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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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백 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을 읽는데 하루를 몽땅 바쳤다. 어쩌면 오늘 대구에 갔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시간을 소진하는 것보다 이 소설 한편에 모두 쏟아 부은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공포물인가 했더니만 스릴러였다. 스티븐 킹 소설은 읽은게 거의 없지만 비슷한 류 일 것이다. 그래서 하루만에 읽은게 가능했겠지만. 그렇다고 킬링 타임 용으로써의 작품 정도는 아니다. 책 표지에도 있는 말처럼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소설이다. 이 작가의 전작인 ‘미스틱 리버’도 보고 싶다. 이 소설이 영화화 되고 있다던데 식스센스처럼 결말이 백미인 그런 영화가 될게다. 그래서 이 책의 리뷰에서 사람들이 모두 조심스러웠나 보다.


식스센스가 한창 극장가에서 상영될 무렵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한 남자가 “그거 범인 누구야!” 라고 말했다는 것처럼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충동적인 살의를 느낀다- 이 책의 반전을 리뷰에 모조리 풀어 놓는다면 아마도 이 출판사에선 내게 테러를 가할지도 모른다. 타인의 행복을 앗아가는 그런 파렴치한은 되지 말자.

<1954년, 외딴섬의 정신 병동에서 환자 한명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사를 위해 파견되 두 명의 연방 보안관은 실종 사건이 환자들을 대상으로 불법 시술을 일삼는 병원측의 비리와 관련있다는 추측ㅇ르 하곤 병원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중증 정신 병자들만 수용한 병동으로 잠입하려 한다. 하지만 몰아닥친 강력한 폭풍우로 정신 병동의 보안은 마비 상태에 이르고, 정신 병자들이 병동에서 쏟아져나오면서 연방 보안관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책 표지에 간략하게 소개된 줄거리는 대략 위와 같다. 여기서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한다면 나도 파렴치한이 될 것이기에 내용에 대한 언급은 피해야겠다.

결말에서 난 작가의 시각이 궁금했다. 하드 보일드로 끝낼 것인가, 휴머니즘으로 끝낼 것인가에 대해. 결과는 내 생각과는 달리 하드 보일드하게 끝나 버렸고 난 작가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쪽이 오히려 완성도가 더 높겠다 싶은 생각이다.


독자들을 감쪽같이 속인 작가가 참 깜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나 추리물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느끼면서 그제 읽은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에서 나왔던 마녀사냥이 생각났다. 미친다는 개념도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고 그것에서 열외 당하지 않으려면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면에서 비슷한 개념이지 않나. 진실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역시 집단이란 무서운 존재다. 군중, 시청자, 여론, 네티즌들로 표현되고 있는 집단들의 광기 혹은 파워를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무엇에도 관철 시킬 수 있다. 드라마의 결말을 좌지우지하고 마녀재판처럼 연예인 하나를 잡아다가 사장 시켜 버린다. 그들의 하나하나는 선량하고도 연약한 시민들이지만 뭉치면 괴물딱지로 변해 엄청난 파워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을 했나보다.

또 한가지,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는 벌어진 상처와도 같아서 세균이 더 쉽게 침투한다. 정신이 아픈 사람들은 이 상처를 잘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만 아픈게 아니다. 정신의 상처는 보이지 않기에 방치 될 위험이 더 크다. 게다가 그 상처는 나만이 알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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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 메피스토(Mephisto) 2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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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맨시니는 세상에서 섹스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섹스중독자다. 그래서 비행기, 여자 화장실, 교회를 가리지 않고 섹스에 탐닉한다. 그의 직업은 전문적인 질식사 연출 사기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음식이 목에 걸려 질식하는 척하는 것. 분명히 누군가 달려와 그를 구해낼 것이고, 그렇게 그영웅은 생명의 은인이 되어 그의 남은 여생을 책임지게 된다. 이백번도 넘는 사기극 덕분에 그는 매주 은인들이 보내 준 수표 세례를 받으며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단조로운 일상에 짜릿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내가 이짓을 하는 것은 영웅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사람은 누군가를 구해주면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책 표지에서




우선 이 작가는 특이하다. 생긴건 익살스러운 게 꼭 짐 캐리를 닮았는데 소설도 그렇게 익살 맞으며 때때로 천재성도 번뜩인다. 하지만 그 천재성은 움베르토 에코나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잘 닦여진 견고함이 아니라 성글고 거칠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기질이다. 컨테이너 열차의 엔진수리공으로 일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의 이력을 보니 더욱 이해가 된다.

처음엔 그 독특한 상상력들이 마치 ‘남자 아멜리 노통’ 같다고 느꼈는데 노통보다 몇 배 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천재성을 너무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학습되지 않은 길들여지지 않은 기질이 너무 오바 되어서인지 퇴고는 적어도 한두번 했어야 됐지 싶다. 너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것. 그게 자신의 발목을 잡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싶다.

