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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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송중기가 찍었다는 영화로 유명해져서 십몇년만에 개정판이 출판된 책입니다.

 

90년대 후반 북한이 고난의 행군시기일 때 탈북해서 벨기에에서 난민이 된 로기완이라는 청년을 글로 쓰고자 하는 방송작가의 글이라고 해야되겠네요.

 

소설에서는 두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로기완과 윤주

 

로기완은 가난한 북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기근을 겪어야 했고, 그의 어머니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이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로기완은 어머니의 시체를 판 돈과 죄의식 두 가지 모두를 가슴에 품고 살기 위해 유럽을 떠돕니다.

 

여고생 윤주는 얼굴에 암으로 발전하는 거대한 종양을 달고 어둠 속에서 흐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 모두 그들의 선택이 아니고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단지 불행이 그들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로기완은 벨기에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 난민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또다른 선택을 하여 불안정한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윤주는 본인의 선택도 잘못도 아니지만 어쨌던 살아가야 합니다.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로기완은 벨기에에 떨어진 북한사람입니다.

프랑스어도 영어도 네덜란드어도 못하고 심지어 알파벳도 몰라 소통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신분증은 탈북과정에서 버렸습니다.

로기완은 본인이 누구인지를 누군가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보통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할 때 이름, 나이, 사는곳, 직업 등등을 말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신분증을 제출해도 되고 손짓 발짓 바디랭귀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름 나이 사는 곳등 문자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외에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우리의 경험에서 나의 지식과 경험이 완전히 쓸모없는 상황을 겪은 적이 없죠.

나는 누구인가?를 다른 이에게 설명할 때 우리는 이런 데이터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름 나이 사는곳 직업이 진짜 나는 아니죠.

진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려면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로기완과 윤주 말고 또 다른 두명이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방송작가인 김작가와 로기완을 도와줬던 박.

두 사람은 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작가는 선의로 한 행동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기에 누구도 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위로하지만 도의적인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 또한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행동의 결과를 스스로 치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알 듯 말 듯 한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보듬어주며 다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게 됩니다.

 

도의적인 책임이라는 말을 곱씹어봅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좋은 과정을 거쳤지만 의도치않게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우리는

얼마만큼 미안함과 책임감을 가져야 할까요?

주위의 사람들이 너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위로를 해주지만 극복하는 건 끝내 본인의 몫입니다. 다른 이들이 위로랍시고 해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책임감을 숫자로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길을 걷다가 소매치기를 발견했다고 칩시다.

슬쩍 발을 걸어 넘어뜨려 소매치기를 체포하는데 도움을 줬다면 아마도 칭찬도 받고 용감한 시민상 같은 것도 받겠죠.

그런데 소매치기가 넘어지면서 손을 잘 못 짚어 뼈가 부러져 깁스를 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조금 미안하기는 하겠지만 어짜피 나쁜 사람이니 벌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좀 많이 나가서 소매치기가 넘어지면서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쳐 식물인간이나 뇌사 또는 하반신 불구 등이 되었다면 어떨까요? 내가 얼마나 미안해 해야 할까요?

한발 더 나가서 알고보니 식물인간이 된 소매치기가 현상수배 중인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범이었다면 나는 미안하지 않아도 될까요?

깁스는 1만큼, 식물인간은 두달동안 뭐 이런 식으로 법으로 정해주면 얼마나 좋은까요?

도의적인 책임감이라는 주관적 감정을 객관적 수치로 대신해주면 어떨까 하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도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알듯말듯한 저 문장은 힘이 듭니다.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태어났으니까, 살고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이 책은 나에게 너는 누구이냐라고 묻고 왜 사냐고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있게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오랫동안 화두로 삼고 생각에 빠져볼 만 합니다.

ps.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책도 영화와 소설은 좀 많이 다릅니다.

송중기는 키가 159cm도 아닐뿐더러 탈북청년을 연기하기에는 너무 잘생겼습니다만 그걸 무시하고 본다면 영화는 꽤나 재미있습니다만 원작 소설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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