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주제 사라마구.

포르투갈에 첫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작가.

아베 코보 때 느꼈던 천재적이라는 느낌, 전율이 왔다.

궁극적으로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의 모델이 되는 소설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의 맥을 잇는,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가상의 배경을 설정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 시키는 기법이 이강백 풍의 알레고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한명씩 차례차례 눈이 멀게 된다. 결국에는 도시 전체가 눈 먼자들로 뒤덮이는 상황.

그 아비규환의 한 가운데 단 한명의 눈 뜬자가 존재하게 되는 설정. 유일하게 앞이 보이는 ‘의사 아내’는 처음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며 남편과 사람들을 돕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눈이 보인다는 것을 실토하고 적극적으로 상황을 헤쳐 나간다.

 그러나 온 도시가 눈 먼자들로 넘쳐나는 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과 자신의 남편, 그리고 수용소에서 함께 따라 나온 몇몇 사람들을 돌봐주는 것뿐이다.

 

도시는 순식간에 오물 투성이로 변하고 사람들은 후각에 의존해 먹을 것을 찾아 승냥이처럼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닌다.

늘 보이던 것이 안 보이게 되면 안 보이던 것이 선명히 보이게 된다.

인간의 내부에 은닉되어 있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은 단 하나의 기능만 상실되도 짐승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사라마구는 인간의 오만을 꼬집고 싶었을까?

인간이 짐승보다 더 못해지는 것을 ‘의사 아내’는 홀로 목도하게 된다.

그녀는 너무나도 외롭고 자신이 지옥의 한 가운데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명언처럼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기에 자신들의 꼴이 어떠한지 의식하지 못한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아무데서 용변을 보고 그것들이 옷과 몸에 들러붙어 썩어가고 씻지 않은 몸에서 아니, 도시 전체에서 악취가 진동한다.

도시는 고인 물처럼 모든 것이 정체한 채 부패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처음 바이러스가 거짓말처럼 퍼졌듯이 온도시의 시력들이 바캉스를 떠났다 돌아오듯 하나 둘 사람들은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의 장난처럼.

 

여기서는 신의 장난이 아닌 사라마구의 장난이다.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이 시대에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 살인을 하거나, 창작을 하거나.

 

자신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 저런 못된 장난을 치는 것으로 보아 주제 사라마구는 신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신이 틀림없다.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 이래로 자신의 인물을 저렇게 하드 트레이닝 시키는 작가는 처음이다. 그러고보면 작가란 신이 보기에 얼마나 되바라진 존재인가.

신이 가진 독보적인 장남감인 운명. 이를 조종하는 전지전능한 힘을 흉내 내다니.

 

시점이 독특하다.

‘우리’라는 1인칭 복수로 지칭되는 3인칭 전지적 시점. 전에 어떤 소설이었더라? 흔치는 않은데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시점은 서술자의 관점이 모호해지는 특성이 있는데 물론 작가의 의도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그 특징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 아내’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선택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렇게 되면 렌즈가 훨씬 좁아지고 편협해진다.

 

그리고 ‘눈 먼자’ 들 속에 있는 ‘눈 뜬자’의 모습까지 그리기 위해서 사라마구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야 객관적 관점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걸 보면 소설은 감성보다 이성이 훨씬 우위에 있는 장르다.

과학적인 구성이 필요하고 객관적인 렌즈가 필요하다. 편견에 빠지지 않는 균형잡힌 시선이 필요하나, 내 생각과 색깔을 분명히 입혀야 한다.

 

나도 어서 저렇게 되바라진 존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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