<파이트 클럽>에서도 보여줬던 중독자에 대한 담론이 여기서도 나오는대 여기선 ‘섹스 중독자’ 하나만을 심도 깊게(?) 파고든다. -섹스 중독에 대한 아이디어는 여성편력이 심한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나갔던 섹스중독자 모임에서 얻었다고 하니 역시 이 시대의 글쓰기란 결국은 누가 더 많이 발품을 파는가에 달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파이트 클럽의 주요 소재가 ‘중독모임’ 과 ‘이중적 자아’였다면 여기서는 크게 ‘역할놀이’로 볼 수 있는데 이 연극적 역할 놀이는 정말 너무 한다 싶게 여러 가지 형태와 상황에 많이 써먹어서 좀 어지럽기도 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종국에는 “아주 신났네 신났어” 하는 심정이 될 정도로 작가는 혼자서 신나서 작품을 묘하게 끌고 나간다.

이 작가를 보면서 떠오른 국내 작가가 있다. 20대 초반, 내가 열렬히도 사랑했던 작가 장정일. 지금은 잊혀진 옛 애인처럼 아련하지만 뭔가 문학을 제도적으로 학습 받지 않은 독학파라는 느낌면에서 그들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그들의 상상력이 자유로운 것일까. 나도 그렇게 끊임없이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처럼 살면 안되겠지. 남들과 똑같이 읽고 보고 사고하면 안되겠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말들로 지금의 나를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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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로의 여행 -상
아이작 아시모프 / 작가정신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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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절판인지 사진을 구 할 수가 없어서 아시모프의 사진이 들어있는 다른 책으로 대신한다.



<두뇌로의 여행> 아이작 아시모프 -작가정신


SF계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 SF 문학에 있어서 이 작가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 이름은 익히 알고 있던 이 작가를 처음 만난게 바로 이 소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도서관 인문과학 코너를 방황하다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작 아시모프. 그의 연작들이 책장 한편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긴 소설.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있었고 로봇 시리즈와 두뇌로의 여행이 보였다. 이 소설은 상, 하로 두 권인데 전작으로 한 권짜리 ‘마이크로 결사대’ 라는 작품이 있다. 그 소설은 아주 오래된 영화(맥 라이언의 초기작이라고 한다)가 원작인데 축소된 잠수함을 타고 인간의 몸을 탐사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원작이 소설이고 그것을 토대로 영화를 만드는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마이크로 결사대는 먼저 나온 영화를 바탕으로 아이작 아시모프가 소설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거기서 아쉬움을 느꼈는지 그 이후에 선 보인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여기서 아시모프는 자신의 전공인 생화학에 대한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이 바탕이 되어 자칫하면 터무니 없어 보일 수 있는 상상력에 현실성을 얻어 준다. 게다가 미국 대 소련이라는 대립구도의 설정은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각 진영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줄다리기와 그런 욕망에 희생되는 과학정신의 순수성이 이 작가의 영리함을 보여준다.

저명한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이런 말을 했다. 약점을 보강하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더 발전 시켜라. 아시모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작가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3세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특이한 이력은 마치 낳아 준 엄마와 키워 준 엄마, 두 명의 모친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때문에 그는 미국의 편을 들 필요도 없고 소련의 편에 설 필요도 없으며 반대로 미국의 자본주의를 욕할 수 있고 소련의 경직된 사고를 비아냥거릴 수도 있는 포지션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 작가가 거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국을 선택한 것도 소련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시모프가 선택한 것은 과학자였다. 미국인도, 소련인도 아닌 과학자. 그는 과학자이자 작가였다.

이렇게 자신의 전공이 따로 있는 투잡 작가들을 보면 부러움과 질시가 생긴다. 변호사인 존 그리샴이 그랬고 준과학자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렇다. 소재꺼리가 얼마나 풍부해지겠는가. 하다못해 식품영양학과나 유아교육과를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문학을 전공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 이 얼마나 시대와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위치인지. 물론 내 떡은 언제나 남의 떡과 비교해 봤을 때 더 초라하고 맛없어 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배수아가 화학과를 나왔다해서 화학에 대한 소설을 쓴 건 못 봤다. 이윤기 선생님도 신화를 이야기할 제 빼놓을 수 없는 분이지만 그 분이 신화를 소재로 소설을 쓴 것도 아직 보지 못했다. 어찌됐든 핑계일 뿐이다.

