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참던 나날
리디아 유크나비치 지음, 임슬애 옮김 / 든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한 여자의 슬픔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고, 삶의 낭떠러지라고 하기엔 비극적인 결말도 아니고, 뇌과학자 정재승이 말한 것처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민낯' 이 그나마 제일 가까운 듯 하다. 삶의 민낯이 가깝다기 보다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이 가깝다는 뜻이다.


주인공 리디아, (작가의 회고록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죽은 딸의 슬픔에서 솟아오르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하지만 그 전부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범주에 든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더 강했던. 아이를 사산하고 난 후부터는 이성이 없는 것처럼 산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쾌락적이고 문란한 생활이 계속 이어진다. 아이를 사산했다는 것, 생각조차 하기 싫을만큼 끔찍하다. 리디아의 선택은 보통과 달랐다. 보통 이 같은 상황을 겪은 엄마라면 속으로 곪기 마련이다. 삶의 의욕을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거나 이런 식으로. 하지만 리디아는 오히려 본능을 외적으로 방출한다. 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슬픔을 감춘다. 사람마다 방식은 다 다르니까. 아마도 리디아는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분노(분노만 있었던 건 아니였지만), 언니와의 관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사산이라는 것을 통해 터진게 아닐까 


리디아가 과연 정신을 차릴까, 다시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위로 올라올까? 아니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까? 궁금해 하던 찰나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어떤 한 남자를 만나고(이미 여럿 만났지만), 다시 아이를 갖게 되면서(이미 세번의 낙태수술을 받았지만) 하나의 가족을 이루게 된다. 물론 그 기저에는 수영이라는 숨을 참던 나날이 있었다. 보수적인 나의 성향 때문일까, 리디아가 다행이다 싶었다. 더 이상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기를, 다른 방향으로의 행복을 맛 볼 수 있기를


어떤 사람은 리디아의 이야기가 본능, 민낯, 자유로움, 무자비 라고 말하는 것들이 내가 보기엔 불안불안해 보였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런 타락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리디아는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가족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으니까. 리디아를 통해 나 또한 내 삶, 내 가족 그리고 나 를 돌아보게 된다. 리디아처럼 미친 굴곡은 아니었지만 내 삶을 돌아보면 나 또한 고통과 슬픔이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리디아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다. 가정을 찾았고, 글을 쓰는 것을 찾았고, 아이를 찾았고. 수영을 찾았고. 글을 쓰면서 자신의 과거를 현재를 찾고, 미래를 찾고 있다.


p.93

하지만, 아주 작고 아주 불안한 나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작은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동굴에 가둬 놓았지만, 그 동굴에서 소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이 미소 짓고 있었던 소녀는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았던 걸까? 이 작은 소녀의 시절에는 내가 봐도 불안하고 불우한 것 뿐이었는데 말이지.


p.218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나 자신의 끝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죽음 근처에 가고 싶었다. 정말로 죽은 근처에 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내가 본 리디아는 정말 끝까지 간 것 같다. 정말 죽음 근처까지 가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죽음 근처까지 가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죽음 근처까지 갈 만큼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p.224

캐시 애커의 책, 특히 아버지들이 딸을 성추행하거나 강간하거나 억합하거나 수치스럽게 하거나 학대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내 머리속에는 '그래' 뿐이었다. 나는 충격받지 않았다.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나는..... 존재한다고 느꼈다.


리디아는 우스웠겠지. 캐시 애커의 책 속의 내용이. 내가 경험한 것들,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고 느낀걸까?


p.238

그는 항상 나를 웃겨주었다. 나는 10살 이후로 웃은 적이 없었다. 아이였을 때는 안전하지 않아 웃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 딸을 잃고 나니 너무 아파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술 취한 남자가 나를 웃겨주었다. 언제나. 가끔은 그게 최고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 걸 읽고 내 마음이 좋았다. 웃겨주는 남자를 만나 웃을 수 있다니, 리디아의 삶도 이제 좋아질 것인가?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것인가?


p.256

하지만 내가 집에 들인 그 여자는 그동안의 나를 부숴버렸다. 그 괴짜 같고 똑똑한 두뇌는 나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이제 나는 섹스를 원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었다. 밤마다 들었던, 나를 마비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나는 관념의 나라를 여행하고 싶었고 생각을 체감하고 싶었고 내 머리 꼭대기를 터드려 열어젖히고 싶었따. 정신 나갈 때까지 술 마시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었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긴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된 순간, 내가 집에 들인 그 여자는 내가 말한 다른 방향의 행복을 몰고 들어온 여자였던 것이다. 섹스를 원하지 않고, 술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것.


p.267

처음으로 다리를 벌리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만났으니까, 당신이 이 말을 믿을 수도 있고, 꾸며낸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이것은 사실이다.


리디아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여전히 없다. 리디아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할 자격은


p.299

내 딸아이를 부검했던 의사는 진료실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사인을 정확히 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목에 탯줄이 감겨있던 것도 아니고, 확인 가능한 신체적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에요. 여기 부검 결과서입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곤 해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리디아의 표정이 보이는 듯 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리디아의 삶은 완전히 변해버렸으니까. 생명의 죽음, 딸아이의 죽음은 엄마인 리디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슬픔이라는 물속에서 숨을 참아내며 버텨야 했던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p.385

게이들도 수영장에 온다. 알아볼 수 있다. 다리가 털 없이 매끈하거나 귀걸이를 하거나, 글쎄, 수영 선수 말고 삼각 수영팬티를 입는 사람은 게이밖에 없으니까. 가끔 나는 레인을 가로질러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을 안아주고 싶은 이상한 충동과 싸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줘서 고맙다고,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사랑과 공감을 보여주어 고맙다고 표현하고 싶어진다. 비록 우리는 모르는 사이지만.


게이가 아니라도, 이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던 사람이 있다. 힘든 순간에도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리디아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p.391

남편 앤디가 아버지를 데려왔을 때, 내 자아는 두 명의 리디아로 쪼개졌다. 하나는 딸, 고통받아 망가진 소녀였다. 다른 하나는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한 여성이자 어머니, 작가였다.


아버지를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받아들여진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여러가지의 모습이 있다. 나는 리디아가 막 새로운 삶을 시작한 여성이자 어머니, 작가로 아버지를 보길 바랬다. 순간순간 고통받아 망가진 소녀가 나와 힘들겠지만 용서하지 않는 삶 또한 힘들테니까


이 책은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나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내가 너무 FM으로 살아서 지루하고 지겹다고 생각하는 사람, 일탈을 꿈꾸는 사람, 앞으로 10년이 그려지지 않는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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