 음악가들은 자신이 비주류라고 외치며 비주류의 감성을 노래한다. 그러나 비주류라는 말을 정확히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따져 보자면 비주류는 주류(mainstream)가 아닌 것, 즉 큰 흐름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이 개념 역시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비주류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주류라는 개념 자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가 적다고 비주류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수가 많은 사람이 주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경계짓기는 정치사회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사회 속에서 주류와 비주류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형성된다. 우선 비주류를 주류에서 소외된 사람들로 보는 일반적 인식이 있다. 이 관점에서 소외당한 비주류 집단은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서글픔과 열등감을 느끼며, 기회를 노려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한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주인공 혜주는 이와 같은 비주류 집단을 대변한다. 인천의 한 여자상업고등학교 출신인 혜주는 자신의 배경의 서글퍼하면서 서울 중심부의 큰 회사에서 일하는 엘리트 상사를 동경한다. 지금은 인천에 사는 고졸 사원이라는 비주류의 집단에 있지만 언젠가는 서울에 있는 회사의 높은 지도부라는 주류 집단에 속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오히려 비주류를 주류 사회를 박차고 나온 저항 집단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있다. 이는 주로 비주류 사회 내부에서 나타나는 인식이다. 이 관점에서 비주류는 자신이 비주류임에 자부심을 느끼며 자신들을 주류 사회를 보수성을 비판하는 집단으로 파악한다. 이와 같은 인식은 정치나 문화 영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인디 음악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인디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주류 대중음악의 상업성과 몰개성을 비판하며 자신들만의 감성을 담은 음악을 만든다. 대중음악에서 ‘독립된(independece) 음악’이라는 명칭 자체에도 주류 음악에 대비된 자신들만의 고유성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때때로 이러한 자부심은 주류 사회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나타난다. 실제로 ‘브로콜리너마저’라는 한 인디 밴드는 지상파 방송이라는 ‘주류 무대’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다른 인디 음악가들에게 “상업주의에 물들었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두 번째 인식은 때로 주류 사회에 대한 비주류의 직접적인 대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비주류가 주류에 대비되는 자신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면서 주류 사회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할 대안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주의 운동은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서 나타난 폭력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성의 부드러운 포용 정신을 강조한다. 라틴아메리카 문학 역시 환상적 표현을 이용하여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통해, 침체되어 있던 이성 중심의 서구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인디 음악 역시 중독성 강한 가사와 전자음으로 가득한 주류 음악의 대안으로 진정성과 개성이 있는 음악을 추구했다. 주류 사회에 대한 비주류의 이러한 대항은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이 이용된 많은 라틴아메리카 작품들은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으며 노벨 문학상을 휩쓸었고, 인디 음악계도 ‘장기하와 얼굴들’이나 ‘브로콜리너마저’, ‘10cm’ 등의 스타를 배출하면서 전례 없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주류 사회의 대안으로서 비주류의 특성을 강조하는 비주류의 대항은 언뜻 보면 비주류의 힘을 긍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관점에도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비주류 사회 역시 자신들의 ‘비주류적인’ 특성을 강조함으로써 주류 사회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 주도를 인정하고 주류 담론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비주류적 가치에 대한 ‘인정’ 역시 주류 사회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비주류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다시 한 번 타자화를 겪는다.
앞서 언급한 인디 음악이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한 예이다. 인디 음악이 대중음악의 대안으로 최근 각광받는다고 해도, ‘주류에게 주목받는’ 인디 음악의 종류는 한정되어 있다. 대중가요의 깊이가 없는 가사에 대비되어 사회의식이 담긴 진지한 가사의 노래가 주목을 받고, 아이돌 그룹들의 전자음에 대비되어 여러 악기를 직접 연주해서 나오는 아날로그 사운드가 환영받는 식이다. 그런 식의 ‘대표적인 인디 음악’의 영역에 속하지 못하는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인디 음악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마술적 사실주의 역시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라틴아메리카를 현대적인 서구 사회에 대비된 미개하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바라보는 서구의 인식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치가 인정받은 계기가 ‘주류 중의 주류’인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결국 비주류가 제 아무리 자신들의 대안적 특성을 강조할지라도 주류의 눈에서 보면 여전히 그들은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비주류에 불과하며, 그러한 비주류적 가치의 ‘인정’ 역시 사회 주도권을 잡고 있는 주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시점에서 주류와 비주류 담론의 본질이 명확해진다. 사회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는 틀(frame) 자체가 결국은 사회 속 주류 권력자의 시각에서 형성된 것이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류 세력이 존재하고, 그에 속하지 못하는 집단은 비주류라는 관점 역시 사회 주도권을 쥐고 있는 소수의 집단에서 나온 인식이다. 사회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 등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주류로 포장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주장이나 집단은 비주류로 구분되어 사회 주도권에서 소외된다. 이 점을 고려해 보았을 때, 주류와 비주류로 사회를 나누는 담론 자체가 오히려 허상일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과 정치적 신념이 공존한다. 권력자의 눈으로 사회의 여러 영역을 나눈 뒤 상대적 약자를 소외시키고 타자화시키는 주류 ․ 비주류 담론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것이 주류인지 비주류인지를 따지기보다는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다양한 가치 존중의 담론’이 지금 사회에는 더 어울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