각설하고, 제목이 말해 주듯 내용은 분자크기로 축소화 된 배를 타고 축소화 된 인간들이 뇌로 여행을 떠난다는 얘기다. 물론 나들이 가는 것은 아니고 세계의 석학-바로 이 축소화 이론을 만든 소련의 과학자- 샤피로프의 혼수상태인 뇌로 들어가서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머리 속에 있을 다 완성되지 못한 이론의 나머지 부분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과학자 모리슨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뇌파를 통한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연구중인데 인간의 뇌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의 뇌파를 자신의 뇌파에 맞게끔 설정해 놓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하다 보면 그의 생각과 감정들이 전이되어 오는 기이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그의 이론들을 받아 들이지 않았고 그를 미치광이 취급을 한다. 어쨌든 샤피로프는 생전에 그의 이론이 자신의 연구에 중계역을 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그로인해 모리슨은 소련으로 납치되어 온다. 그리고 그의 납치는 소련이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는 연구를 알아내기 위한 미국의 암묵적 용인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연구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순수한 과학자의 시각으로 볼 때 이건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인 것이다.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발전적일 것이었다.

하여, 그들은 축소화 되어 주사기를 통해 샤피로프의 대동맥을 지나고 소동맥을 지나서 모세혈관을 지나 뇌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백혈구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있었고 몇 개의 적혈구를 파괴하기도 했으며 혈소판을 정화 시켜 물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뇌에 도착하고 얼마 후 혈장의 흐름이 눈에 띠게 더디어 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샤피로프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지만 첫 인체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온 그들은 세상의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모리슨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여기서 반전.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한 줄 알았던 샤피로프의 이론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후에 이 사실을 안 소련에서는 그를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후다. 그리고 미국에 도착하여 정부기관원들에게 그동안의 일들을 회고한 모리슨은 양국이 정보를 합친다면 과학은 지금보다 더 눈부시게 발전할 거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고 말한다. 어쨌든 과학이 전부는 아니니까. 세상을 여러조각으로 갈라 놓기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이념과 종교, 인종, 민족, 관습, 역사 등등의 것들.

그리고 여기서 아시모프는 특유의 위트를 선보이는데 한 정부기관원의 대사다. 학계의 인정을 못 받던 이단아 과학자인 모리슨이 소련으로 납치되어 인체여행을 격은 후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고 나라에 이바지할 정보를 가지고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모두 6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몹시 지처 있었고 하루만 쉬겠다는 말을 한다. 7일째 되는 날 그는 쉬려 한다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패러디. 아시모프는 이런류의 농담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떤 단편에서 마지막 문장이 ‘빛이 있으라’ 였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SF라는 장르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그는 스스로를 조물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어찌됐든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피조물들에게는 신으로써 존재하니까.

1992년, 아시모프가 타계했을 당시 그의 팬들은 이런 말로 그를 잃은 슬픔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향별로 돌아가는 외계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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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범우희곡선 1
아더 밀러 지음, 오화섭 옮김 / 범우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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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 영풍에 갔다가 스테디 셀러를 세일하는 코너에 들렸다.
거기서 범우사의 범우문고 시리즈를 보게 되었는데 예전 삼중당 문고 크기의 들고다니기 딱 좋은 포켓 북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시대가 시대인지라 삼중당 문고보다 더 슬림하고 재질도 좋으며 은은한 베이지 톤의 표지가 세련돼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가격도 저렴해서 2800원 짜리가 세일가 2240원에 팔리고 있는게 아닌가! 나는 마음이 혹 해버려서 두권을 냅다 구입했는데 하나는 후지다 덴이라는 일본인이 지은 ‘유태인의 상술’ 이라는 책이었고 하나는 ‘카네기 처세술’이었다. 유태인의 상술은 맨 앞장에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읽으십시요’라는 극히 자극적인 문장이 적혀있다.

사실 그래서 사긴 했지만 오히려 돈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읽고도 돈을 벌지 못했다고 해서 책값을 환불해 주지는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데 그건 100퍼센트 활용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란다. 100퍼센트 모두 실행에 옮겼다면 당신은 반드시 부자가 되어있을 것이라지만 2240원 환불을 떠나서, 내 생각엔 이 저자가 현재 생존해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1926년 출생이고 생몰연도는 나왔있지 않기 때문에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만큼 나는 범우사에 대한 의혹도 높기에 과연 그들이 이 작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고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뒷면의 발행일자를 살펴보자. 초판 1쇄 발행일이 1979년 12월 25일로 나와있다. 내가 태어난 해의 크리스마스다. 마지막 발행일은 2004년 3월 20일이다. 나는 올해로 꼭 26년을 살았는데 이 책은 26년동안 계속 같은 판을 찍고 있다. 26년이라면 강산이 2번하고도 반이 바뀌었는데 책의 내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껍데기 예쁘게 바꾸기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범우사는 오래된 출판사다. 출판업계가 불황인 가운데서도 꾿꾿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나름의 노하우와 자본력도 있는가보다 싶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상품에 대한 연구와 보정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 범우사에서 나온 아서 밀러의 세일즈 맨의 죽음을 샀다. 초판 발행일이 1976년 5월 1일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번역한 오화섭 선생님은 내가 태어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번역한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분은 돌아가신지 26년이 지났다. 하루키는 사망한지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작가에 대한 이야기지 번역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불쾌했다.
30년 가까이 어째서 개정판을 찍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서 가격은 매해 올라가는 것 같다! 희곡의 언어는 구어체이지 문어체가 아니다. 언어란 시대와 함께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도 새로운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30년의 갭이 느껴지는 대화를 읽는다는 건 희랍비극을 읽는 것만큼이나 마음을 장엄하게 만든다.

가뜩이나 가독률이 떨어지는 희곡 분야는 이러한 장애로 인해 더욱 외톨이가 되어간다. 물론 출판사 입장에서도 변명은 있다. 희곡 부문은 책이 안 팔리기 때문에 투자 할 수가 없다는 것일게다. 누구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한다. 그래서 출판업은 소명감 없이는 못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그렇다면 정부 차원의 투자를 바라는 수밖에. 우리나라 번역사업이 얼마나 후졌는지 정부는 알고나 있을까.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왜 노벨 문학상이 나오지 않는거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목졸라 버리고 싶다.

표지의 아서 밀러의 사진 만큼이나 오래된 번역을 읽으면서 범우사가 이 번역판으로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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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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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주제 사라마구.

포르투갈에 첫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가.

아베 코보 때 느꼈던 천재적이라는 느낌, 전율이 왔다.

궁극적으로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의 모델이 되는 소설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의 맥을 잇는,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가상의 배경을 설정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 시키는 기법이 이강백 풍의 알레고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한명씩 차례차례 눈이 멀게 된다. 결국에는 도시 전체가 눈 먼자들로 뒤덮이는 상황.

그 아비규환의 한 가운데 단 한명의 눈 뜬자가 존재하게 되는 설정. 유일하게 앞이 보이는 ‘의사 아내’는 처음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며 남편과 사람들을 돕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눈이 보인다는 것을 실토하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온 도시가 눈 먼자들로 넘쳐나는 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과 자신의 남편, 그리고 수용소에서 함께 따라 나온 몇몇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뿐이다.

 

도시는 순식간에 오물 투성이로 변하고 사람들은 후각에 의존해 먹을 것을 찾아 승냥이처럼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닌다.

늘 보이던 것이 안 보이게 되면 안 보이던 것이 선명히 보이게 된다.

인간의 내부에 은닉되어 있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은 단 하나의 기능만 상실되도 짐승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사라마구는 인간의 오만을 꼬집고 싶었을까?

인간이 짐승보다 더 못해지는 것을 ‘의사 아내’는 홀로 목도하게 된다.

그녀는 너무나도 외롭고 자신이 지옥의 한 가운데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명언처럼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기에 자신들의 꼴이 어떠한지 의식하지 못한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아무데서 용변을 보고 그것들이 옷과 몸에 들러붙어 썩어가고 씻지 않은 몸에서 아니, 도시 전체에서 악취가 진동한다.

도시는 고인 물처럼 모든 것이 정체한 채 부패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바이러스가 거짓말처럼 퍼졌듯이 온도시의 시력들이 바캉스를 떠났다 돌아오듯 하나 둘 사람들은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의 장난처럼.

 

여기서는 신의 장난이 아닌 사라마구의 장난이다.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이 시대에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 살인을 하거나, 창작을 하거나.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저런 못된 장난을 치는 것으로 보아 주제 사라마구는 신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신이 틀림없다.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 이래로 자신의 인물을 저렇게 하드 트레이닝 시키는 작가는 처음이다. 그러고보면 작가란 신이 보기에 얼마나 되바라진 존재인가.

신이 가진 독보적인 장남감인 운명. 이를 조종하는 전지전능한 힘을 흉내 내다니.

 

시점이 독특하다.

‘우리’라는 1인칭 복수로 지칭되는 3인칭 전지적 시점. 전에 어떤 소설이었더라? 흔치는 않은데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시점은 서술자의 관점이 모호해지는 특성이 있는데 물론 작가의 의도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그 특징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선택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렇게 되면 렌즈가 훨씬 좁아지고 편협해진다.

 

그리고 ‘눈 먼자’ 들 속에 있는 ‘눈 뜬자’의 모습까지 그리기 위해서 사라마구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야 객관적 관점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걸 보면 소설은 감성보다 이성이 훨씬 우위에 있는 장르다.

과학적인 구성이 필요하고 객관적인 렌즈가 필요하다. 편견에 빠지지 않는 균형잡힌 시선이 필요하나, 내 생각과 색깔을 분명히 입혀야 한다.

 

나도 어서 저렇게 되바라진 존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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